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노동자, '박근혜 퇴진'에 소극적인 이유는…

[광장편지] 청와대 청소, '하야하롹'...신명나는 광장

지난 11월 4일부터 문화·예술·노동 인사들이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며 광화문 광장에서 텐트를 치고 노숙 농성을 벌이고 있다. 21일부터 이러한 텐트는 60여 개로 늘어나면서 광장은 텐트촌을 방불케 하고 있다. 이곳 텐트촌에는 <프레시안> 필자인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 텐트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그가 이곳에 있으면서 느낀 점을 '광장 편지'라는 연재로 풀어보고자 한다.

광화문 150만 촛불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월요일(28일)입니다. '박근혜 퇴진 광화문 캠핑촌' 촌민들이 용광로처럼 타올랐던 항쟁의 흔적과 잔해들을 청소합니다. 진눈깨비에 습기 먹은 침낭을 말리고, 이순신 장군 앞 무대를 꾸미고, 라디오방송을 준비합니다. 아침부터 모두 분주합니다.

항쟁이 휩쓸고 지나간 일요일 아침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침이슬' 합창이 잠을 깨웠습니다. 눈을 떠보니 6시. 광장의 흥과 술에 취한 취객의 목청이 청와대에 들릴 듯 우렁찹니다. 광화문역에는 밤새 오들오들 떨다 첫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피곤하지만 해맑은 표정의 젊은이들이 담소를 나눕니다.

캠핑촌 주민들이 수다를 떱니다. 며칠 전 광화문 광장 입구에 들어선 연말연시 이웃돕기 '사랑의 온도탑'을 보며 '하야의 온도탑'을 만들자고 제안합니다. 지금 '하야의 온도탑'은 몇 도일까요?

11월 5일 전국 30만에서 시작한 항쟁이 지난 주말 190만 촛불로 타올랐으니 90도쯤 되지 않았을까요? 조금만 더 끓어오르면 11월 시민 항쟁이 불의한 권력을 끌어내리는 혁명의 마루에 다다르지 않을까요?

ⓒ박점규

'하야의 온도탑'은 몇 도일까요?

마을을 둘러봅니다. 광화문 인근 아파트는 평당 3500만 원. 청와대가 마주 보이는 광화문 광장 금싸라기 땅에 해방 이래 처음으로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화가, 사진가, 판화가의 천막입니다. 동화작가, 연극인, 가수, 소설가, 시인도 두 평짜리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기륭전자 해고 노동자들은 가장 먼저 캠핑촌에 입주했습니다. '내가 이러려고 자동차 만들었나? 128억 뇌물 정몽구 구속'이라고 쓴 현수막 아래에는 현대,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텐트가 있습니다. 현대차 부품회사 유성기업 노동자들도 최근 집을 지었습니다.

마을회관으로 불리는 대형 천막에서는 매일 아침 '촌민 회의'가 열립니다. 일주일에 한 번 마을 총회도 열립니다. 맞은편 큰 천막은 마을 창고입니다. 전국 한의원에서 보내준 한약, 시민들이 갖다 준 핫팩과 컵라면 등 전국에서 답지한 물품들이 가득합니다.

예술가와 비정규 노동자들이 시작한 광화문 캠핑촌이 4주째입니다. 11월 4일 캠핑 첫날에는 천막 10여동을 경찰에게 빼앗겨 침낭 하나로 초겨울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다음날 광화문으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힘으로 무사히 작은 천막을 치기 시작해 이제 70여 동으로 늘었습니다.

천막 70동으로 늘어난 캠핑촌

광화문 캠핑 생활은 고단합니다. 5호선 지하철이 지나가면 광장 바닥이 지진이 난 듯 흔들리고, 큰 트럭이 광화문 큰길을 달리면 천막이 뒤집어질 듯 요동칩니다. 전기를 쓸 수 없어 침낭 속에 핫팩을 넣고 잠을 청하지만, 영하의 날씨를 견디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캠핑장의 하루는 유쾌하고 발랄합니다.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화백, 신영복 선생 제자들이 써주는 가훈, 가수들과 춤꾼들의 공연, 마임과 마술, 풍물한마당, 홍대 인디밴드들이 총출동한 '하야하롹' 공연이 쉴 새 없이 이어집니다. 광화문 캠핑촌은 예술의 전당, 홍대 클럽, 대학로 극장으로 쉴 새 없이 바뀝니다.

11월 15일에는 청소 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름은 '새마음애국퉤근혜자율청소봉사단'. 박근혜가 총재였던 '새마음봉사단'을 패러디했죠. 점심시간에 새마을 모자를 쓰고 빗자루와 쓰레받기, 쓰레기봉투를 들고 악취가 진동하는 청와대로 청소를 하러 갑니다. 청소 도구에는 '비정상혼 전문 청소업체', '프로포폴 청소 전문', '청와대 쓰레기통'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마을 버스를 타고 청와대 가는 길 입구까지 갔습니다. 경찰들이 놀라 뒤늦게 허둥지둥 달려왔습니다. 청소봉사단은 '18세 순이'를 개사한 '하야해'를 합창하며 뮤직 비디오를 찍었습니다.

현대차 아산공장 비정규직 해고자 양회삼 씨는 "청와대 코앞까지 가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즐겁게 놀아본 건 처음"이라며 신나게 춤을 춥니다. 문화예술인과 노동자들이 함께 새로운 시위를 개척합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더 즐거운 새마음봉사단입니다.

ⓒ박점규

악취 나는 청와대 청소 시위

11월 30일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하고 광화문 광장에 모입니다. 등교 거부, 동맹 휴학 등 '시민 불복종 운동'의 서문을 노동자들이 열었습니다.

며칠 전 현대자동차 한 노동자를 만났습니다. 그의 표정이 어두웠습니다. 민주노총 산하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에서 박근혜 퇴진 조합원 총파업 찬반 투표를 벌여 70.26%로 가결됐는데, 현대자동차는 47.59%로 반대가 더 많았다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조합원 5만 명 가운데 반대가 2만 명 넘게 나왔고, 투표를 하지 않은 조합원도 1만 명이 넘었습니다. 오랫동안 정권과 보수 언론의 표적이 되어 힘겹게 싸워왔고, 올해에도 '박근혜 노동 개악'에 맞서 투쟁한 현대차 노동자들이 박근혜를 지지하는 4%에 속해 총파업에 반대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현장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지난 임금과 단체 협상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해 노조 지도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태였는데, 이번 '박근혜 퇴진 총파업 투표'에서도 노조 간부들이 적극적으로 조합원들을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회사가 반대 운동을 벌인 탓도 있지만, 지도부가 정말 파업할 의지가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현대차지부는 산업별노조인 금속노조 차원의 투표이기 때문에 30일 파업을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우리 조합원들 맛탱이가 갔다고 하더라도, 현대차노조가 해야 할 일이라면 간부들을 믿고 따라와 줬는데, 간부들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컸으면 이런 결과가 나왔겠어요? 새누리당 당원들 투표를 해도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겠죠." (현대차 조합원)

190만 명 촛불 드는데 현대차노조 파업 부결

20년 전인 1996년 12월 26일, 현대자동차노조는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에 맞서 기아차노조와 함께 가장 먼저 총파업을 벌이고, 3개월 넘게 파업을 이어갔습니다. 울산에서만 연일 1만 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항쟁을 이끌었습니다.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정권을 퇴진 직전까지 몰고 갔습니다.

20년 세월. 노조 지도부는 조합원 월급 올려주고, 더 많은 성과급과 주식을 따주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비정규직이나 부품사 노동자와의 진정한 연대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임금인상 파업을 하면 공장 안에서 집회를 하거나 그냥 퇴근시켜 버렸습니다. 울산 시내에서 하는 집회에 참여하는 현대차 조합원이 2000명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거리에서 시민들과 함께 싸워본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저는 속상해하는 현대차 노동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지금 광화문에만 100만 명이 쏟아져 나와 사실상 정권을 끌어내리고 있는 혁명 정국인데, 이에 발맞춰 현대차노조가 수출을 완전히 멈출 정도로 파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기껏해야 몇 번 파업하는 정도 아닌가요?"

"현대차가 예전처럼 1만 명 넘게 거리로 나와 울산 시내를 마비시킬 수 있을까요? 현대, 기아차 노동자들이 대거 서울로 올라와 청와대로 행진하며, 128억 뇌물 준 정몽구를 구속하라고 싸울 수 있어요?"

"시민들은 공범인 정몽구 정의선을 구속하라고 하는데, 현대차 조합원들도 시민들과 같은 생각일까요? 재벌해체에는 동의하나요? 정몽구 구속이나 재벌 해체에 대해 찬반 투표 하면 반대가 더 많지 않을까요?"

지난 20년간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격차를 줄이고 동일임금 동일노동을 만들겠다는 산업별노조 운동이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기업 노조 간부들은 월급 올리기에 '올인'했고, 조합원들은 높디높은 대기업 담벼락 안에 갇혔습니다.

지금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썩은 사회가 확 뒤집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공정하지 않은 사회를 확 뜯어고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20년 전 서민들과 대기업 노동자의 거리가 가까웠다면 지금은 상당히 멀어진 게 아닐까요? 세상이 엎어지면 잃을 게 많아지게 된 건 아닐까요?

20년 전 겨울 국민들의 맨 앞에 현대차 노동자들이 서 있었다면, 2016년 겨울 현대차 노동자들은 국민들 맨 뒤에도 서 있지 못합니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요?

ⓒ프레시안(최형락)

캠핑촌에 들려온 권력 이양 소식

헐, 광화문 광장에서 '박근혜 퇴진, 그 이후 한국 사회' 토론회를 하는데 박근혜 하야 발표 속보가 뜹니다.

박근혜는 "지금 벌어진 여러 문제들 역시 저로서는 국가를 위한 공적인 사업이라고 믿고 추진했던 일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개인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월호 참사, 국정교과서, 위안부합의, 한일군사정보협정, 노동개악... 자신이 한 일이 모두 정당하다네요.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 결정에 맡기겠답니다. 권력이양 과정까지 대통령직 누리며 증거인멸하겠다는 뜻이겠죠. 새누리당 해체 분열을 막고, 조기 대선에서 새 보수정당 후보를 당선시켜 면죄부를 받겠다는 의도가 아닐까요?

참나. 11월12일 100만 촛불이 열리기 전에 이런 발표가 나왔으면 국민들이 흔들렸을지 모르지만 혁명 목전까지 간 지금은 웃기는 소리입니다. 광화문 캠핑촌을 접고 집에 가기는 글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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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점규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은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에서 선전홍보, 단체교섭, 비정규직 사업을 담당했습니다. 2008년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하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사회적 기구인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를 함께 만들었습니다. 2010년 11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25일 점거파업에 함께 했고, 이후 한진중공업, 현대차 비정규직, 밀양 희망버스에 함께했습니다. 저서로는 <25일>, <노동여지도> 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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