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위해서는 전황을 점검해가며 싸우는 일도 필요하다. 전체 상황을 어느 개인이 속속들이 알기는 어차피 힘든 만큼 나는 지난주(11월 16일) 페이스북 발언('담대하고 슬기롭게 새 시대를 열어갑시다')을 잇는 후속 논의를 통해 시국이 요구하는 '집단 지성'의 작업에 일조할까 한다.
그 발언 당시에도 박근혜 씨는 100만 촛불 민심에 불복할 기색을 보였지만 곧바로 검찰 조사에 불응하고 고위직 인사를 단행하는 등 더욱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지지층 재집결'을 노렸다고도 하는데 결과는 여론 조사 지지율 5%에 계속 머물렀을 뿐 아니라 19일의 4차 촛불 집회에 다시 100만 가까운 인파가 전국적으로 모여 단호한 퇴진 명령을 재확인했다. 이 집회는 내용의 풍부함과 창의성에서도 또 한 번의 진화를 보여줌과 동시에, 전국 도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림으로써 굳이 서울에 안 가고도 촛불 시위의 감동을 맛볼 기회를 골고루 선사했다.
대통령 퇴진 운동에서 '내란 진압' 촛불로
네 차례의 촛불이 모두 대통령의 퇴진을 명한 것이지만 3차와 4차 명령 사이에는 차이도 있는 것 같다. 처음 두 번은 시위에 놀란 박근혜 씨가 진정성이 결여된 사과나마 연거푸 했다. 하지만 국민들이 전혀 넘어가지 않고 11월 12일의 3차 촛불 대행진을 통해 퇴진 판결을 (말하자면 3심에서) 확정하자, 도리어 정면 불복의 길을 택했다. 주권자에 맞선 '내란' 수준의 저항으로 가기 시작한 것이다.
19일의 4차 집회는 따라서 종전의 국정 농단, 부정 비리에 대한 단죄에서 '내란 진압' 작업으로 옮겨갔다고 말할 수 있다. 26일의 집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띠건 간에 실질적 '내란죄'에 대한 국민적 소추(訴追)를 확인할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후의 응징 작업은 집회 인원이 불고 줄고를 떠나 더욱 다양하고 창의적으로, 즐겁고 질기게 진행될 것이다.
촛불 민심의 위력은 20일의 검찰 발표에서도 드러났다. 최순실, 안종범, 정호성 씨들의 공소장에 대통령이 피의자로 적시됨으로써 박근혜 씨는 예의 '배신의 정치'와 '하극상'을 겪어야 했고 그동안 야당들이 머뭇거리던 탄핵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그렇다고 '탄핵 정국'이 시작되면서 국민적 퇴진 운동이 사그라지는 '국면 전환'이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탄핵하려면 해보라'는 협박은 일부 야당 인사들에게 먹힐지언정 국민들에게는 허장성세 아니면 이성을 잃은 마지막 몸부림으로 다가올 뿐이다. 현명한 정치인이라면 자기중심적인 계산으로 이 사태를 '수습'하려 들지 말고, 국민의 지상 명령을 받드는 일을 최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때다.
총리 문제를 대하는 야권의 태도
지난번 글에서 급선무로 제시한 총리 교체 문제만 해도, 그 지상 명령을 이행하는 데 몰두하면 부질없는 고민을 크게 덜 수 있다. 대통령의 궐위 또는 직무 정지 상태에서 현재의 총리가 권한대행이 되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정치권의 책임이며, 최악의 경우로 황교안 대행 체제를 맞아야 한다면 어떻게 감당할까 하는 대책(이른바 '플랜 B')도 마련할 의무가 있다.
실제로 탄핵 준비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새 총리를 선임할 시간적 여유가 없게 될 가능성도 커진 것이 최근의 형국이지만, 요는 야당들의 태도가 달라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황교안 대행이 불가피해지더라도 아무 생각도 없이 목청만 높이다가 당하는 식으로는 국민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예컨대 박근혜 씨가 퇴진 선언을 하기 전에는 총리 인선도 안 하겠다는 민주당 지도부의 '초강경' 태세가 결과적으로 황 대행 옹립을 위한 운동이 돼도 상관없다는 취지였는지 스스로 정직하게 되물을 일이다. 반면에 총리 교체가 급하니 '영수 회담'을 열어서 합의하자는 주장도 국민의 뜻에 어긋나기는 마찬가지다. 추미애-박근혜 2인 회담은 안 되고 3인 또는 4인의 회담이라면 괜찮다는 말인가.
퇴진 운동은 운동대로 하면서 지금이라도 대통령이 국회의장에게 요청한 대로 국회가 총리를 추천해서 들이밀면 그만이다. 박근혜 씨가 안 받겠다고 하면―이제는 그 약속마저 뒤집을 속셈을 내비치고 있지만―안 받는다는 사실이라도 빨리 확인하고 그걸 전제로 싸우면 된다. 후보를 합의하는 문제도 국민의 지상 명령을 우선시하고 '퇴진 이후'의 이해득실을 일단 접어두기로 하면 너무 걱정할 게 없다.
어차피 국민의 명령은 '퇴진에 따른 과도 내각'이지 '실질적인 권한을 이양받은 거국 내각'이 아니다. '최악'보다 나은 인물이면 된다. 야3당뿐 아니라 새누리당 비박계의 추천 인사도 포함해서 논의하다가 합의가 안 되면 의원들의 투표로 정하는 방법도 있다. 요컨대 대통령을 그 자리에 둔 채로 권력을 누려보자는 미련이나 특정인의 대선가도에 유리한 권한대행을 고르겠다는 집착을 버리고 최대한 신속 간명하게 처리할 일인 것이다.
정치인도 국민처럼 담대하고 슬기롭기를
그 점에서 지난 20일에 야권의 대선 주자 8인이 '정치 회의'를 열고, "촛불 민심과 국민의 의사를 폭넓게 수렴하여 대통령의 퇴진과 탄핵에 따른 국정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국회 주도의 총리 선출 및 과도 내각 구성 등 세부 수습 방안을 조속히 마련할 것을 야3당에 요청한다"고 합의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모였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데 합의 내용도 대체로 훌륭하다. 야3당과 국회에 "국민적 퇴진 운동과 병행해" 탄핵 추진을 논의해줄 것을 요청한 것도 좋았고, "야3당의 강력한 공조가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시민 사회와 적극적으로 연대하기로 하고,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단합하고 단결하여 헌정 질서 회복과 국민 주권 확립, 정의로운 국가 건설에 헌신하기로 했다"는 마지막 항목도 현 시국에서 꼭 유념할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이렇게 합의했다고 해서 여덟 사람이 내내 똑같은 목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 국민 명령의 구체적 이행 방안에 대해서는 각자 앞 다투어 최선의 지혜를 발표하는 게 오히려 바람직하며, 합의 정신에 어긋나는 언행이 나올 때는 기탄없는 상호 비판이 가해져야 옳다. 대선 경쟁은 그런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하며 당과 당 사이의 경쟁도 마찬가지다.
촛불이 지속되고 진화하면서 '내란' 세력을 와해시킬 구체적인 방안과 더불어, 국민의 지상 명령을 왜곡하거나 둔화시키려는 정치권 일각의 행태에 대해서도 한층 세심한 조명이 이루어지리라 예상된다. 국민의 담대함과 슬기로움은 5차 집회에서도 돋보일 것을 믿는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시민 혁명의 전략으로서만이 아니라 부모의 손을 잡거나 부모 품에 안겨 나오는 어린이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평화의 원칙이 존중될 것이 분명하며, 수많은 새로운 논객과 웅변가, 예술가와 코미디언의 등장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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