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에게 사법의 문턱은 높다. 근처에 가기도 겁난다. 경찰이나 검찰이 나를 찾아온다면, 이것저것 캐 묻는다면, 그리하여 증인으로 법정에 선다면 오금이 저릴 것이다. 자칫 일이 잘못되기라도 할 경우, 높은 문턱에 걸려 넘어지리라는 겁부터 들기 마련이다.
국가가 인정한 압도적 권력이기에 공권력은 극도로 신중히 발휘되어야 한다. 만일 사법이 정의의 이름으로 죄 없는 이를 단죄한다면, 억울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운다면, 국가는 마땅히 이를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
아마도 이런 일은 우리 사회의 약자에게나 일방적으로 가해질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국가가 휘두른 무참한 권력에 당한 이의 망가진 삶은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짜 정의의 심판을 휘두른 이 대신 엉뚱한 이가 처벌받기 때문이다. 피해자와 누명을 쓴 이 모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우리 사회가 마땅히 '지연된 정의'를 뒤늦게라도 실현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독재 정권에 희생당한 수많은 용공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이 얼마나 힘든 투쟁을 이어갔는가를 기억하고 있다.
이런 일은 지금도 벌어진다. <지연된 정의>(박상규·박준영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는 국가가 씌운 누명으로 인해 억울한 옥살이를 한 이들을 조명하고, 관련 사건을 되새겨 희생자의 재심을 이끈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책은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 내년 영화 <재심>으로 소개될 예정인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 완도 무기수 김신혜 사건을 다룬다. 셋 모두 언론을 통해 여러 차례 다뤄진 사건이다.
<지연된 정의>는 개별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되어 옥살이를 한 이들(김신혜는 지금도 교소도에 수감 중이다)에게 초점을 맞춘다. 이들을 중심으로 사건을 재검토하고, 수사와 재판에 문제는 없었는가를 짚어간다. 당연히 책은 이들을 공권력의 강권에 의해 누명을 쓴 희생자로 본다.
실제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 가해자로 옥살이를 한 셋은 지난 10월 28일, 무죄 판정을 받았다.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 용의자로 수감되었던 최성필(가명) 씨도 재심 결과 무죄를 선고 받았다. 무기수 김신혜 사건과 관련해서도 지난해 법원은 경찰의 위법 수사를 인정했다.
희생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 사회의 철저한 약자다. 삼례 3인조 중 강인구 씨는 말을 더듬는다. 엄마는 그가 일곱 살 때 사망했다. 지적장애를 가졌던 아버지는 강 씨를 자주 폭행했다. 경찰의 '범인 만들기' 공작 과정에서 당한 폭행으로 인해 코가 뒤틀린 임명선 씨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친구들의 폭행에 시달렸다. 최대열 씨는 신체장애인 부모를 위해 어릴 적부터 돈을 번 지적장애인이다.
경찰은 범인을 봤다고 증언한 당시 미성년자 최성필을 모텔로 끌고가 줄기차게 폭행해 범인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의 진범을 찾으려던 양심적 형사는 결국 좌천돼 다시는 수사 무대에 서지 못했다. 경찰은 위법 가택수사에서 얻은 김신혜 씨의 누드사진을 몰래 빼돌려 수사 과정에서 그에게 성폭력을 가했다. 공권력은 이 사회의 약자들에게 시퍼렇게 날선 칼을 휘두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법원은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졌는지를 검토하지 않고 피해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해, 그들의 인생을 도둑질했다. 비록 피해자들에게 '지연된 정의'가 찾아왔지만, 그들의 빼앗긴 삶은 무엇으로도 보상받지 못한다.
이 책은 다음 스토리펀딩 기획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로 독자들에게 먼저 알려졌다. 고졸 출신 국선 변호사로 (돈 안 되는) 약자들의 편에 서온 박준영 변호사와 <오마이뉴스> 출신의 박상규 기자가 이 책의 이야기를 함께 만든 주인공이자, 글쓴이다.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추천사처럼 "우리 시대 법이 약자를 어떻게 대해 왔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이 책의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공권력의 뻔뻔함에 분노가 치민다.
법은 과연 만인에게 평등한지, 과연 법은 약자를 위해 제대로 기능하는지 되묻게 만드는 힘을 지닌 책이다. 더불어, 용기와 신념으로 약자의 편에 기꺼이 서서 공권력의 패악질에 맞선 저자들의 인내에 경의를 표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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