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크 더글라스 : 클린트 이스트우드
<스파타거스(Spartacus)>(1960, 스탠리 큐브릭 감독), <빈센트 반 고흐(Lust for life)>(1956, 빈센트 미넬리 감독) 등 많은 영화에서 주인공 역을 맡았던 커크 더글라스는 올해 12월 100세를 맞는다. 그 나이에 지금도 '마이 스페이스'라는 블로그를 운영한다는데, 최근 거기에 올린 글을 <허핑턴 포스트>가 소개했다고 <르몽드>가 전했다. 그는 20세기 초 러시아의 차르의 박해를 피해 망명한 부모 얘기에 이어 16살 때 히틀러가 집권했던 시기를 회고했다.
"십 년 가까이 사람들은 그를 조롱했다. 허풍쟁이로 바라봤을 뿐, 그의 증오에 찬 민족주의가 개명된 민중을 사로잡으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렇게 80년 전을 돌아본 그는 몇 주 전 애리조나주에서 나온 연설을 듣게 되었는데, 그 연설이 마치 1933년에 튀어나온 듯해 등에 식은땀을 흘렸다고 썼다.
"미국에 오는 사람들이 모두 통합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정직함을 가져야 한다. 주권국으로서 우리는 여기서 어느 이민자가 꿈을 펼칠 수 있는지 선택할 권리가 있다."
도널드 트럼프의 말을 그대로 옮긴 뒤, 커크 더글라스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나는 지금껏 미 대통령 선거에 나선 인물 중에서 이처럼 공포의 캠페인을 이끈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커크 더글라스만이 아니다. 시리 허스트베트는 "제발 기도해 주세요. 아침에도, 저녁에도, 힐러리가 되도록…"이라고 작가답지 않은 말투로 호소했고, <제이슨 본(Jason Bourne)>(2016,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주인공 맷 데이먼은 트럼프의 정신 건강 상태에 의문을 표시했으며, 마돈나는 클린턴을 찍도록 독려하기 위해 옷을 벗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톰 행크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레이디 가가, 리차드 기어, 스티븐 스필버그 등 수많은 영화계 인사들이 '트럼프 반대'를 공공연히 밝혔다.
그 대척점에 있는 소수 인사 중에 86세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있다. 젊은 시절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1966,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 등 마카로니 웨스턴에서 총잡이 주인공으로 이름을 날렸고 근래에는 <더티 해리(Dirty Harry)>(1971, 돈 시겔 감독)의 주인공, <그랜 토리노(Gran Torino)>(2008, 클린튼 이스트우드 감독)의 감독으로 활약한 그는 클린턴과 트럼프 중에서는 트럼프를 찍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버락 오바마의 뒤를 따라가겠다는 클린턴을 반대한다는 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아첨꾼들에게 식상했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위험한 인물
'트럼프, 위험한 인물' 10월 11일 자 <르몽드> 사설의 제목이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위상을 떠나 이른바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 선거전에서 유력 정당의 후보로 선출된 인물에게 '위험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인 사설이 나온다는 것부터 심상치 않은 일이다.
사설은 "도널드 트럼프는 미대선 선거전을 더럽히고 상스럽고 저속하게 만들어 외설에 이르게 했다. 미국이 생긴 이래 지금까지 백악관의 어떤 후보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인물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다"라고 썼다. 사설에 따르면, 트럼프는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서 거짓말이라는 개념을 무력화시킨 인물"인데, 실제로 그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하여 그 내역이 풍요롭다. 미국 국경에 이주를 막는 장벽을 쌓는 비용을 멕시코가 지불할 것이라고 멕시코 대통령이 확인했다는 거짓말을 했는가 했다. 또 오바마가 케냐에서 태어났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나중에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했는데, 그렇게 잘못 알게 만든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클린턴이었다고, 또 거짓말을 늘어놓는 식이다. 유권자들 앞에서 자신의 성기의 크기에 아주 만족해한다고 떠벌리기도 했던 그는 기자든 배우든 정치인이든 여성을 공공연하게 모욕하고, 멕시코 이민자들을 '도둑'과 '성폭력범'이라고 비난하고, 기후 온난화의 원인을 부정하는 등 보편적인 사회 정치 기준을 마음껏 조롱하고 위반한다. 그에겐 오히려 공공연한 거짓과 기준 위반이 선거 캠페인의 무기인 것이다. 당락에 관계없이 그는 미국 대선의 역사에서 이름을 길이 남길 텐데,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리차드 닉슨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했던 70년대와 비교할 때 트럼프로 상징되는 오늘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포스트-진실 정치
분석가 중에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보편적 기준을 마구 위반하는 트럼프의 선거 전략과 관련하여 '포스트-진실 정치(post-truth politics)'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 개념은 미국의 온라인 잡지에서 활동한 전문가 데이빗 로버츠가 2012년에 처음 사용했는데 "우리는 '포스트-진실 정치' 안에서 살고 있다. 여론이나 미디어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들이 법안의 토대나 실제 내용과는 거의 연결되지 않는 정치 문화이다"라고 말했다. 이 개념이 트럼프에 의해 2016년에 미국의 가장 높은 정치에 적용됐다는 것이다.
실상 이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르몽드>는 위 사설의 결론 부분에서 "미국에서 일어난 일은 다른 곳에서 일어날 일을 예시한다"고 지적했는데, 트럼프는 극단의 경우에 속할 뿐, 빤한 거짓말과 보편기준의 위반은 정치가 있는 모든 곳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다. 영국이 유럽연합에 가입되어 일주일에 3억5000만 파운드의 비용을 들이고 있다거나 터키가 2020년에 유럽연합에 가입할 것이라고, 거짓말인 줄 빤히 알면서도 거짓말을 했던 보리스 존슨은 '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성공시킨 뒤 지금 외무장관 자리에 올랐다.
한국이라고 사정이 다를까. 백남기 농민이 외인사가 아니라 '병사'했다고 주장하는 백선하의 뒤에 진실보다 당파성이 앞서는 한국 정치가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가족이 적극적인 치료를 하지 않아 사망하게 됐다는 겁니다."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의 말이다. "미르재단의 800억 원 모금은 전경련의 자발적 모금이다. 세월호 때도 거의 900억 원 모금을 금방 했다"고 말한 인물이 집권당 대표 자리에 있다.
이렇게 정치 담론에서 참조해야 하는 가치인 진실을 외면하게 된 오늘의 상황과 관련하여 논평자들은 두 개의 현상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전문가들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것, 또 하나는 쏟아지는 정보를 파편화하여 기존에 형성된 당파성 안에 갇히게 만드는 사회 관계망의 급성장이 그것이다. <르몽드>의 정치평론 기자 실비 코프만은 "인터넷과 사회적 관계망에서 사용되는 알고리즘은 모든 시민들을 모순되는 정보와 부딪히지 않은 채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지적·미디어적 환경에 가두는 인식 틀을 형성한다"고 지적했다.
함께 더 강하게 : 아메리카를 다시 위대하게
<21세기 자본>(장경덕 옮김, 글항아리 펴냄)의 저자 토마 피케티는 <르몽드>에 기고한 글에서 대중선동의 투표 집단이 세계 곳곳에서 정립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상상하기보다 이주민과 외국인을 공격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와 힐러리 클린턴이 맞서는 대신,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가 맞서는 구도로 가는 경향이 유럽에서든 다른 나라에서든 똑같이 일어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오는 11월 8일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는데, 피케티는 새로운 미국 행정부의 과제로 최저임금 상승·공교육 강화·조세정의를 꼽았다. 애당초 버니 샌더스의 공약이었던 최저임금 15달러·공립대 등록금 무상화·의료보험 확대를 힐러리 클린턴이 수용했지만, 그것이 '조세정의' 없이 가능하지 않다고 할 때 월가와 친한 그녀가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또 남북관계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있는 우리가 각별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 물음과 관련하여, 클린턴의 '함께 더 강하게(Stronger together)'라는 구호는 트럼프의 '아메리카를 다시 위대하게(America great again)'라는 구호와 멀지 않다.
홍세화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의 '나라 밖 이야기'는 <작은책>과 필자의 동의를 받아, 한 달에 한 번 <프레시안>에 소개됩니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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