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갈 방향에 대해 거짓말을 할 수는 있어도, 지나온 흔적은 속일 수 없다. 온 나라의 관심이 쏠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를 담당할 박영수 특별검사. 일부 언론은 그를 가리켜 '재벌 저승사자'라고 부른다. 현대자동차 비자금 사건을 수사하며 정몽구 회장을 구속시킨 이력 때문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삼성 게이트'
이런 평가가 옳다면, 특검을 제대로 고른 셈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사실상 '삼성 게이트'이기 때문이다.
삼성은 최순실 씨 일가에게 직접 현금을 보낸 유일한 재벌이다. 다른 재벌들은 미르재단, K스포츠 재단 등에 출연금을 냈을 뿐이다. 반면 삼성은 이들 재단에 가장 많은 돈을 냈을 뿐 아니라, 최 씨의 딸인 정유라 씨를 위해 다양한 지원을 했다. 정 씨가 승마 선수로 자리 잡도록 하는데 쓴 돈이 100억 원대다.
그 대가로, 삼성은 박근혜 정부로부터 다양한 특혜를 누린 정황이 있다. 이와 관련해 삼성은 거짓 해명으로 일관했다.
그렇다면, 질문이 좁혀진다. 박 특별검사는 '재벌 저승사자' 맞나? 그는 '삼성 게이트'에 대해서도 철저한 수사를 할 건가?
2002년 대선 삼성의 불법 정치 자금, 모두 '면죄부'
박영수 특별검사가 지나온 흔적을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지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삼성은 채권 837억 원을 조성했다. 이 가운데 324억7000만 원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 21억 원을 노무현 캠프에, 15억4000만 원을 김종필 전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에게 각각 건넸다. 삼성 퇴직 임원들에게도 돈이 일부 전달됐는데, 이 과정에서 세금은 붙지 않았다.
이 사건 수사는 크게 두 단계로 진행됐다. 첫 번째는 2003~2004년 진행된 수사다. 안대희 전 대법관(당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 담당했었다. 이른바 '차떼기' 수사다. 2005년 들어 새로운 수사가 진행됐다. 그게 두 번째다. 그때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담당했었다.
2005년 당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 박 특별검사였다. 주임검사는 최재경 현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다. 삼성이 불법 정치 자금을 뿌린, 이 사건. 어떻게 됐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박영수 특검이 이끈 대검 중수부, 이상한 수사
한나라당에선 이회창 당시 후보의 측근이었던 서정우 변호사가 삼성 돈을 접수했었다. 서 변호사의 공소 시효는 2005년 11월 29일 만료됐는데, 이런 사실을 입증할 증언은 2005년 12월 초에 나왔다. 하필 공소 시효 만료 직후에 증언이 나온 것이다. 결국 당시 대검 중수부는 서 변호사를 기소하지 못했다.
노무현 캠프에서 일하면서 당시 삼성 돈을 받았던 이광재 전 의원은 공소 시효가 2005년 5월 30일에 공소 시효가 만료됐다. 대검 중수부가 이 전 의원의 측근 사업가 최모 씨를 조사하기 시작한 건 한 해 전인 2004년 9월께였다. 기묘하게도, 최 씨가 결정적인 증언을 한 시점은 이 전 의원의 공소 시효가 만료된 뒤였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돈을 건넨 삼성 수뇌부는 어땠나.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 김인주 전 삼성 구조본 사장(현 삼성경제연구소 사장) 등 역시 공소 시효가 2005년 11월 29일 만료됐다. 수사가 급류를 탄 건 그 직후였다.
경제 고려해서 삼성 비리 덮자?
돈을 받은 정치인, 돈을 준 재벌 모두 면죄부를 받은 사건이다. 노골적인 봐주기 수사였다. 대체 왜 그랬나. 2005년 12월 16일자 <한겨레> 온라인 판에 실린 "삼성 대선 채권 수사, 아무도 처벌 못하고 '끝'"이라는 기사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검찰은 그러나 '삼성에 공이 많고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도 기여한 사람들에게 준 격려금이니 그냥 넘어가자'고 말했다."
같은 날, <한국일보> 온라인판 기사엔 이런 문장이 있다.
"채권 확보를 위한 삼성 구조조정본부 압수 수색 필요성도 제기됐으나 (검찰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다음 날, <국민일보> 사설 제목은 이렇다.
"권력과 금력에 고개 숙인 검찰"
최재경 수석도 삼성과 유착 의혹
거듭 확인한다. 당시 수사를 지휘한 대검 중수부장이 박영수 특별검사였다. 당시 주임검사가 최재경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다. 박 특별검사는 이후 대전고등검찰청 검사장,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등을 지낸 뒤 변호사가 됐다.
박 특별검사와 함께 호흡을 맞췄던 최재경 청와대 민정수석에겐 진작부터 삼성과의 유착 의혹이 있었다.
대검 중수부에서 삼성 비리 수사를 담당하기 전인 지난 2002년, 최 수석은 법무부 검찰국에서 근무했다. 최 수석의 부인 황모 씨는 약사인데, 2002년 삼성엔지니어링 사옥 준공 때부터 점포를 임대해서 약국을 운영했다. 사옥 맞은편에 타워팰리스가 있고, 당시는 입주가 시작될 때였다.
최 수석이 대검 중수부장이던 2012년, 이런 사실이 국회에서 논란이 됐다. 서기호 당시 정의당 의원 등이 이 문제를 거론했었다. 고위 검사 가족에게 삼성이 베푼 특혜라는 것이다. 당시 최 수석은 공직자 재산 신고 내역에는 없었던 타워팰리스에 주소지를 뒀던 사실도 드러났다. 타워팰리스 역시 삼성이 시공 및 분양을 했다. 고위층에 대한 특혜 분양 의혹이 불거졌었다.
윤석열 파견 요청에 반가워하기엔…
박 특별검사와 최 수석 그리고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등을 둘러싼 관계에 대해 말이 많다. 박 특별검사가 이런 인맥의 영향에서 벗어나 박근혜 대통령의 비리를 제대로 수사하길 기대한다.
박 특별검사가 윤석열 검사를 수사팀장으로 파견하도록 요청한 건 그래서 눈길을 끈다. 윤 검사는 2012년 대선 당시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 수사를 담당하다 상부와 갈등한 끝에 교체된 이력이 있다. 윤 검사 파견 요청 소식에 대한 시민의 뜨거운 반응은 확실히 이유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이 든다. 한 검사 출신 로펌 변호사는 박 특별검사에 대해 "(행보가) 예상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일반적인 예상 범위를 뛰어넘는 수사를 하지는 않으리라는 전망이다.
조준웅 전 특검, '삼성 특별 변호사' 성공 보수로 아들 특혜 취업
역시 지나온 흔적을 돌아보게 된다. 1999년, 이른바 '옷 로비 사건'을 계기로 특별검사 제도가 도입됐다. 권력기관을 상대로 하는 수사는 행정부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하므로, 특별검사가 필요하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성과를 거둔 사례는 거의 없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BBK 비리 의혹 특검이 대표적인 예다. 살아있는 권력, 떠오르는 권력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역할에 그쳤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을 계기로 출범한 삼성 특검은 더 처참했다. 특검 출범 전에 검찰이 진행했던 수사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삼성 총수 일가에게 혜택을 줬다는 평가도 있다. 삼성 총수 일가가 차명으로 관리하던 자산을 실명화해서 돌려 줬다는 게다.
당시 수사를 지휘했던 조준웅 전 특별검사의 아들이 삼성 계열사에 특혜 입사한 사실이 지난 2012년 드러났다. 조 전 특별검사의 아들은 대학을 마친 뒤 고시 공부만 했을 뿐, 아무런 사회 경력이 없었다. 전문적인 기술을 보유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삼성은 그를 과장으로 채용했다. 사원, 대리 직급을 건너 뛰었다.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이에 대해 "삼성 특별 변호사로서의 성공 보수의 일부"라고 말했었다. 조 전 특별검사가 실제로는 삼성의 변호사 노릇을 했던 데 대한 답례라는 게다.
"역시 대통령보다 삼성"
요컨대 특별검사가 '살아있는 권력'을 제대로 파헤친 사례는 아직 없다. 재벌은 '살아있는 권력'이다. "예상되는 사람" 박영수 특별검사는 '삼성 게이트'를 제대로 수사할 수 있을까. 그는 대검 중수부장이던 2005년 12월, 삼성과 정치권에 면죄부를 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거의 모든 언론이 비판 사설을 실었다.
당시 검찰의 해명은 경제 상황을 고려했다는 거였다. 경제는, 지금이 더 어렵다. 박 특별검사는 어떤 수사를 할 건가. 그가 삼성의 불법 정치 자금 수사 결과를 발표한 다음 날, 한 일간지는 이런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역시 대통령보다 삼성"
'삼성 게이트' 수사가 끝난 뒤엔, 이런 글을 보지 않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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