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등 100개를 켜 놓은 듯한 아우라'라는 표현의 출처를 아는 이들이라면, 최근 정국의 흐름이 의아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형광등 100개' 운운하며 '박비어천가'를 읊던 바로 그 TV조선이 '최순실 게이트' 폭로의 선봉대에 서 있으니 말이다. TV조선뿐 아니다. 함께 박비어천가를 떠들던 채널A 등 보수 언론이 나란히 '최순실 폭로'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마디로 표변이다. 박 대통령에 대한 이들 보수 언론의 달라진 태도는, 콘크리트 지지층조차 무너지고 있는 민심 이반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언론이 박 대통령을 배반하는 속도는 민심이 등지는 속도를 훌쩍 뛰어넘는다는 점이다.
민주언론시민연합에 따르면, 지난 18일 최순실 게이트 관련 보도가 <한겨레>는 11건, <경향>은 10건, <한국>은 8건, <조선>,<동아>,<중앙>은 4~5건이었다. <조선> 등은 이때까지만 해도 최순실 게이트 관련 보도는 타 언론사에서 제기된 의혹을 받아쓰는 수준으로만 처리했다. 그보단 '송민순 회고록' 파동 건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문재인 전 의원 등에 대한 종북몰이에 집중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첫 번째 해명을 한 다음 날인 21일부터 <조선>의 보도량은 급격히 늘어난다. 이후 24일 JTBC가 '청와대가 최순실 씨에게 시시콜콜한 결재를 받았다'는 단독 보도를 한 뒤부터는 단순히 보도의 양을 늘리는 것을 넘어서서 '단독', '특종' 기사를 쏟아낸다. <동아>는 <조선>보다는 주춤했지만 곧 증가세를 이어받았고, 채널A는 TV조선 못지않게 단독 기사들을 쏟아냈다. <중앙>도 JTBC에 비하면 소극적이지만, 대통령 해명 이후 보도량이 큰 폭으로 뛰어올랐다.
대통령의 해명을 이끌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JTBC를 제외하고, <조선>, TV조선, <동아>, 채널A 등은 최순실 게이트 국면에서 가장 '열일'하는 언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과연 '1등 신문'들다운 탄탄한 취재력이 빛을 발했다.
그 많은 '단독'들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들 언론이 현 정권의 실상 알리기에 앞장서는 데 대해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든다. 불과 며칠 만에 수십 개의 단독 기사를 뚝딱 만들어내는 능력 있는 언론사가 왜 지금까진 조용했을까.
이쯤 되면 의구심이 든다. 혹시 그 많은 '단독'들이 며칠이 아닌, 몇 년에 걸쳐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바꿔 말하면, 이미 오래전 취재를 마쳤음에도 보도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박근혜 정권이 시들어가는 기미가 보이자, 이제야 때가 되었다는 듯 내보내는 것 아닐까.
이런 의심은 나만이 아닌 모양이다. 31일 전현직 언론인이 모여 언론단체 시국선언을 하는 자리에서도 같은 지적이 나왔다. 이완기 민언련 상임대표의 말이다.
"최순실 게이트 국면에서 가장 잘못된,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게 언론입니다. 2011년 TV조선이 개국하면서 박근혜 의원을 TV에 출연시켰습니다. '형광등 100개를 켜 놓은 듯한 아우라'라고 했습니다. 그런 TV조선이 대통령과 측근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이에나 언론 그대로입니다. 죽은 고기를 뜯어 먹는 그대로입니다. 언론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순간에는 표변해서 양시양비로 어떻게든 권력을 유지하려 하려 할지 모릅니다. 또 다른 잘못된 권력을 찾아서 갈 것입니다."
만일 이미 내막을 알았음에도 묵인해왔다면, 그 언론은 더 이상 진실을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없다. 국정 농락을 가능케 한 공범 내지는 방조자로 불려야 맞다.
이날 시국 선언 기자회견에 참가한 윤창현 전국언론노조 SBS본부장은 "우리는 공범이었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대통령이 뭐라고 하면 그래도 대통령이니까 그게 사실인 줄 알고 열심히 받아쓰고 열심히 방송했습니다. 그게 사실이었습니까. 최 씨 일가가 무당 춤을 추는 거대한 인형극을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연극을 뉴스에 내보냈습니다. 그런데도 회사의 정치권력은 청와대와 척 지면 어렵다, 먹고 살기 어려워진다는 논리로 내부 기자들을 끊임없이 겁박했습니다."
과연 SBS만의 문제일 뿐일까. 시대의 죄인이 되기 전에 스스로 밝혀야 한다. 지금의 성과를 자축할 게 아니라, 과거의 침묵을 반성해야 한다.
언론이 쥐고 있는 칼날은 살아있는 권력을 정조준했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다 죽어가는 고기의 폐부를 들쑤시는 것은 이완기 대표의 말마따나 '하이에나 언론'이다.
당분간 보수 언론의 '단독 파티'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의 '연극'에 놀아난 데 대한 반성인지, 아니면 하이에나 언론의 재기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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