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색 드러낸 국정교과서, 친일 미화·박정희 찬양"

"위안부, 병으로 죽어가" 피해 축소…5.16 '혁명 공약' 소개도

교육부가 28일 공개한 '국정 역사 교과서'는 '위안부 학살' 피해를 축소하고,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수립일'로 서술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 회담'을 '경제 개발'의 토대가 된 것처럼 긍정 평가했을 뿐 아니라, 5.16 군사 정변 세력의 공약을 '혁명 공약'이라고 미화하고 있다.

야당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 14명은 28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국정 교과서 내용을 조목조목 분석한 뒤, "오늘 공개된 국정 역사 교과서는 박정희 치적을 강조하는 '박근혜 교과서'이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역사와 항일 독립 운동사를 축소시킨 '친일 독재 미화 교과서'"라고 비판했다. (☞ 관련 기사 : 국정교과서 집필진, 짙은 '뉴라이트' 그림자)

국정 교과서를 보면,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군의 학살을 숨기고 "이들 중에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질병, 폭행, 자살로 죽어간 사람도 많았다"고 표현해 위안부 피해를 축소했다. 또 임시 정부에서 외교 활동은 9줄에 걸쳐 서술했지만, 항일 무장 독립 운동은 그 절반도 안 되는 4줄만 쓰는 데 그쳤다.

친일 경찰들이 미 군정에서 부정부패를 일삼는 데 반발해 비롯된 제주 4.3 항쟁에 대해서도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 봉기가 사건의 주요 원인인 것처럼 기술했으며, 민간인 희생자의 규모나 역사적 의미,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 등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소제목 아래는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 수립됐다"고 적어 사실상 뉴라이트의 '건국절' 역사관을 반영했다. 야당 교문위원들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을 위반하고, 독립 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축소하고 친일파를 건국 공로자로 둔갑시키는 심각한 역사 왜곡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정희 경제 정책 8쪽 걸쳐 상세 서술…박정희 전 대통령 군복 사진 삭제

국정 교과서에는 박정희 정권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박정희 정부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법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964년 맺은 '한일 협정'에 대해서는 "경제 개발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고,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자금이 농림수산업 개발과 포항 제철 건설 등에 투입"됐다고 기술했다. 마치 한일 협정이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됐다고 강조하는 모양새다.

특히 국정 교과서는 이전 검인정 교과서가 다루지 않은 5.16 군사 정변 주도 세력이 내세운 '혁명 공약'의 자세한 내용을 수록하기도 했다. 5.16 군사 정변 세력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매우 의욕적인 계획"이라고 미화하기도 했다. 반면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군복을 입고 있는 5.16 군사 정변 가담자에 대한 사진은 삭제했다. 또 '간첩 조작 사건'으로 밝혀진 '동백림 사건'을 예로 들어 들어 박정희 정권 들어 안보 위기가 커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안보 위기가 커졌으므로 독재를 정당화하는 듯한 인상을 주며, 이 역시 기존 교과서에서는 수록되지 않았던 내용이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는 무려 8쪽에 걸쳐 상세하게 기술했다. "(박정희 정부가)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으로 과학 기술 진흥의 기초를 놓았다", "중화학 공업의 육성으로 우리 기업이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새마을 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물" 등등의 표현이 있었다. 역대 정권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는 '금리 자유화를 단계적으로 실시'했다는 등 일반적으로 설명했으나, 유독 박정희 정권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만 '1973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 공업화 추진을 선언하였다',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통일 외교 정책에 관한 특별 서언을 발표했다'고 적는 등 상세하게 설명했다.

▲ 28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국정 교과서 현장 검토본이 교육부 출입 기자들에게 배포되고 있다. ⓒ연합뉴스

'재벌 미화' 표현도 있었다. 이병철은 "삼성물산, 제일모직, 삼성전자를 설립하고 반도체 산업에 투자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 기여"한 인물로, 정주영은 "현대건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 수출 산업을 이끈" 인물로 그리는 등 재벌 대기업 총수들을 미화하기도 했다. 반면에 1987년 노동 운동의 가치는 폄훼했다. 1980년대 임금 인상은 '노동자 투쟁'의 결과물이 아니라, 정권의 중화학 공업 정책의 결과인 것처럼 기술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산업별 노조가 결성됐다거나, 정부가 노사 관계 개입을 자제했다는 등 사실 관계가 틀린 서술도 있었다.

노태우 정부를 김영삼 정부와 같은 선상에서 '민주 정부'로 규정한 대목도 있었다. "6월 민주 항쟁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게 되었고"라고 적어 노태우 정권의 출범을 '평화적 정권 교체'로 기술했고, '냉전의 종식과 민주 정부의 출범'이라는 소제목에는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를 같은 '민주 정부' 반열에 올려놓았다.

정부는 국정 교과서를 "사실에 입각한 균형 잡힌 대한민국 교과서", "올바른 역사 교과서"라고 칭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야당 교문위원들은 "밀실에서 음습하게 추진해온 친일 독재 미화, 박정희 기념 국정 역사 교과서를 당장 폐기하라는 것이 200만 명이 모인 촛불의 목소리"라고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김민기, 김병욱, 노웅래, 박경미, 손혜원, 신동근, 안민석, 오영훈, 유은혜, 전재수, 조승래 의원, 국민의당 송기석, 이동섭 의원 등 14명이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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