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유럽의 병자'가 독일보다 큰 나라가 된다

[유라시아 견문] 신오스만주의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신오스만주의 (1) : 자주 외교

공정발전당 집권 이래 터키의 국내 총생산(GDP)은 3배로 성장했다. 세계 15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집권 초기만 해도 유럽연합(EU) 평균 수입의 20%에도 달하지 못했다. 15년 만에 70% 수준까지 육박했다. 2030년이면 유럽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현재 인구 8000만, 2040년이면 1억에 근접한다. 영국, 프랑스는 물론 독일보다도 큰 나라가 된다. 더 이상 EU 가입에 안달하지 않게 되었다. '유럽의 병자' 취급을 받았던 20세기가 아니다. 항산은 항심을 낳는다. '신오스만주의'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터키는 미국의 동맹국이자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가맹국임에도 독자적인 이슬람권 외교를 펼치고 있다. 미국이 선도하고 유럽이 따르는 불의한 전쟁에 가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슬람주의 세력을 지원했다.

2006년 팔레스타인에서 하마스 정권이 탄생했다.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토착 민주화 세력이었다. 미국과 유럽은 즉각 '테러 조직'으로 낙인찍었다. 서방의 눈치 보기에 급급한 아랍 국가들도 외면했다. '국제 사회'의 원조가 끊기면서 신생 하마스 정권은 곤경에 빠졌다. 그때 구원투수로 나선 나라가 터키였다.

에르도안은 약자를 돕고 약소국을 지원하는 것이 무슬림의 의무라는 대의명분을 쥐었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에도 마찬가지 행동을 취했다. 아프리카 소말리아에도 수차례 방문하여 병원과 학교 건설을 지원한 인물이 에르도안이다. 부국강병의 일국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이슬람적 공정을 실천하는 국가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무슬림 세계에 선보인 것이다.

그래서 '아랍의 봄' 당시 튀니지, 이집트, 시리아 청년들이 에르도안의 어록을 플래카드로 만들어 자국의 독재 정권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군부가 물러나고 실시된 선거에서도 무슬림형제단에 기반을 둔 이슬람 정당들이 약진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터키식 민주화가 역할 모델이 된 것이다. 풀뿌리 이슬람으로 민주화를 달성한 유일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바짝 긴장한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등 왕정 국가들이다. 지난 100년, 이슬람을 일국의 체제 이데올로기로 강등시킴으로써 혹세무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터키라는 '이슬람 민주주의 국가'가 등장함으로써 무슬림들에게 '다른 백년'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왕정 국가들은 패권주의 운운하며 '신오스만주의'를 일러바치고 있다. 터키공화국이 오스만제국처럼 재차 아랍 세계의 지배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구미의 '자유주의 근본주의' 세력은 얼씨구나 에르도안을 술탄에 빗대는 프로파간다를 발설한다.

구미와 불편해지고, 중동의 독재 국가들과 척을 졌다고 하여 터키가 고립된 것도 아니다. 확연하게 동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Look East). 동시에 과거를 재인식하고 있다(Look Back).

앙카라와 이스탄불에 집약되었던 구미 지향의 대자본이 아니라, 아나톨리아의 중소 자본 위주로 물류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 소련 해체 이후 열린 남유럽과 중앙유라시아 지역이 왕년의 오스만제국이 구축했던 '이슬람의 집'과 얼추 겹친다. 그곳에 살아가는 주민들의 대다수가 무슬림이다. 이슬람적 가치를 중시하는 신흥 사업가들에게 기회의 창이 열린 것이다.

이슬람 경제의 바람이 유라시아의 한복판에서도 불고 있다. 고로 터키의 세계화 또한 미국화도 서구화도 아니다. 세계화가 되면 될수록 더더욱 이슬람화가 심화된다. 재차 국가는 풀뿌리의 흐름을 받아 안아 'TAKM'를 조직했다. 터키,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몽골의 머리글자를 땄다. 이 터키 발 독자적인 지역구상에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조지아(그루지야)도 참여를 타진하고 있다. NATO의 졸이었던 20세기와 결별하고, 오스만의 후예다운 기상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오스만제국의 동편에는 페르시아제국이 있었다. 수니파의 종가가 오스만이고, 시아파의 수장이 이란이었다. 지금도 지정학적 라이벌이다. 그러나 경쟁국이라 해서 곧 적대국이라는 법은 없다. 터키의 자주 외교 노선이 확고해지면서 이란과 갈수록 죽이 맞고 있다. 이슬람 세계에서 서방의 대리인 역할을 했던 터키의 회심에 이란 또한 반겨해 마지않는 것이다.

1979년 호메이니 혁명으로 재이슬람화의 선봉에 섰던 나라가 이란이다. 세계사의 대반전과 '이슬람의 집'의 귀환에 터키와 의기투합할 수 있다. 올 여름 쿠데타 국면에서 에르도안 정권을 가장 열성적으로 옹호했던 나라가 이란(과 러시아)이었음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란의 동쪽이 곧 중국의 서편이다. 위구르가 동유라시아에 사는 투르크족이다. 2015년 말, 에르도안이 대통령으로서 처음 아시아 투어를 나서면서 선택한 나라가 셋이었다. 세계 최대의 국가 중국과 세계 1, 2위의 이슬람 국가 인도네시아와 파키스탄이다.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를 주유하며 서아시아와의 연결망을 구축한 것이다.

중국과는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SCO(상하이협력기구) 가입을 논의했으며, 인도네시아와 파키스탄과는 이슬람 세계의 부흥을 다짐했다. 중화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공진화이다. 서유라시아의 '이슬람의 집'과 동유라시아의 '천하'가 합류하고 있는 것이다. 최신판 일대일로와도 오롯하게 포개진다. 터키 또한 그 축이 완연하게 아시아로 이동하고(Pivot to Asia) 있다.

▲ 탁심 광장의 에르도안 지지자. ⓒ이병한

신오스만주의 (2) : 이슬람학의 중흥

일주일에 3일을 이스탄불 대학 도서관에서 보냈다. 그 중에서도 오스만제국 문헌들이 빼곡한 열람실에 자리를 잡았다. 다종 다기한 언어들로 어마어마한 서책들이 600년간 쓰였다. 아랍어로 페르시아어로 투르크어로 그리스어로 적혀 있는 고서의 제목을 일별해 가는 것만으로도 타임머신을 타고 '지고의 국가'를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그곳에 갈 때마다 눈이 마주치는 지긋한 노학자가 계셨다. 말문을 트기까지는 꼬박 한 달이 걸렸다. "Are you from China?" 달라진 세상, 열에 아홉은 중국인이냐고 먼저 묻는다. "No. I am a Korean." 그러면 다음 질문이 이어진다. "From North or South?". "I am from South Korea." 그렇게 연을 시작했다.

터키 사람이 아니었다. 시리아 난민이었다. 다마스쿠스 출신이었다. 대학에서 이슬람을 가르치는 법학자였단다. 5년째로 접어든 시리아 내전으로 대학이 제 기능을 못한 지 오래이다. 이웃나라 터키로 이주한 것이다. 살펴보니 시리아뿐만이 아니었다. 리비아에서도, 이집트에서도, 이라크에서도 유수한 이슬람 학자들이 이스탄불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분처럼 영어나 터키어가 가능한 이들은 대학의 교원으로도 채용되었다. 혹은 마드라사 네트워크를 통하여 자리를 잡는 사람들도 있었다. 에르도안은 정권 차원에서 이들을 수용하고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아랍의 봄' 이래 중동 혼란이 가중되면서 이스탄불이 이슬람학의 근거지로 재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1923년 건국 이래 터키의 이슬람 연구는 법학이든, 신학이든 별 볼 일이 없어졌다. 대학은 서구파들이 점령군처럼 장악했다. 아랍어와 아라비아 문자부터 배제시켰기 때문이다. 로마자 알파벳을 채용한 터키어를 국어로 삼으니, 이슬람 고전을 읽어낼 수 있는 인재들을 배양할 수 없었다. 아니 고전은커녕 100년 전 오스만 말기의 문헌도 제대로 해독하지 못했다. 투르크족이 축적한 1000년의 유산, 오스만제국이 쌓아온 600년의 유산, 그리고 오스만 말기 그 활달했던 동서고금의 사상 융합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던 것이 새천년 중동의 대혼란으로 터키에 천재일우의 기회를 열어준 것이다. 바그다드에서, 다마스쿠스에서, 카이로에서, 베이루트에서, 암만에서, 트리폴리에서 최고의 이슬람 학자들이 이스탄불로 이주하고 있다.

나도 2년째 이동 살림을 하다 보니 사정을 얼추 짐작해볼 수 있다. 책처럼 골칫거리가 없다. 많고, 크고, 무겁다. 읽는 족족 찢어버려서 최대한 무게를 줄이는 습벽마저 생겼다. 견문하는 나조차도 그러하니, 전시 난민이 된 그들은 어떻겠는가. 농축된 에센스만 가지고 터키로 왔을 것이다. 서구화 일백년, 커다란 공백이 생겼던 터키의 이슬람 사상계에 그 엑기스들이 주입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아랍어가 재차 학문 언어로 각광을 받고 있다. 19세기에 고안되었던 '오스만어'를 회복하자는 움직임마저 일어나고 있다.

그 난민 학자들이 담소하는 자리에 은근슬쩍 묻어간 적이 있다. 오가는 얘기들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표준 아랍어라고는 하지만 각국의 악센트가 들어가니 나로서는 오리무중이었다. 그럼에도 그 자리의 그 풍경, 그 범상치 않은 공기만은 한껏 들이킬 수 있었다. 마치 천 년 전 바그다드가 재림한 듯 했다.

9세기부터 10세기, 서아시아에서 이단으로 배제되었던 기독교도들이 바그다드로 대거 도피한 적이 있다. 당시 바그다드는 학문과 사상의 해방구였기 때문이다. 아바스 제국의 보호 아래 대번역 운동을 펼침으로써 고대 그리스 학문들이 이슬람 세계로 전수되었다. 특히 7대 칼리프 만수르가 유명하다.

'지혜의 집'이라 불리는 대규모 도서관과 대학을 만들어서 서유라시아 지의 집대성을 이루었다. 바로 그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도, 소크라테스도, 히포크라테스도, 유클리드도 되살아났던 것이다. 그리스어에서 아랍어로, 키릴 문자에서 아랍 문자로 고전들이 번역됨으로써 인류의 위대한 문명 유산이 지속될 수 있었다. '계몽 칼리프' 만수르가 아니었다면 르네상스는 도래하지 않았거나, 훨씬 늦게 개막되었을 것이다.

돌아보니 천시가 참으로 오묘하다.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으로 중동이 쑥대밭이 되기 시작한 바로 그 무렵에 터키에서 에르도안 정권이 출범했다. 재이슬람화가 시대정신이 되었기에 시리아부터 리비아까지 이슬람 학자들이 망명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인샬라! 알라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터키는 '난민 대국'이다. 지난 반세기 600만을 수용했다. 소련에서, 유고슬라비아에서, 아제르바이잔에서, 이란, 이라크에서 난민들이 속속 밀려왔다. 2011년 이래 끌어안은 시리아 난민은 170만에 이른다. 어느덧 내부 구성원의 면면에서도 '작은 오스만'이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슬라브인과 아랍인도 '터키의 집'에서 살고 있다. 자칭 칼리프를 선언한 IS의 바그다디보다도 '신오스만주의'를 표방하는 에르도안이 만수르에 더 흡사한 형국인 것이다. 아무래도 락까보다는 이스탄불이 이슬람의 중흥을 선도하는 21세기의 메카가 될 것 같다. (이란부터 이집트까지 곳곳에서 만난 울라마와의 대화는 인터뷰 형식으로 따로 다룰 것이다.)

2023 : 復國(복국)

2016년 세속주의자들에게는 시련의 시기이다. 자유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를 막론하고 곤경에 처했다. 그들의 회합에도 낀 적이 있다. 장소가 인상적이다. 술집이었다. 맥주를 마시고, 와인을 마신다. 음주를 하는 것이 그들만의 '구별 짓기'인 듯했다. 거개가 미국과 유럽의 유학파이니, 당시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하는 것도 같았다. 모처럼 알코올로 목을 축임에 감지덕지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 곳이 편하지 않았다. '경건한 시민'들을 조롱하고 야유하는 태도가 은근하게 묻어났기 때문이다. 말을 섞기에는 그들이 편했지만, 마음은 다른 쪽으로 기울었다.

21세기 터키를 추동해가는 주체들은 '경건한 시민'들이다. 1999년 배낭 여행으로 이스탄불을 방문한 적이 있다. 관광 명소 일대는 난장판에 아수라장이었다. 바가지와 날치기, 소매치기가 기승을 부렸다. 화폐 개혁도 제때 안 되어서 무수하게 많은 0이 새겨져 있는 돈을 세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전혀 딴판이다. 깨끗하고 산뜻하게 정돈되었다. 정권 교체 이후 국가의 정책 때문이 아니다. '경건한 무슬림'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각성된 시민들의 뜻이 발현된 결과였다. 장사를 해도 정직하게 이슬람적 공정에 부합하게 하자는 굴렌 운동의 소산이었다. 풀뿌리 이슬람 운동이 도시의 얼굴, 거리의 풍경마저 바꾼 것이다.

그 '개신(改新) 이슬람'의 바람은 터키를 넘어서까지 불고 있다. 종종 들리던 바자르의 헌책방 주인이 그러했다. 그 또한 굴렌 운동의 열성 참여자였다. 하루에 다섯 차례 꼬박 꼬박 기도하는 경건한 무슬림이다. 돈을 벌어서 집 평수를 넓히고, 새 차를 마련하고, 옷을 사는데 쓰지도 않는다. 소비 생활보다는 봉사 활동을 즐긴다. 작년(2015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도 다녀왔다고 했다. 탈레반 정부와 끈질긴 협상을 벌인 끝에 여학생들도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개설했다고 자랑한다. 내년에는 컴퓨터도 보급해 줄 것이라며 광대가 솟아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곤궁한 이부터 먼저 돕는다는 이슬람적 도덕의 근간을 NGO 활동을 통하여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욕심을 덜고 양심을 더하라는 무슬림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끝없는 욕심과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자유롭게' 채우는 세속화=근대화가 아니라, 속된 미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건한 삶을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헛 해방에서 진 해방으로- 해탈하고 있었다.

목하 터키를 휩쓸고 있는 반동파의 숙청에는 분명 아슬아슬한 지점이 없지 않다. 군부와 사법부는 말할 것도 없고, 학교와 언론까지 칼바람이 불고 있다. 부디 지난 100년의 반작용으로 이슬람 일방으로 기울지 않기를 바란다. 이슬람을 마녀 사냥했듯이, 세속파들을 탄압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거꾸로 기울이는 것이 해법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건대 사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를 합해도 전체 국민의 1할도 되어 보이지 않는다. 군부의 총과 사법부의 칼이 없는 한, 대안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 또한 거의 없다고 하겠다. '이교도'들에게도 숨 쉴 틈을 허락해주었던 '이슬람의 집'의 넉넉했던 품을 차근차근 회복해가기 바란다.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첩경일 것이다.

하기에 더 더욱 풀뿌리 이슬람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가 없다. 견제 받지 않은 권력은 부패하기 십상이다. 그 소금 같은 역할을 '경건한 무슬림'들이 수행해야 할 것이다. 성과 속의 분화가 아니라 '어떤 이슬람이냐'로 분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의와 도덕이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풀뿌리 무슬림은 더더욱 분발해야 할 것이다.

설혹 에르도안이, 공정발전당이 장기 집권에 취하여 이슬람의 천명을 방기한다면, 경건한 무슬림들부터 앞장서서 촛불을 들고 탄핵과 하야를 외쳐야 할 것이다. 쿠데타의 유탄을 맞고 터키 생활을 조기에 정리할 수밖에 없었던 내가 끝내 저버리지 않고 있는 연대 의식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리고, 잃어버린 고향을 되찾아가는, 그들의 復國(복국) 사업을 멀리서나마 응원한다.

모스크에서 울려 펴지는 잔잔한 아잔 소리로 세속의 소음을 지우고 있는 이스탄불을 떠났다. 2023년, 건국 100주년을 맞이하는 그 나라에 다시 가볼 것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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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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