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그 가족, 그리고 환경보건시민센터를 비롯한 시민환경단체 등이 피해자를 위한 법 제정을 목 놓아 외친 지 4년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법이 통과됐다. 사실 이 법은 지난 2013년 19대 국회에서 만들어져야 했다. 당시 관련 법안이 4개나 발의되었지만 박근혜 정권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
피해구제법이 통과된 그날 '가습기살균제 항의 행동' 밴드 등 여러 SNS 커뮤니티에서는 법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 강찬호 대표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한 고비는 넘겼다"는 짤막한 말을 보탰다. 어떤 이들은 가해 기업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조항은 왜 빠졌느냐는 불만을 드러냈다. 또 누구는 3단계와 4단계 피해자들이 실질적인 피해구제를 받을 수 있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징벌적 손해배상 빠져 반쪽짜리로 출발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국회에서 피해구제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빠진 것에 대해 완강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일단 법을 통과시킨 뒤 계속해서 보완해나가자는 수정주의 입장과 나중에 문제를 보완하기가 쉽지 않으니 처음부터 제대로 된 법을 만들자는 원칙주의(내지 교조주의) 입장이 피해자·유족 사이에서 서로 엇갈려 팽팽히 맞섰다. 국회는 이들 가운데 수정주의 쪽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이언주 의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은 법무부, 정부, 여당의 법사위 위원이 반대했다. 선례가 없는데 이를 인정하면 계속 다른 부문으로 확대되거나 통제가 불가능해질 수 있으며 우리나라 법제에선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본격적으로 도입이 되지 않았다"라는 이유를 들었다. 향후에 징벌적 손해배상의 일반적인 보상 범위와 사회적 필요성을 광범위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 제정은 국회를 비롯한 우리 사회가 일찍 제기된 문제에 대한 해(解)를 매우 늦게 푼 사례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단군 이래 최대의 환경 참사인 가습기살균제 사건이라는 난해한 고차원 방정식을 푸는 해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습기 살균제 특별법 제정은 여러 해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또한 이 해법은 완벽한 것이 아니다. 다른 해법도 함께 나와야 한다.
예를 들면 이 법은 현재 가습기살균제 피해 신고자 가운데 정부와 가해 기업 어디한테도 피해구제와 피해배상을 받지 못한 채 육체·정신적인 측면 모두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3단계와 4단계 피해자에 대해 뚜렷한 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 법은 또 폐 이외 질환 판정위원회 등에 대한 규정 등을 두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 판정기준 등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해 어떤 질병을 어떤 기준으로 피해구제 또는 배상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시간 갈수록 피해구제 등급 판정 비율 낮아져
올해 1월 15일까지 가습기살균제 피해 신고를 해온 사람은 모두 5380명이고 이 가운데 20.9%인 1122명은 사망자라고 밝혀왔다. 하지만 이 가운데 실제 정부 판정에서 사실상 피해 인정을 받고 있는 1단계와 2단계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신고접수와 판정을 시작한 2013년 이후 3년여가 지났음에도 이 가운데 겨우 883명에 대해서만 판정을 마쳤다. 이 가운데 구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은 31%인 276명에 그쳤다.
문제는 최근에 올수록 피해신고자 가운데 1단계와 2단계 판정을 받는 피해신고자 비율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환경부가 지난 13일 발표한 3차 피해신고자 가운데 일부에 대한 2차 판정에서는 188명 가운데 9.6%인 18명만이 1·2단계 판정을 받아 생활비 등 정부지원금을 받을 자격을 얻어냈다.
더욱 문제인 것은 이 판정 또한 중중폐질환에 대한 것이어서 반쪽 판정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올해와 내년 폐렴, 천식, 기타 장기 질환 등에 대한 새로운 판정 기준이 나오면 3단계와 4단계 판정을 받은 이들에 대해서 모두 다시 재판정해야 한다. 이처럼 피해접수와 판정에 정부가 거북이걸음을 한 근본적 이유는 가습기살균제 사건에 대한 박근혜 정권의 미온 대응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은 가습기살균제 참사 해결의 골든타임을 놓치고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분노가 성난 파도처럼 밀려온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켜켜이 쌓인 문제점 등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 제정은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는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점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은 피해 개인에 대한 피해구제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피해자의 눈높이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해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나 기구 마련 등은 포함돼 있지 않아 앞으로 정부와 가해기업, 그리고 피해자 간 갈등이 심각하게 빚어질 가능성이 상존한다.
우리 사회에서 환경질환 피해로 인한 피해구제를 담은 법안이 만들어진 것은 가습기살균제 피해가 처음은 아니다. 이미 2011년 석면피해구제법이 제정·시행된 바 있다. 그 뒤 5년이 넘었지만 석면피해구제법은 여전히 계속 쏟아지고 있는 석면피해자들을 제대로 보듬는데 한계점을 노출하고 있다. 특히 석면폐증 2등급과 3등급 판정자들은 악성중피종 환자나 석면폐증 1급과 달리 2년이라는 매우 짧은 피해구제 기간 때문에 불만이 폭발하고 있다.
생명 존중 세력과 돈 존중 세력 간의 투쟁
우리 사회에서는 엄청난 정치·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재난이나 안전사고에 대해서조차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거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서해 페리호 침몰, 구포역 열차 탈선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성수대교 붕괴 사고, 대구 지하철 참사 등은 이제 재난역사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취급되고 있다. 원진레이온 직업병 사건에 이어 우리들에게 충격을 준 삼성백혈병 등 반도체 공장 노동자 직업병 참사도 이제는 언론의 조명을 받지 못하고 유족들은 차디찬 길거리에서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세월호 참사도 언제 이런 취급을 받을지 모른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급성골수 백혈병에 걸려 4년여 투병생활을 하던 김기철 노동자가 지난 14일 숨졌다. 79번째 삼성직업병 피해 사망자였다. 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인 지난 16일 서울 서초동 삼성본관 앞에서 태극기를 든 엄마부대 시위대가 유족 농성장 인근으로 몰려와 유족들이 내건 삼성직업병 해결 요구와 직업병문제를 외면하는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규탄 글귀가 적힌 현수막들을 무차별적으로 훼손했다.
그들은 '엄마'라는 이름을 결코 쓸 수 없는 이들이었다. 엄마를 빙자한 극우폭력집단이나 다를 바 없다. 생명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것을 보면 무늬만 엄마부대인 셈이다. 대한민국 진짜 엄마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폭력적 행위였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져왔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재난과 사건 등의 경과 과정을 곰곰이 성찰해보면 돈이 먼저인 사람 또는 집단과 생명이 먼저인 사람 또는 집단이 분명 있다. 말로는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생명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하는 이들이 있다. 가짜 엄마부대가 이를 증명해주었다.
이런 이들이 있는 한 재난과 참사 피해자를 위한 그 어떤 피해구제법이 만들어지더라도 그것은 사건의 해결을 위한 마지막 수순이 아니라 새로운 싸움을 위한, 생명 존중 사회를 위한 시작임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한다.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이 반쪽이어서 두 손을 모두 들고 환영할 수는 없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싶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습기살균제법 제정이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우리 역사에서 영원히 새길 화룡정점이 아니라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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