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사표 대신 동료 7명을 죽였다

[프레시안 books] <나는 오늘 사표 대신 총을 들었다>

1989년 9월 14일. '록키'로 불리던 조셉 웨스베커가 일터인 루이빌 중심가의 스탠더드 그라비어 빌딩에 도착했다.

반자동 소총 AK-47을 차고, 바지에 독일제 9밀리 권총 시그-자우어를 꽂았다. 더플백에는 반자동 기관권총 MAC-11 두 정, 38구경 스미스 웨슨 리볼버 한 정, 그리고 AK용 총알 다섯 클립을 넣어두었다. 약 30분 만에, 웨스베커는 동료 7명을 사살했고, 20명 이상에게 총상을 입혔다. 미국을 두려움에 떨게 한 일터 학살은, 임무를 완수한 웨스베커의 자살로 막을 내렸다.

웨스베커는 조울증 환자였다. 하지만 조울증 환자 중 극단적 행동을 하는 이는 극소수다. 미국인 여섯 명 중 한 명은 언젠가 조울증을 앓는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사건 후, 적잖은 피해자들조차 웨스베커를 부분적으로 변호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과도한 노동에 시달렸다. 보통 한 주에 25~30시간가량 초과 근무했다. 웨스베커가 맡은 업무는 일종의 인쇄 라인 지휘 본부격으로, 다른 노동자가 기피하는, 높은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일이었다. 동료 사이에서 그가 왕따의 대상이었다는 점도 스트레스의 한 원인이었다.

위험 신호에 불을 붙인 건 경영진의 무자비한 결정이었다. 웨스베커는 오랜 기간 업무 스트레스를 호소하며 업무 전환을 요청했다. 회사는 거부했다. 동료 누구도 웨스베커를 돕지 않았다. 웨스베커는 결국 병가를 내야만 했다. 1989년 2월 2일, 회사는 병가 후 복귀한 웨스베커의 보직을 전환하는 대신, 장기 근무 불능자로 분류하고 임금의 40%를 삭감했다. 회사를 나가라는 뜻이었다.

회사가 이처럼 막나갈 수 있었던 원인은 무력화한 노동조합에서 찾을 수 있다. 경영진은 정리 해고를 밀어붙였고, 요구에 굴복하지 않으면 공장을 폐쇄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무노조 공장이 회사의 목표였다. 노동자들이 무더기로 해고되고, 임금은 8년간 동결됐다. 노동자의 업무 환경을 돌보지 않는 무자비한 환경이, 한 노동자의 폭발을 낳은 셈이다.

이 사건을 포함해 콜럼바인 고등학교 학살 사건, 오클라호마 우체국 분노 살인 사건 등을 정리하고 원인을 추적한 <나는 오늘 사표 대신 총을 들었다>(마크 에임스 지음, 박광호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는 이른바 '레이건 혁명', 즉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광풍으로 인해 황폐화한 미국이 분노 살인을 낳았다고 강조한다. 웨스베커의 사례는 상징이었다. 이전 누구도 일터가 학살의 무대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회사를 파괴하려 했다. 이런 맥락에서 웨스베커가 쏜 총알들 가운데 단 한 발도 '난사'였다고 말할 수 없다. 각각의 직원은 그를 짓밟은 추상적인 회사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개인의 광기로 치부하는 사적 복수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며 명쾌하고 끈질긴 통찰을 남겼다. 신자유주의화가 어떻게 개인을 극도의 분노 상태로 이끄는가에 관해 책은 충실한 설명과 적절한 예시로 독자를 설득한다.

1980년대 들어 미국에서 노조의 힘은 극적으로 떨어졌다. 1941년 AT&T 직원 안내서는 "이것(퇴직 연금)과 기타 복지 정책을 통해 회사는 근속 기간 내내, 그리고 그 이후로도 직원들을 '돌보는 일'에 힘쓴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회사는 자연히, 직원들이 사업을 진심으로 염려하고 회사의 평판과 지속적인 성공에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1996년, 이 회사의 입장은 변했다. 인사부 부대표 제임스 메도우스는 "AT&T에서 우린 전 직원을 비정규직화한다는 전체적인 구상을 강화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과거 미국의 고용 시스템은 조직에 관한 노동자의 충성심을 끌어올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노동자가 행복해야 회사를 내 것으로 인식하고, 그로 인해 생산성이 오를 거라 기대했다. 레이거노믹스는 이를 부정했다. 이제 직원은 비용이 됐다. 불황을 이겨내기 위해 사람을 더 잘라야 한다고 사회는 가르쳤다. 직원을 버리고, 최대한 쥐어짜라는 이데올로기가 미국을 뒤덮었다.

압도적 다수가 자신의 최고 이익과 회사의 그것을 동일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건 혁명으로 기업 문화의 우선순위가 재규정되어 최저의 지출로 최대한 빨리 직원에게서 많은 이윤을 짜내는 게 가능해짐에 따라, 노사 관계는 틀어졌다. 이런 경향은 가속 일로를 걸었고 특히 조지 W. 부시의 재임 시절 심해졌다.

▲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책임을 무한대로 늘렸다. 기댈 곳을 잃은 개인은 절박해졌고, 과도한 스트레스에 노출됐다. 우리 모두는 언제고 폭발할지 모르는 파편화된 존재가 되었다. ⓒpixabay.com

이와 관련해 책은 19세기까지 유지된 미국의 악명 높은 노예 제도와 현대 고용 체제를 비교해 독자를 깨달음의 영역으로 데려간다. 이 내용을 압축한 2장 '노예제의 평범성'은 이 책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저자는 묻는다. 그처럼 처참한 인권 유린이 행해진 시대에, 왜 노예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자신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겨졌는데도 말이다. 노예가 특별히 더 순종적이어서가 아니었다. 사람은 원래 그랬다. 이슬람 문명 전성기, 북아프리카는 많은 유럽인을 노예로 삼았다. 그들 역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리스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노예 반란은 극히 드물었고, 어느 누구도 그게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 노예 심리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하다.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장소, 곧 직장, 인간 관계, 가정, 학교 같은 곳에서 나타난다. (…) 시간이 흐르면서 노예제는 돌연변이를 일으켜 왔고 현대적 조건에 적응해 왔다.

저자는 현재 일터에서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하루하루 직업 윤리에 충실하기 위해 스트레스를 견디는 우리 자신을 노예와 비교한다. 몇몇 노예가 반란을 시도하긴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는 놀랍게도) 오히려 많은 노예가 주인을 지키기 위해 동지와 맞섰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이들, 노동 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이들, 시간당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이들을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바라보는가. 일터만으로 국한할 필요 없다. 학교 운영에 학생의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는 이, 우리 사회에도 인종 차별이 만연하다고 주장하는 외국인 노동자, 페미니즘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성에게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는가.

실상 그들과 우리의 처지는 다르지 않음에도, 우리는 '지금 이 상황'을 지극히 정상으로 여기고, 그들을 이상한 이로 매도한다. 이는 반란하고 탈출하려는 노예를 두고 '검둥이의 질병' 정도로 이해한 당시 미국 백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상황 논리에 너무나 쉽게 적응한다(굴복한다). 앞서 웨스베커가 직장 내 왕따를 당한 이유는, 그가 노동 조건 개선을 회사에 요구한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동료들은 그를 혐오했다.

그(웨스베커)의 동료들은 조롱 받는 직원을 궁지에 몰았고 야만적으로 취급했으며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가 본질적으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기업의 폭력과 탐욕에 희생된 사람이었음에도 말이다. 한 직원이 웨스베커를 "미친놈"으로 부르도록 했던 것은 그가 자신의 일에서 정당함, 즉 남들은 요구하지 않은 무언가를 끈덕지게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노예들은 협력해 반란을 일으키기보다는, 외려 주인을 기쁘게 하려고 자신과 같은 계층의 반란자들을 공격했다.

이 지점에서 미국의 총기 규제가 느슨하기에 비극이 커졌다, 인터넷으로 인한 고립화가 개인의 복수심을 키웠다는 식의 주장은 설 자리가 없다. 이들 주장이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학살의 부분적 원인을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진정한 본질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저자는 신자유주의가 사람들을 극단으로 찢어놓으면서, 폭력이 일상이 된 사회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레이건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나라가 점점 계급과 인종을 따라 양극화되면서 중산층은 도심에서 벌어지는 학교 폭력에 무감하게 반응하게 됐다. 꼭 육체 노동자 노조가 분쇄되고 정부가 빈민 지원금을 삭감할 때 등을 돌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 중산층은 결국 레이건 혁명이 자신들에게도 등을 돌리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 폭력은, 예상과는 달리, 도심 학교들을 철저히 파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는 중산층 학교로 침투하고 있다.

지금도 미국은 분노한 개인들의 테러로 몸살을 앓는다. 흑인의 경관 공격, 학교와 일터에서 일어나는 학살이 마치 주머니에 든 송곳처럼 수시로 사회를 찌른다. 그런데, 한국이라고 과연 안전할까.

물론 우리 사회에서 개인이 총을 휘두르는 일은 없다. 하지만, 우리 역시 신자유주의 ‘혁명’이 이미 완수된 공간에서 일상을 견뎌가고 있다. 만연한 비정규직화, 과도한 노동, 정체되는 실질 임금, 과도하게 치솟은 생활비용으로 인한 고통은 대부분 국민이 공동으로 체감한다.

▲ <나는 오늘 사표 대신 총을 들었다>(마크 에임스 지음, 박광호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우리 사회에서도 이미 복수 범죄는 일상이 되었음을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적잖은 연쇄 살인마가 사회에 복수하겠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단순히 그들이 사이코패스였다는 사실만으로 이 사건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더 중요한 사례가 있다. 이미 우리는 2012년 여름, 직장 내 왕따에 불만을 품은 범인이 여의도 한복판에서 칼부림한 충격적 사건을 목격했다. 왕따는 이제 학교뿐만 아니라 우리가 속한 모든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 되었다.

우리 사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콜럼바인의 학살자들에게 분노하듯 "폭력적 게임이 문제였다"고 넘어가버리면 그만일까. 개인주의가 팽배해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식으로 넘어가버려도 되는 문제일까.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와 흉악범죄가 늘어났다는 말이 얼마나 진실과 가까울까. 어쩌면, 지금 우리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하는 "신자유주의의 병폐를 극복해야 사회가 건전해진다"는 말이 보다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적어도 저자는 그렇게 주장한다.

요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부당함의 경우, 그것이 아무리 엄청난 것이라 할지라도, 나중에는 너무나 분명해 보일지언정 당대에는 그렇게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조건에도 복종하고(적응하고) 그것을 정상이라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데올로기가 작동되면 우리는 부당함을 더 잘 받아들인다.

복종심은 우리의 운영 체제 안에 장착되어 현재의 기업 문화에 쉽게 스스로를 끼워 맞추며 노예 시대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개인이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굽실거리고 적응하는 능력은 대개 정상으로 정의된다. 이런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성공하려는 것은 정상이다. 반면 그에 맞서 들고일어나는 것은 비정상이다. (…)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 현대인들은 아프리카 노예들만큼이나 노예적이고 가슴이 아플 정도로 유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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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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