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의 '경제민주화 담론' 비판…"산업적 시민권을 요구하자"

[기고] 노동, 노동자, 그리고 '노사정주의'의 재정립

박근혜 대통령이 터무니없는 국정 농단 사건의 주역으로 밝혀지면서, 박근혜 정권의 모든 정책은 전사회적으로 끊임없이 의심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한국의 정치, 사회, 경제적 적폐의 더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계기로 작동했다. 세계의 정치, 경제 질서가 변화하는 '격동기'의 길목에서, 우리가 구축해 살아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이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지난 5년 여간 한국 사회의 지배적 위치를 점했던 '경제민주화 담론'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는 그간 사회를 이루는 최소의 단위, 즉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소홀히 했다. 노동 문제를 협소화시켰다. 물론 이는 자본과 정치권력을 독점해 온 기득권 계층의 '프레임 오염시키기'에 말려든 결과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누려야 마땅했을 '산업적 시민권'을 못 본 체했다. 노동 문제를 '그들의 것'으로 치부했고, '경제'를 위해 그것을 희생시키는 것이 마땅하다는 묵계에 의해 움직였다.

노동이 빠진 경제민주화 담론을 비판하고, 노동 운동과 시민 운동이 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글을,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싣는다. 이 글의 원제는 '노사관계의 민주화와 '산업적 시민권'의 실현을 향하여'이다. 편집

1. 경제민주화 담론의 문제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들만큼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는 사회 집단은 없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부정적인 편견의 대상이 되는 사회 집단을 꼽으라면 노동자들과 노동자들의 조직체인 노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연장 선상에서 노동자, 노동운동은 정치적으로 배제 또는 억압되고,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의 성장 혜택으로부터 불공정한 배분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는 민주화 이후 보수적 정부들이나 진보적 정부들이나 큰 차이가 없다.

혹자는 경제민주화를 시대정신이라고까지 말하지만, 이 말은 조직노동자들과 그들의 운동이 민주적 가치와 규범, 그리고 제도 속으로 포용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담지 못한다. 경제민주화 담론의 중심 주제인 재벌개혁 이슈에서도 노동 문제는 그 중심 요소의 하나로 포함되지 못하고 있다. 사회 복지 정책을 운위할 때도 노동조합의 역할을 함께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노조의 역할 없는 사회 복지 체제의 확대는 분명 '복지관료행정체제'의 역할과 권한, 복지 전문가들의 역할을 확대하면서, 관료주의와 온정주의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대기업, 중소하청기업 내에 노조가 허용된다면, 또 그것이 자율적이라면, 그리고 대재벌 기업의 사업장, 회사 내의 작업장이나 일터의 분위기는 훨씬 더 민주적이 되고, 일에 대한 윤리와 열성, 자유와 개인 이니시어티브를 더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대졸자들의 직장체류기간이 왜 그렇게 짧은 것인지, 또는 노조가 허용되지 않는 중소기업에 왜 대졸자나 좋은 인력이 취업을 회피하는지에 대해 정책결정자들이나 기업들은 잘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정치인들과 정책결정자들은 중소기업에서의 인력 수요와 대졸자들의 인력공급 사이의 미스매치에 대해 말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한 노조의 긍정적 역할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기업 내의 자체 혁신과 자발적 노동 윤리를 창출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러한 기업 구조를 통해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은 얼마나 효율적이고, 효과적일 수 있을까에 대해 회의적이다.

2. 노동과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노동과 노동운동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노동운동의 내용과 성격 역시 달라져야 한다. 노동자, 노동운동은 제조업 부문에서 우리가 보통 노동자, 노동조합이라고 말할 때의 의미보다는 훨씬 넓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을 직접 일하는 사람, 일을 통해 사회경제적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으로 정의하는 것이 더 좋고, 더 옳다. 노동자라는 말은 극히 넓은 의미를 가진다. 그러할 때 노동 문제는 모든 사회 구성의 중심에 위치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자라고 말할 때, 산업부문 가운데서 특히 제조업생산부문의 일하는 사람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좁은 의미에서의 노동자를 말할 뿐이다. 그럼으로 일반적 의미에서 노동자는 생산직 노동자, 사무직 화이트칼라, 서비스 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소(小)자영업자 등, 여러 다른 기능적 범주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를 포함한다.

우리가 보통 노동 문제라고 하면 노사 간 대립, 갈등이 일단 머리에 떠오르고, '불손하다',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 '국가의 중심적 가치와 목표를 실현하는데 장애물이다' 이런 인식이 강하다. 노동자 하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성원이라고 생각하고, 칼 마르크스의 계급 혁명과 연결시키게 되고, 나아가서는 북한 체제의 공식 이데올로기와 뭔가 관련된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사실 계급 문제를 제일 먼저 말했던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정치 이론의 시작, 민주주의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부자와 빈자 간의 계급 갈등은 그 중심 주제의 하나이다. 프랑스 혁명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 헌법을 이론적으로 설계해서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 4대 대통령인 제임스 매디슨도 미국 연방국가의 제도적 원리를 구상하고 발전시킬 때 노동 문제로 발생하는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어떤 것보다 깊이 생각했다. 그 가운데서 마르크스는 계급갈등을 혁명이론으로 발전시켰던 대표적인 급진적인 사회이론가이자, 사상가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노동문제를 보는 관점, 그것을 이해하는 데는 여러 이론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요컨대 노동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3. '산업적 시민권'의 요구

노동 문제를 배제하는 것은 일을 통해 먹고 사는 사람들의 인간됨, 인간의 자유와 평등함, 인격성과 자기존중, 이러한 인간적 삶의 핵심적 가치를 제약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인권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것은 가장 기초적인 면에서 시민권에 상응하는 말이다. 2차 대전 후 영국에서 사회복지체제의 발전과 당위성을 이론화한 사회학자 T.H. 마샬의 이론을 따르면, 보편적 인권을 기초로 시민권 개념이 출현한 18세기로부터 20세기 전반기에 이를 때까지 시민권은 진화하면서 확대돼 왔다. 19세기 중후반 이후 보통선거권의 확대를 뒷받침한 정치 참여의 권리로서 정치권으로,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사회가 경제 발전의 결과로 획득하게 되는 성과를 개인의 사회 경제적 생활을 위해 분배받을 수 있는 사회적(경제적) 권리로 확대 발전돼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땅히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산업적 권리(industrial rights)에 대해서는 마샬이 그 중요성을 언급했다 하더라도, 이를 시민권, 정치권, 사회권을 중심으로 한 일반적 시민권(citizenship) 개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점에서 1980년대 초 사회학자 안소니 기든스가 산업적 권리가 시민권 개념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생산 부문의 작업 현장에서 그리고 노동 현장에서 사용자 측과 대화하고 교섭할 수 있는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말한다.

무엇보다 결사체로서의 노조를 조직할 수 있는 권리, 경영 측과 평등하게 교섭할 수 있는 노동자/노조의 권리를 내용으로 한다. 그리고 기업과 작업현장에서 경영 측과 노조가 대화하고 교섭하듯이, 전국 수준에서도 노조가 상호 인정과 존중을 통해 사용자 단체와 교섭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다. 또한 노동시장에서의 임금에 관한 단체교섭을 할 수 있는 권리 등을 포함한다. 물론 산업적 시민권은 노조가 노동자들의 권익과 의사를 대표하고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도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4. 한국에서의 노사정 3자 협력기구는 유럽의 코포라티즘적 제도인가?

박근혜 정부의 노동 정책은 노사정위원회를 설치하고, 노사정합의를 통해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추진해온 것을 중심으로 한다. 여러 개혁 이슈들 가운데서도 노동자파견법 개정을 밀어붙이고, 노동자 평가를 강화하는 것을 통해 해고의 범위를 사실상 확대하고, 노동자들에게 불이익을 안겨줄 내용들이 이 기구에서 중심적인 쟁점으로 부각된 바 있었다.

이 제도의 문제는 형식에 있어서는 합의적 측면을 가질 수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격렬한 노조의 반발을 불러오는 내용으로 합의를 강제한 억압적 성격이 강했다. 이를 억압적, 배제적 코포라티즘(Corporatism, 흔히 정부의 개입을 전제한 '노사정주의'로 번역된다. 편집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하고 있는 것은, 공권력의 동원을 통해 노조로 하여금 합의하도록 강제하는 권위주의적이고 배제적인 '국가코포라티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에서의 코포라티즘은 70, 80년대를 통하여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에서 그 전성기를 누렸던 사회협력적인 '사회적 코포라티즘'은 아니다.

이 시기 유럽에서의 코포라티즘은 노조가 자발적으로 노사정협력기구에 참여하여, 정부의 소득 정책을 추진하는데 협력했다. 스스로 임금을 억제하고, 노동 시간을 줄이면서, 기업 이익 창출에 협력하고 경제 성장 둔화에 대응하면서 재정 압박을 완화하는데 솔선하여 스스로 그들의 이익 실현을 자제했다.

노조는 노동자들의 이익 실현에만 몰두하는, 자기 이익 실현을 위한 결사체만은 아니다. 노조는 기업의 이익 실현에 협력하고,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그리고 경제 불황기 사회 전체의 경제 성장을 위해 스스로의 이익 실현을 절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칼럼은 <노동사회> 192호(2017년 1.2월호)와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홈페이지에도 실렸습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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