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연쇄살인 범인 누명에 자살한 남편, 악몽은 아직도…

[그때 그사람을 찾습니다·①] "우리에게 사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산인권센터가 올해로 20주년이 됐다. 10월 27일 인권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한 인권단체의 20년을 추억하고 기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야만적인 인권현실 앞에서 무엇을 향해 가야 세상이 좀 더 나아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2012년이다. 다신인권센터는 지난 20년이라는 과거를 더듬어 현재를 또는 미래를 안아보려 한다. 과거 인권현장과 그곳에 함께했던 사람들을 다시금 찾아 꺼내보려 한다. 단지 기념하거나 추억하기에는 치열하기만 한 현재가 과거를 거울삼아 성큼 한걸음 내딛고 그리고 사실은 위로받기 위해서, 그때 그 사람을 찾아가고자 한다. <편집자>

2003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 제작 노트에 써 있는 글이다. 영화는 경찰들의 눈으로 만났던 살인범에 대한 추억을 되짚고 있다. 정부가 시국사건에 경찰들을 떼로 몰고 다니던 그때 시골마을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한 힘없는 여성들의 비극을 보여주었던 영화로 기억하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던 영화처럼 현실에서도 진범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1986-1991년.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반경 2Km 이내에서 6년 동안 10차례의 강간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71세 노인에서부터 13세 여중생까지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한 한국사회 최초의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점에서 충격은 더욱 컸다. 태안 지서에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고 도경, 시경의 모든 베테랑 형사들이 투입되었다.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금전 관계나 강도여부, 치정관계 등에 혐의를 두고 주변 인물들을 관찰하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 화성연쇄살인사건은 한국 경찰에게 그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미국 FBI처럼 프로파일링(Profiling) 수사도 없었고, 철저한 현장 보존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수사의 노하우도 없었다. 그저 형사들의 사명감과 지구력에 의존한 끊임없는 탐문 수사만이 있을 뿐이었다. 부조리한 시대, 조악한 경찰조직의 말단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끔찍한 사건에 맞닥뜨린 그들에게 기댈 곳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그들이 간절히 원한 것은 더 이상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유력한 용의자를 검거하고도 물증이 없다는 이유로 늘 기각되고 만다. 180만 명의 경찰이 동원되었고 3천여 명의 용의자가 조사를 받았지만 결국 단 1명의 범인을 잡는데 실패하고 만다. 범인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우직하고 성실한 남편, 어느날 갑자기…

가을 햇살이 곱게 내리는 주말 오후, 김영아 씨(가명)는 오전 일을 마치고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20년의 세월이 고단했을 법도한데 김영아 씨는 여전히 고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꺼내 놓은 낡은 사진 속에서 남편 유은태 씨(가명)는 듬직하게 웃고 있었다.

"단추공장 다닐 때 만났어요. 애들 아빠는 2층 섬유공장에 다녔어요. 사장님들끼리 서로 소개해 줬는데… 그때는 뭐 그런 거 있었나요. 그냥 사람 좋아 보이고 그러면 마음잡고 결혼해서 사는 거죠. 26살 때, 그 사람이 한 살 많으니까 27살이었어요. 전쟁 때 아버지 잃고 원호 대상자로 어렵게 살았다고 했어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만, 사람이 듬직하고 좋아서 결혼 했어요."

그렇게 결혼해서 3남매를 낳았다. 첫째가 딸, 둘째 셋째가 아들이었다. 어렵게 시작했지만 하나씩 장만하는 맛이 있었다. 남편은 워낙 우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사건이 일어나던 때 남편은 화성 인근의 큰 농장에 농장장으로 있었다. 남편은 오토바이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처음 화성경찰서에 잡혀갔을 때는 큰 걱정 안했어요. 워낙 소문난 사건이었고 인근에 있는 남자들은 다 조사받기도 하고 그래서.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은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런 믿음이 있었어요. 몇 년 뒤에… 93년이던가…. 범죄와의 선포한다고 할 때… 서대문 경찰서에서 사람들이 처음 올 때만 해도… 그때만 해도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한테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 김영아 씨의 남편과 아이들 사진. ⓒ다산인권센터

그때부터 김영아 씨의 말은 눈물과 한숨으로 이어지고 끊어지고를 반복했다. 왜 그렇지 않았겠나. 20년 동안 지속된 아픔이었다. 화성경찰서에서 무죄로 풀려났던 똑같은 사건은 몇 년 뒤 서대문 경찰서로 넘어갔다. 한 제보자에 의해서였다. 증거도 없고 혐의도 불충분한 상태에서 잡혀간 남편은 서대문서에 간 3일 동안 모진 일들을 당하고 내려온다. 씨름대회도 나갔던 덩치 좋은 남편은 이후 사람이 이상해졌다고 한다.

"뭐라고 해도 믿지 못 할 거예요. 그 3일 이후 애들 아빠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닫혀있는 방문을 보고도 문을 꼭 잠그라고 했어요. 경찰들이 또 아빠 잡으러 온다, 문 잠궈라… 삶에 대한 애착 이런 게 다 없어졌어요. 회사도 다니지 않았고… 애들은 아직 초등학교 다니고 있었는데… 단칸방에서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는데, 그렇게 고문 받고 와서는 일도 안하고 술로 버텼어요. 그렇게 견디다 못해 자살한 거지…."

고문 뒤 달라진 남편의 인생

서대문서에 끌려가 3일 동안 당한 고문으로 유은태 씨의 인생은 달라져버렸다. 더 이상 성실하고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그러한 누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못견뎌했고 괴로워했다. 자신이 당한 일을 허심탄회하게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 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어린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김영아씨는 가정경제를 도맡았어야 했다. 술만 먹고 괴로워하는 남편을 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본인도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저도 속이 상해서 술만 먹지 말고 이겨냈으면 했는데… 신랑 원망도 많이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나라도 못살겠다 싶어요… 애들도 다 어렸을 때라… 한없이 불쌍하죠…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랬을까… 그걸 달래주고, 치료해주고… 요즘 같기만 했어도, 그렇게 도와줄 수 있었을텐데…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우린 아무것도 몰랐어요. 험한 일 당해서 국가배상해서 위자료를 받았지만 그걸로 우리 생활이 보상되는 건 아니었어요. 얼마나 힘들었을지 달래주지 못하고…."

1997년 유은태 씨는 스스로 생을 놓았다. 고문 후유증과 자괴감이 이유였다.

"애들이 셋이나 되니까.…그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어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죽도록 일할 수밖에 없었고… 오늘도 1시까지 일했어요. 저녁에도 또 일하러 나가야 해요."

김영아 씨에게 삶은 전쟁과 같았다. 그렇게 떠난 남편. 그러나 아이들 때문에 이를 악물고 살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키운 아이들이 다 성장해서 위로 둘은 결혼하고 지금은 막내하고 둘이 살고 있다. 평범했던 한 가정에 닥쳤던 불행의 파도 중에도 그렇게 사람들은 묵묵히 살아냈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아빠를 제보하고 경찰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가족을 괴롭혔던 제보자 심양보(가명)는 아직도 그들에게 악마다.

"그때 당시에 누명 쓴 사람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저희 같이 끝까지 죽을 때까지 이렇게 당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경찰들하고 그 놈이 같이 다니면서 괴롭혔어요. 처음엔 그 놈이 경찰인 줄 알았어요. 살인사건… 피해자들 사진… 정말 끔찍해서 볼 수 없는 걸, 책으로 만들어서 저한테 보여줬어요. 니 남편이 이렇게 죽였다. 이걸 인정하면 돈 5000만 원 줘서 너희들은 살게 하겠다… 뭐 이랬는데, 내가 내 남편을 몰라요? 말도 안 되는 소리한다고 쫓아냈죠. 그런데 그놈이 지금도 우리를 이토록 괴롭힐 줄 그때는 몰랐던 거죠."

끝나지 않는 괴롭힘

심양보는 남편 유은태 씨의 죽음 이후에도 가족을 괴롭혔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유은태 씨고, 그의 죽음은 김영아 씨의 독살에 의해서라는 소설을 책으로 냈고 카페를 개설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일이 벌이지고 있는 줄 꿈에도 몰랐었다.

"어느 날 장가간 아들이 책을 들고 온 거예요. 엄마 이게 뭐야… 그러면서 따져 물어요. 그때 책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들이 엄마를 불신한 거지. 너무 놀라서 애가 손을 벌벌 떨어요… 내가 말을 할 수가 없었어…."

그렇게 말하는 김영아 씨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서러움이 복받친 세월을 어떻게 말로 이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엄마와 아들은 1992년 당시 아빠의 무죄와 국가배상청구를 맡아줬던 김칠준 변호사를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심양보의 책과 카페 글에 대한 출판 등 금지조치와 심양보에 대한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하게 되었다. 법원은 이에 대해 피고 심양보의 위자료 지금과 출판물에 대한 출판 금지를 판결하게 되었다.

"그 놈도 너무 나쁜 놈이고… 우리를 이 지경까지 만든 국가가 너무 미워요. 그때 그 경찰관들… 나쁜 놈한테 현혹돼서 같이 우리를 망쳐놨어. 반성도 없어. 우리는 죽거나 말거나 무차별적으로 그런거잖아요. 진정으로 사과라도 받으면 속이라도 편할텐데… 지금까지 우리한테 사과하러 온 사람 단 하나도 없었어요."


▲ 김영아 씨를 인터뷰 중인 박진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다산인권센터

험한 시절이었다고 변명하면 될까

험한 시절이었다고, 변명하면 될 일일까. 김영아 씨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내가 당한 일이 아니었다고 돌아서면 될 일일까. 무능력했고 심지어 우악스러운 국가의 패악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개인들의 고통. 처음 다산이 만들어졌던 90년대 초반의 사건이 20년을 건넌 21세기 초반까지 이어지고 있는 동안… 그 잘난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 이 초라한 인권운동은 무엇을 했는가. 사건으로 또는 판결문으로 읽을 수 없는 김영아 씨의 눈물.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

이 글을 마치고 알음알음 지인들을 모아 김영아씨와 가족들이 당한 아픔을 치유 받을 수 있는 심리 상담가도 찾아볼 생각이다. 그리고 언젠가 유은태 씨의 무덤에 소주한잔도 올려야 하지 않겠나. 김영아 씨가 일한다는 곳에서 따뜻한 식사 한 끼도 할 생각이다. 무엇보다, 여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사람다운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억울한 삶들이 아직 도처에 있다. 그 눈물 닦아주기 위해 다시 20년의 걸음을 디뎌야 한다. 우리가 20년을 돌아보는 역사 속의 사람 이야기를 그래서 이렇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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