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고(故)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가 20만 시민 앞에 섰다.
"삼성이 반도체 공장과 LCD 공장에서 일하다 죽어간 노동자에게 빨대를 꽂아 피를 쭉쭉 빤 다음 박근혜와 최순실에게 토해냈다. 노동자가 암에 걸리고 죽으면서 그 가정이 해체되는데도 이는 무시하고 최순실과 박근혜에게 돈을 갖다 바쳤다."
절규였다. 5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진행된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 행동' 문화제의 한 장면이다. 이날 문화제는 오후 4시 20분께 시작돼 오후 5시 45분께 행진을 시작했다. 종로 등 서울 시내를 행진한 참가자들은 이날 오후 7시 30분께 다시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 이후 진행된 문화제는 다양한 시민이 연단에서 발언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황상기 씨 역시 그 중 한 명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한 시민이 모이는 자리에서 황 씨가 마이크를 잡아야 했던 이유가 있다.
고(故) 황유미 씨가 백혈병으로 사경을 헤맬 때, 삼성이 황 씨에게 500만 원을 건넸다. '입막음' 목적이었다. 자기네 공장에서 일하다 죽어간 노동자에게 500만 원으로 입을 틀어막던 삼성.
그러나 최순실 씨 모녀를 위해선 돈을 아끼지 않았다. 법도 어겼다. 최 씨의 딸 정유라 씨는 승마 특기생으로 대학에 갔다. 삼성은 정 씨가 승마용 말을 구입하고 승마 훈련을 하는 전 과정을 지원했다. 독일에 체류하는 최 씨와 정 씨 모녀에게 약 35억 원을 현금으로 송금했다. 삼성은 지난 2014년 말부터 대한승마협회를 맡고 있다. 대한승마협회 행정 및 예산 집행의 초점을 정 씨를 지원하는데 맞췄다.
23살에 세상을 떠난 고(故) 황유미 씨, 올해 21살인 정유라 씨의 삶은 왜 이토록 달라야 하나. 지난 2007년부터 황상기 씨와 함께했던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 활동가들도 이날 문화제에 참가했다. 이들은 광화문 광장에서 마리오네트 인형 퍼포먼스를 했다. 박근혜 대통령 인형을 조종하는 게 최순실 씨 인형이다. 그리고 최순실 씨 인형을 돈으로 움직이는 게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다. 이런 메시지를 담은 퍼포먼스다.
"박근혜 움직인 최순실, 최순실 움직인 삼성 이재용."
그렇다면, 황상기 씨는 이날 문화제에서 자기 딸 이야기만 한 건가. 그렇지 않았다. 문화제 참가자들이 숙연해졌다.
황 씨는 자신의 딸의 비극이 생겨난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삼성은 반(反)인권적인 '무노조 경영'으로 오랫동안 악명이 높았다. 반도체 및 LCD 공장 등에서 직업병이 심각했던 한 이유다. 노동조합이 있었다면, 노동자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을 때, 회사 측이 무리한 작업을 지시할 때, 항의할 통로가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없었으므로 그게 불가능했다. 황 씨는 삼성의 무노조 경영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경영권 승계의 불법성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런 일이 왜 가능했나. 바로 정부의 협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는 자리에 황 씨가 나왔던 이유다. 박근혜 정부는 삼성 정부였다. 앞으로는 달라질까.
황 씨의 발언은 "김병준 총리 내정자는 대표적인 삼성맨"이라는 내용으로 마무리 됐다. 위기를 맞은 박 대통령이 고른 총리 내정자 역시 삼성과 가깝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김 내정자는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정책실장 및 교육부총리 등을 지내는 동안 재벌과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삼성의 부당한 영향력으로부터 독립하는 싸움은 아주 길다는 뜻이다.
실제로 최순실 씨가 설립을 주도한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에 출연금을 낸 재벌 가운데 삼성이 가장 많은 돈을 냈다. 관련 실무를 한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 부회장 역시 오랫동안 삼성과 가까웠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 수석 비서관 역시 성균관대학교 교수 출신으로 삼성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또 이들 재단 출연금 외에 최 씨 일가에게 직접 돈을 송금한 기업은 오로지 삼성뿐이었다.
황 씨의 뒤를 이어 연단에 오른 사람은 김용옥 한신대학교 석좌교수였다. 철학자 '도올'로 이름이 높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은 단지 '정권 퇴진'을 위해 앉아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새로운 삶이고, 새로운 학문이고, 새로운 철학이고, 새로운 의식이고, 우리가 진정하게 새로운 삶을 원하는데, 이 낡아빠진 삶을 지속시키려는 그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의 보이지 않는 곳곳에 곳곳에 꽉 차 있습니다. 이것을 처리하는 것은 정치인들이 탄핵을 해서 될 일도 아니요. 오로지 우리 국민의 의식으로써 우리 국민의 운동으로써 우리 민중의 행진으로써 모든 무리들을 이 정치의 장으로부터 다 쓸어버려야 합니다."
황상기 씨와 도올 김용옥, 전혀 다른 이력을 지닌 두 사람이지만 이날 발언에선 공통점이 있었다. '박근혜 정권 퇴진'을 넘어서는 과제가 있다는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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