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에 전부를 걸다

[X세대가 만난 광장의 MZ]④ 금속노조 거통고지회 조합원 송예은 씨

윤석열 퇴진 광장에서 '야생맘마먹음이보존협회' 깃발 일인 기수로 활동한 대학생 예은 씨는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거통고지회) 홍보담당자를 통해 연락이 닿았다. 그가 거통고지회 조합원이기 때문이다.

서울 중구 한화 본사 빌딩 앞 거통고지회 천막농성장에서 예은 씨를 만난 5월 26일은 마침 같은 장소에서 민주노총 서울본부 주최로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었다. 거통고 고공농성 승리를 위한 '서울지역 노동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한다는 내용이었다. 바로 옆 30미터 철탑 위에서 73일째 고공농성 중인 김형수 지회장이 기자회견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김 지회장은 6월 19일, 고공농성 97일 만에 지상으로 내려왔다.)

예은 씨는 바빴다. 오전 기자회견이 끝난 다음엔 향후 활동 방향을 논의하는 간담회에 참석했고, 이후 30여분간의 점심 선전전을 마치고 나서야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기다리는 김에 나도 피켓을 들고 선전전에 함께했는데, 점심시간을 맞아 쏟아져 나온 직장인들을 향해 포효하는 듯한 예은 씨의 발언을 듣고 솔직히 깜짝 놀랐다.

"정당한 임금과 상여금을 지급해달라, 일하다가 죽거나 다치지 않도록 안전대책을 마련해달라, 이 당연한 요구를 하려고 저 위에 사람이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한화가 정말 하청노동자와 관련이 없다면 왜 노동자들의 정당한 투쟁에 470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겠습니까. 시민 여러분! 식사하러 가시는 길에 한화오션과 고공농성을 한번 검색해주십시오. 고공농성을 왜 하게 됐는지 한 번씩 읽어봐 주시기 바랍니다."

'단결투쟁' 머리띠에 노조 조끼를 입은 청년들을 광장에서 많이 봤지만, 예은 씨는 그냥 딱 현직 노조 조합원이었다. 어깨를 덮던 긴 머리는 숏커트로 잘려 있었다. 김 지회장이 고공농성을 위해 철탑에 올라가던 날 당분간 내려올 수 없으니 짧게 이발을 했는데, 그날같이 잘랐다고 했다. 이번 광장을 거치며 민주노총 등 노동조합에 가입한 청년들이 적지 않지만, 예은 씨처럼 농성장에 매일 출근해 상주 조합원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드물다.

각종 투쟁현장에 연대하는 시민들을 가리키는 '말벌아저씨 시민연대'라는 말도 어쩌면 예은 씨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그가 지난 1월 초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시위에서 인터넷 밈 '말벌아저씨'를 빗대, 전장연과 연대한다는 의미로 '말벌 시민'이라는 밈을 퍼뜨렸다'는 한 언론의 기사를 보고 사실 확인차 물었더니, 꼭 혼자 만든 것이라기보다 "당시 몇몇 시민들 사이에 그 말이 유행하면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것 같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인터뷰 당일(5월 26일) 거통고지회 농성장 앞 '연대투쟁호'를 배경으로 선 예은 씨. 바로 뒤에 보이는 회색 기둥이 김형수 지회장이 올라간 30m 철탑이다. ⓒ 임은경

고공농성장 끝까지 지킨 거통고지회 상주 조합원 '맘마' 동지

"이제는 한 마리 말벌을 넘어 아예 노조 조합원이 되셨네요. 예은 씨도 집회‧시위에 나온 것은 이번 광장이 처음이었나요?"

"거의 그런 셈이죠. 그전의 집회 경험이란 퀴어축제에 참가해본 것이 다였으니까요. 계엄이 선포되던 밤, 저희 집이 수방사에서 멀지 않아서 헬기 출동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다음 날 아침에 여의도 국회 앞에 나갔는데 상황이 많이 정리된 상태더라고요. 민주노총이 긴급 기자회견을 한다고 해서 광화문으로 갔다가, 저녁 때는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주최한 여의도 집회에 참석했어요."

특히 계엄 당일 밤에 발표된 금속노조의 성명서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그는 말했다.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지금부터 금속노조는 저항의 최전선에 선다"로 시작하는 짧은 성명서. 가장 빠르게 나오기도 했지만, 짧으면서도 마치 웅변하듯 강렬한 그 문장들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금속노조가 선봉에 선다는 말이 되게 믿음직한 거예요. 만약 국회의원이 선봉에 선다고 하면 그들이 딱히 나를 보호해 줄 것 같지 않지만, 그렇게 용감하게 싸우는 노동자들이 우리 편이라니까 너무 든든하잖아요."

예은 씨는 쌍용자동차 투쟁을 다룬 시사 프로그램을 보고 어른들에게 질문을 하는 아이였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트위터로 정치인들 계정을 팔로우하는 초등학생이기도 했다. 중학교 때부터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 인권 관련 서적을 포함해 1년에 100권씩 책을 읽었다. 세상이 궁금하니까 책을 찾아봤는데, 책 속에 나온 대로만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데 의문을 품게 될 때가 많았다. 태권도 청소년 국가대표 선수로 대학에 진학했지만 이후 진로를 바꾸어 사회과학 복수전공을 하며 철학을 공부했고, 졸업을 앞두고는 대학 동아리에서 연극을 하면서 배우를 꿈꿨다.

그러다 윤석열 정권 기간에 유독 사회적 우울감을 심하게 겪었다.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를 비롯해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소라넷 폐지 운동, SPC 투쟁, 화물연대 파업 등 크고 작은 사회 문제들을 모두 관심 있게 지켜봤음에도, 그에 대해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2012년 대선 개표방송을 보다가 체해서 아팠던 그는 독재자의 딸을 뽑은 어른들을 원망했지만, 막상 어른이 된 자신도 별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좌절감이 심했다고 한다. 그런 그였기에 광장의 경험은 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 문제에 관심 많았지만 참여 방법 몰라 좌절감 겪어

"박근혜 퇴진 광장과 이곳은 다르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어요. 막연하게 뭉뚱그린 사회개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집회 전에 평등 수칙을 외치고 혐오 발언 등을 경계하니까 소수자도 광장에서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저도 첫 발언 때 평소에 말하지 못한 것들을 많이 얘기했어요. 성소수자 인권, 장애인 이동권 투쟁, 여대들의 투쟁,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노동조합들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였죠."

12월 10일 여의도 평일 집회였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는 솔직히 겁이 나기도 했다.

'내가 여기서 성소수자를 지지한다고 말해도 이 사람들이 박수쳐 줄까. 나는 당사자도 아닌데. 발언을 하고 자리에 돌아갔을 때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눈으로 보면 어떡하지?'

그것은 기우였다. 참가자들의 격려와 박수가 쏟아졌고, 발언 영상이 SNS에 확산되면서 '얘기 잘 들었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고 예은 씨는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 영상을 나도 봤다. 용기 내지 못한 지난날을 반성하고 이제라도 행동할 것을 다짐하는 스물다섯 청년의 애끓는 진심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노동자가 시민을 필요로 할 때 같은 노동자임에도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학생 여러분, 이 사회의 어른으로서 미안합니다. 노동자 여러분, 같은 노동자로서 미안합니다. 나는 더 이상 패배감에 울지 않을 것입니다."

배우 지망생이었던 그는 "어쩌면 이게 저의 첫 무대일 것"이라고 말했고, 청중은 지지와 환호를 보냈다. 그때부터 그는 매일 광장에 나갔다. 학기 중이고 기말고사 기간이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다른 많은 말벌 시민들처럼 예은 씨도 12월 남태령에서 있었던 농민단체의 트랙터 시위를 중요한 순간으로 꼽았다. 그에게 특히 이 시위가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탄핵광장만이 아닌 특정 단체의 집회에 나가도 된다는 것을 가르쳐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달려온 연대시민들을 적극 포용한 농민들의 태도, 사회적 소수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밝혀도 안전한 공간이었다는 점도 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남태령은 저를 거통고지회와 연결해준 곳이기도 해요. 남태령 때 이곳저곳 투쟁사업장 이야기가 나오면서 노동조합 등에 후원의 물결이 이어졌는데, 그중 하나가 거통고였거든요. 그 뒤에 거통고 측에서 남태령에 왔던 시민들을 향해 SNS에 초대장을 올리셨어요. '여러분이 너무 궁금하다, 우리 신년문화제에 와주면 감사하겠다, 떡국을 나눠 먹겠다'고 하셔서 바로 달려갔죠. 제가 금속노조를 정말 너무 좋아했거든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집회에서 연대발언에 나선 예은 씨 ⓒ 호수

남태령 계기로 거제로, 한남동 거쳐 한화 본사 앞 농성장까지

거제에서 새해를 함께 맞은 그들을 1월 초 한남동 키세스 집회에서 다시 만났다. 3박 4일간의 집회가 끝날 무렵엔 헤어짐이 너무 아쉬웠는데, 이틀 뒤인 1월 7일에 거통고지회에서 한화 본사 앞에 천막을 치고 상경투쟁을 시작했다. 예은 씨도 그날 밤부터 조합원들과 함께 용역들에 맞서 싸웠다. 한화 측이 조선소 노동자들을 무력으로 막는다는 소식이 X에 퍼지면서 말벌 동지들도 현장으로 달려갔다. 말벌 동지들의 활동이 본격화된 것이 바로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예은 씨는 사실상 거통고 사람이 되었다.

"정식으로 조합원 가입을 한 날은 2월 19일이에요. 2022년 거통고지회에서 벌였던 파업에 대한 1심 재판 결과가 나온 날이죠. 그전까지 고민을 오래 했어요. 동지들에게 도움이 되려면 내가 연대시민으로 있는 게 나은가, 아니면 조합원이 되는 게 나은가 하고요. 저희 지회장 동지한테 농담으로, '만약 판결이 잘못돼도 걱정하지 마라, 내가 조합원 가입을 해서라도 투쟁에 힘을 보태겠다' 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결국 그날 조합원으로 가입하게 됐어요."

2022년 여름 거통고지회 노동자들은 당시 원청이었던 대우조선해양을 상대로 5년간 삭감‧동결된 임금 원상회복과 하청노동자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51일간 파업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윤석열·김건희 부부 공천개입 의혹 사건' 핵심 인물인 명태균 씨가 윤 대통령에게 강경 진압 의견을 낸 사실이 밝혀졌고, 실제로 대통령이 직접 나서 공권력 투입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논란이 더욱 커졌다. 파업이 끝나자 대우조선은 노조 집행부 다섯 명을 상대로 47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고, 업무방해 등 혐의로 조합원 22명을 고소했다.

이후 2023년 한화그룹이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해 회사 이름을 한화오션으로 바꿨다. 한화오션은 대우조선이 제기한 소송도 이어받았다. 거통고지회의 파업은 하청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파업과 이에 대한 회사의 천문학적인 손배소가 이어졌다는 점에서, 하청노동자의 현실을 널리 알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재판 결과는 파업의 공익성 등이 참작돼 실형을 면하고 모두 징역형 집행유예와 벌금형이 내려졌고, 거통고지회는 더 좋은 결과를 위해 항소하기로 했다.

"조합원 신분의 효용은 바로 증명됐어요. 얼마 뒤인 2월 28일에 서울시교육청에서 성폭력 공익제보 건으로 해임된 지혜복 선생님 복직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되는 일이 생겼거든요. 경찰서 유치장에서 48시간을 거의 다 채우고 나와야 했지만, '소속'이 있었기 때문에 금속노조 법률원장님이 변호사로 찾아와주셨죠."

활동이 두드러진 만큼 예은 씨는 종종 공권력의 표적이 되곤 했다. 혜화역에서 열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시위에서는 서울대병원 입구에 스티커를 두 장 붙였다는 이유로 경찰 소환 통보를 받았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나기도 했다. 집회에서 발언할 때 그는 다른 사람들과 반대로 시민이 아니라 경찰 쪽을 향해 말을 했다. 주목을 안 받으려야 안 받을 수 있었을까. 서울시교육청에서 연행됐을 때는 혼자만 유치장 독방에 갇히기도 했다.

불굴의 의지로 지켜낸 싸움, 연대 시민에 대한 포용…거통고지회의 마력에 푹 빠지다

"그렇게 이곳저곳에 연대하던 말벌시민에서 이제는 거통고지회 정식 조합원이 되어 농성장에 상주하며 활동하고 있네요. 왜 하필이면 거통고지회였나요?"

"이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나도 같이 있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든 거죠. '무지개 조선소'를 할 때 제가 작업반장이었거든요. 저 앞에 있는 저 배(노동자와 연대시민이 함께 제작한 연대투쟁호)를 만든 작업이요. 그때 조합원들과 많이 친해졌어요. 개개인의 인간적인 면모도 좋았고, 다른 투쟁사업장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기꺼이 연대하는 모습, 세대 차이나 문화적 차이가 있는 연대시민들을 포용적으로 대하시는 모습도 참 좋았죠."

CCTV 철탑 위에서 97일간 고공농성을 벌인 김형수 지회장과의 인연도 특별하다. 한화 본사 앞에 천막을 치고, 배를 만들고, 고공에 올라가는 과정에서 거침없이 투쟁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사람들을 배려하는 태도, 다른 단체의 투쟁에 진심으로 연대하는 자세, 청년과 소수자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하고 문제가 생기면 바로 시정하려는 노력은 예은 씨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예은 씨는 어느새 어느 집회 현장에 가든 금속노조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이 되었다.

거제의 조선소 현장에서 외롭게 싸우고 있는 조합원 동지들도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2022년 51일 파업과 장기 단식농성, 서울 상경투쟁에 고공농성 등으로 지금은 세상에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거통고지회 조합원들은 그보다 훨씬 오랫동안 싸워왔다. 보안 문제 때문에 일반인은 접근조차 불가능한 조선소 안에서 그들은 그야말로 묵묵히 현장을 지키고 있다. 서울에서 고공농성을 해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볼까 말까 하는데, 매일 똑같은 사람들에게 똑같은 얘기를 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주위에서는 '네 일도 아닌데 되게 열심히 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저는 이게 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합원이 된 거였거든요. 거통고는 제가 곧 갈 수도 있는 현장이고(예은 씨는 고공농성이 끝난 후 거제로 내려갈 생각이라고 했다) 노조법 2·3조 개정 사안이 크게 걸려 있는 곳이니까, 하청노동자와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 문제가 시작되는 기점일 수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 이 투쟁이 남의 일이 될 수가 없는 거죠."

거통고지회 투쟁은 노동계의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 주장의 근거가 돼 왔다. 노조법을 개정해 원청 사업주에게 하청노조의 단체교섭 요구에 응할 의무를 지게 하고, 쟁의행위 등 노조활동에 대한 기업의 무리한 손배소 남발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조법 2·3조 개정안은 2023년 11월과 지난해 8월 두 차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면서 폐기된 바 있다.

"요즘 청년들은 사회생활의 첫 시작이 다 비정규직 아니면 하청노동자예요. 제가 가고 싶었던 연극이나 영화계도 다 하청 구조거든요. 내가 어떤 현장을 가도 만나게 될 문제에 맞서 싸우고 있는 곳이니까 그런 면에서 저도 당사자성을 발견하는 것 같아요. 이건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바로 내 일이라고요."

▲2월 19일 통영법원 앞에서 조합원 가입신청서를 제출한 날. 왼쪽은 김형수 거통고지회장, 오른쪽이 예은 씨 ⓒ 서진ENG 변주현

"내가 시작했을 사회생활도 비정규직 아니면 하청노동자…거통고지회 투쟁은 남의 일 아냐"

노조 조합원이 되어 조선소 노동자들의 투쟁에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던 것처럼, 예은 씨는 성소수자, 발달장애인, 반도체 생산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문제 등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목소리를 내왔다. 3월 13일 광화문에서 열린 오픈마이크에서 그는 "우리는 대체 몇 명이 더 죽어야 말할 순서가 오는 겁니까? 언제가 돼야 나중이 아닌 지금 말할 수 있습니까? 살려달라는 말이 어떻게 순서를 지켜 나올 수 있습니까?"라고 절규했다.(출처: 기록하는시민 '말빛' X 계정) 다른 사람의 일에 어떻게 그토록 자기 일처럼 공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건 아마도 연기를 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

"제 생각에 배우란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사람이거든요. 만약 그 사람의 상황에 내가 정말로 들어갔으면 어땠을지를 계속 생각해야 하는 일이죠. 어떤 사건이나 투쟁 현장을 접하게 되면 그 얘기를 들려주는 당사자들을 만나게 되잖아요. 그분들의 말을 들을 때, 저게 나의 일이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많이 생각하곤 해요."

배우에 대한 예은 씨의 꿈은 진지했다. 거통고 조합원으로 가입했을 즈음엔 전태일 관련 연극에 합류할 기회가 온 적도 있었다. 전태일에 관한 작품이라는 점과 페이를 챙겨주는 흔치 않은 연극이라는 점 등 여러 가지로 좋은 기회였지만, 그는 고민 끝에 사의를 표하고 빠져나왔다. 얼마 뒤 고공농성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고공농성장을 두고 연극 연습에 집중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건 관객한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배우를 준비하면서 품었던 철학이나 원칙하고 맞지 않는 일이었다.

"어쩌면 저는 집회를 통해 매번 무대에 섰던 건지도 몰라요. 집회에서 하는 발언들이 다 일종의 독백 무대였다고 생각해요. 말이 있고 무대가 있고 관객이 있으면 그것도 하나의 연극이 아닐까요."

'배우를 하고 싶거든 함부로 나서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이 연극‧영화계 선배들의 충고였다. 정치‧사회적인 목소리를 냈다가 공격을 받거나 기회를 배제당한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나는 말을 하기 위해서 배우가 되고 싶은 건데, 정작 배우라서 말을 하지 못한다면 그 직업이 나한테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이 한동안 그의 고민이었다. 그가 연극 무대가 아니라 농성장을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언젠가 배우가 되어서 노조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그는 꿈꾼다.

"언젠가 배우가 돼 노조활동 당당하게 말하고 싶어"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이십대 청년으로서 현실적인 고민이나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묻자 그는 "사회는 진보했는데 왜 우리는 예전과 똑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는가, 노동조합과 연대시민의 연결이 지속되려면 어떤 투쟁이 전개되어야 할까"를 고민한다고 답했다. 졸업, 진로 등 개인적인 일들을 우선할 법한 시기이지만, 당장 자기 문제보다 세상에 대한 고민이 훨씬 깊어 보였다. 지금까지 만났던 '광장의 MZ들'과 비슷한 점이었다.

"보통 개인의 문제는 그냥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들 하잖아요. 매일의 생존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취미나 진로 등 하고 싶은 게 있어도 돈이 필요하죠. 그걸 벌기 위해서는 알바를 해야 하고요. 그런 고민은 저도 다른 청년 세대랑 똑같아요. 그런데 그 모든 게 사실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걸 모를 수는 없잖아요. 학교에서 사회과학 수업을 들으면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운동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고개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한다. '그렇고 말고. 의미가 있다'고.

"그리고 이제 더 이상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기도 했고요."

또 생각한다. '물론'이라고.

인터뷰 기사를 마무리하며 몇 가지 사항을 확인하기 위해 연락했을 때, 예은 씨는 고공농성이 끝난 거통고지회의 근황을 전했다. 지상으로 내려온 김형수 지회장은 다리 근력 등의 회복을 위해 일주일째 녹색병원에 머물고 있고, 퇴원하면 경찰조사를 받을 예정이다. 한화빌딩 앞 거통고지회 농성장은 고공농성이 끝난 다음 날 철거했고, 조합원들은 모두 거제로 복귀했다. 97일간의 고공농성은 한화오션 하청 노사가 △상여금 50% 인상 △조합원 취업을 방해하는 '블랙리스트' 작성 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2024년 임단협 교섭안에 합의하면서 마무리되었다.

개인의 문제도 사실은 구조적인 문제.. 그의 선택은 '운동'

김 지회장은 19일 지상으로 내려온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몸을 추스르는 대로 노조법 2,3조 개정을 위한 투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전히 고공농성 중인 한국옵티칼하이테크(19일 기준 529일째)와 세종호텔(19일 기준 127일째)의 투쟁에 미안함을 표하며, 이들이 땅을 밟을 때까지 거통고지회가 끝까지 연대할 것이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고공농성장을 지켰던 '맘마', '레어' 등 우리 말벌 조합원 동지들 정말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김 지회장의 눈물에 '맘마'라고 이름이 불린 예은 씨도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

"김 지회장님이 퇴원하시고 나면 예은 씨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일단 학교를 졸업해야죠. 마지막 학기가 남았는데, 고공농성장을 지키기 위해 휴학한 상태라서요. 졸업 이후에는 주변 정리를 하고 거제로 내려가려고 해요. 그곳에 가면 저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용접을 배울까 생각하고 있어요. 원래 몸 쓰는 일(운동선수)을 했으니까 그런 일이 그렇게 힘들진 않을 것 같아요."

그의 거통고지회 조합원 가입은 그저 시민으로서의 연대가 아니었다. 인터뷰 중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내가 속한 조합이 투쟁을 하고 있고 그 투쟁의 당사자로서 참여하고 있다, 딱 그 정도로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이렇게 싸울 수 있는 이유는 거제의 조합원 동지들이 현장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현장을 사수하며 조직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들이 있으니까 자신도 서울 농성장을 더 잘 지켜야겠다 싶고, 그런 사람들과 같이 싸울 수 있다는 게 참 좋다고 말이다.

경기도에서 태어나 평생을 수도권 일원에서 보낸 그가 처음으로 남쪽 바닷가에서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 시를 쓰는 마음과 사랑을 하는 마음은 같은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나도 한때 한 적이 있었던가. 가슴이 뛰는 일을 찾아, 그는 모든 것을 다 걸었다. 몇 년 뒤, 혹은 그보다 조금 더 뒤에 서울의 어느 노동자대회에서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그때도 그는 사랑하는 금속노조의 단결투쟁 머리띠를 매고 선봉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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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에서 여덟 살 된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X세대 아줌마입니다. 대학 졸업 후 기자로 일하다 한동안 소설을 썼습니다. 극심한 생존경쟁이 기본값인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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