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쿠데타의 진실…에르도안이 만든 '이슬람 기적'

[유라시아 견문] 신오스만주의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풀뿌리 이슬람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터키공화국의 세속화 바람에 이슬람은 바짝 엎드려야했다. 숨을 죽여야 했다. 바닥을 기어야 했다. 바닥을 다질 수 있었다.

기회가 왔다. 1960년대 후반이다. 68 혁명의 물결이 앙카라와 이스탄불에도 닿았다. 청년들은 너나없이 신좌파를 자랑했다. 파리와 베를린과 런던과 샌프란시스코를 동경하고 모방했다. 터키의 군사 정부를 세속주의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우익 독재라고 비판했다. 좌/우 구도였다.

군부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이슬람을 동원했다. 좌파를 억압하기 위해 이슬람 세력을 활용했다. 1970년 1월, 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이슬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창당한다. 공정과 도덕, 행복과 안녕 같은 이슬람 고유어를 정당 강령으로 삼았다. 아타튀르크가 극구 억압했던 아랍어 기원의 고어들이 복원된 것이다. 아랍어-터키어 혼용체(=오스만어)도 되살아났다. 그 고풍스러운 담론으로 신좌파의 새 언설을 눌러간 것이다. 빨갱이를 사냥하고 공산주의 침투를 막는 방파제로 이슬람을 요긴하게 써먹었다.

신좌파의 부상이 터키에 현실적인 위협이기는 했다. 구 오스만 영토들이 온통 적화되는 듯했다. 터키의 북쪽에는 동유럽 사회주의가 건재했다. 터키의 남쪽에서도 아랍 사회주의가 약진했다. 동쪽의 중앙 유라시아에는 -스탄, -스탄 하는 투르크계 국가들도 여럿이었다. 거개가 사회주의 모국 소련에 속해 있었다.

특히 투르크계 사회주의 국가의 존재는 신청년들에게 솔깃한 대안이었다. 가장 심한 탄압을 받았던 쿠르드인부터 쿠르드노동자당을 만들었다.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며 분리 독립 운동을 펼쳤다. 쿠르디스탄으로 독립하거나, 20세기형 유라시아제국을 구현했던 소비에트연방에 편입되는 방안을 강구했다. 이들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무신론의 과학적 공산주의 국가에 가장 적대적이었던 이슬람 세력을 키워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물꼬가 트이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들풀처럼 들불처럼 퍼져갔다. 터키행진곡을 무시하고 이슬람의 상징인 녹색 깃발을 흔들었다. 터번과 히잡을 두르고, 샤리아(이슬람법)의 부활을 요구했다. 이슬람을 통해 좌파를 견제한다는 以夷制夷(이이제이)가 부메랑이 되었다. 신좌파와는 별개의 독자적인 '민주화'를 요구한 것이다.

대도시 명문 대학에 거점을 둔 학생 시위와는 범위와 규모가 달랐다. 마을 구석구석까지, 10배, 20배가 넘는 군중 집회가 열렸다. 결국 1980년 9월 12일, 쿠데타가 발생한다. 치안 유지가 목표라고 했다. 한 달 간 1만5000명을 체포했다. 연말까지 3만 명을 구속했다. 1년간 12만 명을 구금했다. 모든 정당 활동이 중지되었고, 당수들 또한 체포되었다. '이스탄불의 붐'은 찰나였다. 군부 통치가 재개되었다.

1971년과 1980년 쿠데타마다 체포된 인물로 페툴라 굴렌이 있다. 군부와 사법부가 위험 인물로 찍었던 사람이다. 1941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울라마였고, 어머니는 마을 모스크에서 코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가학으로 이슬람을 전수받았다. 열 살 때 이미 코란을 암송했다.

10대 중반에 누르시의 <빛의 책>을 접한다. 개안했다. 각성했다. 누르시를 직접 뵙고 가르침을 얻고자 했다. 그럴 수 없었다. 선생은 1960년 숨을 거두셨다. 대신 그를 사상적으로 계승했다. 학교도 모스크도 아닌 별도의 공부방을 꾸렸다. 여기서 <빛의 책>을 읽어가는 독서회를 열었다. 학생들이 넘쳐흘렀다. 돈이 모여들었다. 무슬림들의 헌금이 꼬리를 물었다. 규모가 갈수록 커졌다. '등대'라는 이름의 여름 캠프도 만들어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이른바 '굴렌 운동'으로 성장한 것이다. 풀뿌리 이슬람 운동이 만개했다. 풀이 바람을 일으켰다.

굴렌이 힘을 쏟은 것은 교육 사업과 언론 사업이었다. 누르시가 꿈꾸었던 '광명학원'에 빗댈 수 있는 학교들을 세워갔다. 1990년대 말이면 2000개의 고등학교, 80개의 대학 예비 과정, 7개의 종합 대학을 거느리게 된다. 터키 전역에 굴렌계 교육망을 구축한 것이다. 누르시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황금 세대'를 키우고자 했다. 종교심이 투철한 현대적 엘리트를 육성하고자 했다. '근대적인 무슬림'을 배양하는 수련장이었다. '경건한 인재' 양성을 표방했다.

▲ 이스탄불의 굴렌계 초등학교. ⓒ이병한

'이슬람의 집'이 본디 일국에 한정될 수 없음은 굴렌 운동에서도 약여하게 드러났다. '소비에트의 집'에서 벗어난 중앙유라시아의 투르크계 국가들에도 학교를 세웠다. 발칸반도와 아라비아반도에도 진출했다. 구사회주의권의 재이슬람화를 견인했다. 재오스만화에 그치지도 않았다. 이슬람권이 아닌 지역까지 확산되었다. 현재 100여 개 국가에 굴렌계 학교가 설립되어 있다. 전 세계 도처에서 무슬림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움마를 위한 글로벌 학당이 된 것이다. 마드라사의 근대화, 마드라사의 세계화이다.

미디어 사업도 활발하다. 1979년 월간 과학지를 창간한다. 1988년에는 월간 신학지도 창간한다. 과학과 신학을 물과 기름으로 여기지 않았다. 신학과 과학의 통섭을 꾀했다. 1990년대에는 시사 주간지, 환경 문제 전문지, 육아 보건지 등도 간행한다. 민간 방송 합법화에 맞추어 방송국도 설립한다. 세속주의를 전파하는 관제 방송의 대안으로 이슬람 방송국을 만든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이슬람 자본이 대거 투입되었다. 순식간에 전국 단위의 TV 방송국과 라디오 방송국을 확보한다. 2001년에는 인터넷에도 진출한다. 이슬람 정보를 집약하는 온라인 아카이브를 구축했다. 최근에는 SNS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말씀을 통한 지하드라는 누르시의 메시지를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다.

'이슬람 담론' 개발에도 적극적이다. 1994년 '언론인, 작가 재단'을 만든다. 이스탄불과 앙카라 사이에 있는 아름다운 휴양지 알반트에서 정기 포럼을 개최한다. 국내외 저명한 언론인과 지식인들을 초빙하여 국제 회의를 연다. 세속주의, 민주주의, 신헌법 초안 등 터키의 중요하고도 민감한 문제를 기탄없이 토론하는 공론장이 되었다. 세속주의의 편향성을 교정하고, 이슬람 근본주의 또한 해독해 가는 '이슬람 근대화'의 국제적인 토론장이다.

세속주의의 보루 군부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1997년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난다. 이번에는 굴렌을 직접 겨냥했다. 총칼이 겨누는 표적이 되었다. 국가 분열과 내란 선동 죄를 씌웠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굴렌은 요양을 구실로 미국으로 피신한다. 사실상의 망명이었다. 1999년부터 펜실베이니아에서 살고 있다.

허나 굴렌은 유연한 인물이었다. 성과 속의 균형을 취했다. 학교가 만들어지는 만큼, 모스크도 세우자고 했다. 세속에서도 '경건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본인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도, 세속주의자들과 어울릴 때는 맥주를 먼저 권하는 기지도 발휘했다. 물론 최종 목적은 지하드였다. 세속적 시민을 경건한 시민으로, 끝내는 경건한 무슬림으로 바꾸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이슬람의 집'에서 이교도와 함께 살아갔던 것처럼, 세속파를 배타하지도 억압하지도 않았다. 그를 탄압한 것은 '유럽의 집'을 선망하는 세속주의 군부였을 뿐이다.

굴렌의 망명에도 굴렌 운동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애초 엄격하고 엄숙한 근본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기쁘게, 보람되게, 축복되게 살아가는 방법을 전수해주었다. 마음의 평화, 정신의 풍요, 선의와 선행의 도덕적 삶을 은총으로 여기는 가치관의 전환(귀환)을 선사해주었다. 체제의 모순을 사회과학적으로 날카롭게 분석하는 비판적 지식인이 아니다. 생활의 모범을 보이고, 삶의 귀감이 되는 선생님이고 훈장님이었다. 논리로 설복하기보다는 공감과 공명으로 감득시켰다.

풀뿌리 이슬람은 갈수록 무르익었다. 물이 차올랐다. 바람의 방향도 바꾸었다. 배를 띄우기만 하면 됐다. 2001년 공정발전당이 발족한다. 선장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었다. 2002년 압도적인 표차로 정권을 교체한다. 재이슬람화가 시대정신이 되었다.

解禁(해금) : 공정 사회, 공정 세계

에르도안은 정치 역정 자체가 '교조적 세속주의'와의 투쟁이었던 인물이다. 1994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된다. 행정가로서 수완을 발휘했다. 불법 건조물 철거, 녹지 조성 등 오래 방치되었던 현안들을 척척 해결했다. 세속파의 아성이었던 이스탄불에서도 지지도가 점점 올라갔다.

점차 본인의 색깔도 드러냈다. 국가 의례였던 아타튀르크에 대한 묵념을 생략하기 일쑤였다. '전체주의' 요식 행위 대신에 코란을 낭독하는 쾌거(폭거)를 선보였다. 단박에 전국적인 이목을 집중시켰다. 국법보다 이슬람법이 위대함을, 국가 위에 천하가 있음을 상징적 몸짓으로 드러낸 것이다.

탐탁지 않은 군부는 호시탐탐했다. 이슬람 정치의 차세대 주자를 주저앉혀야 했다. 1997년 2월 정치 집회에서 종교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현직 시장을 긴급 체포한다. 짬짜미 사법부는 국가 분열 죄로 10개월 형을 선고했다. 4개월 후 가석방되기는 했으나, 정치 참여 기회는 박탈당했다. 공공장소에서 이슬람(=전통 문명)에 대해서 입만 뻥긋해도 정치 생명이 끊어지는 참으로 '모던'한 정교 분리 시대였다.

당시의 굴욕은 에르도안의 투지를 더욱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이슬람을 외쳤다. 2001년 공정발전당 창당, 2002년 정권 교체, 2003년 총리 취임까지 일사천리로 내달렸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이슬람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영국은 성공회가 국교인 나라이고, 독일에는 기독교민주당이 건재하며, 미국의 대통령은 성경에 선서를 한다. 터키의 남쪽에는 유대교 국가 이스라엘도 있다. 왜 무슬림이 90%가 넘게 살아가는 터키에서 이슬람을 발설할 수 없냐고 사자후를 뿜어냈다. 풀뿌리는 환호하고 열광했다. 2007년, 2011년, 2015년 총선에서 연거푸 승리했다.

군부가 위로부터 탈이슬람화를 강요했던 것처럼, 공정발전당이 재이슬람화를 강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수용하고 있다. 기층의 목소리를 받아 안고 있다. 히잡 착용 금지를 해금한 것이 대표적이다. 터키는 건국 이래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쓰는 것을 금지시켰다.

1999년 일화가 유명하다. 초선 여성 의원이 히잡을 두르고 국회에 입장했다. 대소란이 일어났다. 의원 선언도 하지 못하고 쫓겨났다. 불체포 특권도 무시한 채 현장에서 구속되어 의원직이 박탈되었다. 소속 정당까지 해산되었다. 그래서 신심 깊은 여학생들은 명문 대학 진학마저 꺼렸다. 고등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히잡을 벗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공정발전당의 조치는 그 억압적인 조항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히잡을 쓰든 말든 개인의 자유라고 했다. 자유주의의 논법을 그대로 빌려와 '교조적 세속주의'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 2008년, 마침내 여학생들도 대학 캠퍼스에서 마음껏 히잡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신체를 노출시켜도 되지 않는 자유와 권리를 획득했다.

세속주의 야당은 쪼르르 헌법재판소로 달려갔다. 헌법소원을 제기해 공정발전당을 해산시키려 했다. 에르도안을 지켜준 것은 재차 민심=천심이었다. 2009년 지방 선거에서도 압승한다. 도리어 반격을 펼쳤다. 1980년 쿠데타로부터 꼬박 30주년이 되는 2010년 9월 12일에 헌법 개정 국민 투표를 실시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을 법정에 세우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헌법재판관과 검찰의 고위직 임명권을 의회와 대통령이 나누어갖는 조항도 넣었다. 군부와 사법부를 대폭 약화시키는 개혁 헌법이었다. 문민 통제를 강화하는 '민주' 헌법이었다. 이 개정안 역시 58%의 찬성으로 가결된다. 풀뿌리의 지지에 힘입어 문/무 교체를 완성한 것이다. 이제는 대통령과 총리의 부인이 국가 행사에 히잡을 쓰고 나와도 군부가 찍소리도 하지 못한다.

국회서도 히잡을 쓰고 국사를 논하는 여성 의원들이 여럿이다. 이스탄불 대학교에서도, 앙카라 대학교에서도 형형색색 히잡을 두르고 한껏 멋을 부리고 있는 여학생들이 5할을 넘었다. 히잡은 이제 터키 여성들이 가장 선호하는 잇아이템이다. 명품 히잡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

▲ 앙카라 대학교 여학생. ⓒ이병한

가시적인 변화만이 아니다. 공정발전당은 이슬람적 가치를 공공 정책으로 구현했다. 공공 버스를 도입하여 서민들의 교통난을 해소했다. 공공 주택을 보급하여 주거 생활의 안정화를 꾀했다. 교통과 주택이라는 일상생활의 핵심 문제부터 해결한 것이다. 부의 재분배 정책도 실시했다. 약자와 빈자를 먼저 보살피는 것이 이슬람주의 정당으로서 왕도를 실천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군사 독재 아래 비대하게 성장했던 대자본, 대도시 위주가 아니라 중소 자본, 지방 위주의 '균형 발전' 또한 이루어갔다. 터키어 이외의 일체의 언어 사용을 금지했던 헌법도 개정했다. 쿠르드어도 교육 현장과 언론 매체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2008년 쿠르드어 방송국이 생겼고, 2012년부터는 쿠르드어가 초등학교의 선택 과목이 되었다. 그리하여 2014년 터키공화국 최초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에르도안은 52%의 득표율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주화 이후 터키 사회는 질적으로 좋아졌다.

그런데도 2016년 여름, 재차 군사 쿠데타가 시도되었다. 국민들이 직접 선출한 첫 대통령을 끌어내리려고 했다. 1960년, 1971년, 1980년, 1997년에는 성공했다. 재이슬람화의 물결을 군부가 앞장서서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 천년, 더 이상은 안 된다. 국민들이, 민중들이, 청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탱크의 진격을 저지시켰다.

100만 명이 운집하여 민주공화국의 수호를 자축했다. 처음으로 민중이 군부를 이긴 것이다. 모름지기 주권자는 국민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에르도안은 재차 민심=천심을 받들어 천명을 수행하고 있다. 쿠데타 세력들은 물론이요, 그들의 비호 아래 대학과 언론에서 기생하던 어용학자(교조적 세속주의자, 자유주의 근본주의자)를 일망타진하고 있다.

근대화=세속화=서구화라는 얄팍한 도식 아래 80년간 지배 체제를 형성했던 군부의 총, 검찰의 칼, 대자본의 돈, 언론/대학의 펜을 허물어뜨리고 있다. 100년의 적폐를 일소하고 있는 것이다. 형식적 민주주의를 돌파한 대(大)민주의 구현이다. 소(小)민주에 안주하는 서방에서 전전긍긍 비방을 퍼붓는다.

▲ 쿠데타 좌초시킨 이스탄불 시민. ⓒ이병한


2016년 쿠데타 정황을 적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정만 살펴서도 모자라다. 서유라시아 지도를 펼쳐놓고 전후 흐름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공정발전당의 집권 이래 터키는 해외 파병을 하지 않았다. 이라크 전쟁에도 아프간 전쟁에도 지원을 하지 않았다. 동맹국 미국이 당근으로 유혹하고 채찍으로 협박해도 거듭 거절했다. 이슬람적 공정에 위배되는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군부로서는 천금 같은 기회를 날린 셈이다. 그들로서는 냉전기야말로 황금 시절이었다. 소련과 적대하고 중동에 개입하는 통로 역할을 하면서 위세를 떨칠 수 있었다. 혹여 쿠데타에 성공했다면 우크라이나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다. 터키 또한 러시아를 적대하는 신냉전의 첨병이 되었을 것이다. 확실하게 구미의 편에 섬으로써 떨어지는 떡고물도 커졌을 것이다.

사례가 없지 않다. 2년 전 이집트에서도 쿠데타가 일어나, '아랍의 봄'을 한순간에 되돌려버렸다. 30년 독재자 무바라크는 석방되었고, 국민들이 선출한 무슬림형제단 출신의 무르시 대통령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자 일시 중지되었던 미국의 군사 지원이 재개되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긴급 자금을 충당해주었다. 기득권 세력의 호주머니로 재차 검은 돈이 흘러들었다.

즉 우크라이나에서, 이집트에서 획책되었던 수구반동파의 기획을 터키에서는 민중들이 막아낸 것이다. 풀뿌리가 '내부자들'과 '외부세력'을 이겨낸 것이다. 터키의 민주주의는 한층 공고해졌다. 이슬람이라는 기층에 착근하여 피어난 주체적이고 토착적인 '민주'이기 때문이다. (계속)

▲ 쿠데타 좌초 이후 대형 터키 국기가 걸린 이스탄불 대학교.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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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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