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 되기

[건축신문] 정체성의 정치에서 욕망의 정치로

사람들 일반적으로 소수자를 '신체적 또는 문화적 특징 때문에 사회의 다른 성원들에게서 차별을 받으며, 차별받는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한다. 즉 소수자란, 자신이 지닌 어떤 특징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주류/지배 집단으로부터 차별받는 비주류/하위집단 또는 그 구성원을 말한다. 이러한 소수자들은 역사상 존재했었고 어떤 시대에는 활발한 인간상으로 인정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억압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소수자를 사회적 약자, 혹은 수적으로 적고 피지배계급에 속하는 것 같거나 뭔가 수탈당한 존재 같은 등의 의미로 인식한다. 그래서 소수자를 약자나 패배자나 주변인으로 개념화하고 인정해 주자는 인식이 주조를 이룬다. 소수자 운동조차 인정투쟁이라고 개념화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필자는 소수자 운동의 등장을 목격하면서 소수자를 능동적으로 규정하려고 했다. 말하자면, 소수자를 주류에서 밀려나 있으면서 주류에 편입되려고 하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식으로 살아가려는 사람' '표준화를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좀 더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소수자는 표준화된 인간상으로부터의 거리에 의해 규정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이성에 근거하여 설정된 표준적인 근대 인간상은 바로 '백인–남성–어른–이성애자–본토박이–건강인–지성인–표준어를 쓰는 사람' 등으로 표상된다. 이성에 집착하는 이러한 표준적인(다수자적인) 인간상은 광기(욕망)를 배제하고 주변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차단하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유색인–여성–어린이–동성애자–이주민–환자–무지렁이–사투리를 쓰는 사람' 등의 소수자들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권력과 연결된다.

서구에서는 '68혁명' 이후에 이러한 소수자들이 좀 더 능동적인 주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68혁명은 바로 전통적인 노동자 계급에 기반을 둔 사회변화나 혁명에 대한 생각에서 더 나아가, 그런 계급개념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던, 그러면서도 사회 자체를 바꾸고 자신의 주변까지 바꾸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까지 바꾸고자 하는 새로운 흐름의 출발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흐름을 주도하고 나선 주체들이 바로 소수자 주체성을 들고 나온 사람들이었다. 68혁명을 통해서 매우 이질적인 다양한 주체들이 등장하였으며, 그 이후 신(新)사회 운동 속에서 '대중을 지도하는 지도부에 의한 사회변화'를 의심하며 자신들의 욕망에 근거하여 다양한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면서 자기 조직화를 해 나가려는 흐름이 폭발했다.

▲ 퀴어문화축제가 지난 6월 11일 서울광장에서 열렸다. 축제는 성소수자(LGBTAIQ)가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긍정하도록 응원하고, 다양성에 대한 화두를 사회에 던지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소수자 운동


현실에서 소수자는 자신들의 운동을 인권운동으로 개념화하거나 이름 붙인다. 국가가 폭력적으로 개인을 억압할 때 인권 문제(국가폭력의 피해자 문제)가 제기된다. 그런데 '인권 대통령'까지 나타나서 국가가 인권 개념을 포섭한 이후에는 그런 보편적인 인간이 권력에게 당하는 폭력보다는, 보편적인 인간에 가려져 있던 하위 인간들의 문제가 남게 되었다. 시민권이 없는 미등록 노동자들이나 다양한 이유로 차별을 받는 소수자들의 인권은 지금도 여전히 보장해야 할 것으로 인식되고, 소수자 운동들도 이러한 점을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서구의 '68혁명'과 같은 계기가 바로 1987년의 '노동자농민대투쟁'으로, 이것이 계기가 되어 민주화 과정이 진행되었다. 전통적인 부문 운동(노동 운동, 농민 운동, 여성 운동, 빈민 운동 등)이 1970~1980년대를 통해 활성화되었고, 1990년대에 들어 사회의 민주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1997년 타율적으로 IMF 위기를 맞으면서 노숙자부터 시작해서 비정규직 문제 등이 갑자기 분출했다. 이러한 흐름 위에서 그 후 다양한 주체들이 자신들의 욕망에 입각한 능동적인 움직임을 드러내려는 활동과 함께 소수자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소수자 운동은 다른 대중 운동, 노동자 운동이나 농민 운동처럼 많은 수의 사람이 참여하는 운동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매우 적은 사람의 운동만으로도 운동에 직접 나서지 않은 그 아래 단위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변하는 것이다. 소수자 운동은 전통적인 운동처럼 적을 깨부수고 대체권력을 만들려는 눈에 보이는 운동이 아니라, 더 많은 부분이 눈에 보이지 않는 운동으로 이뤄진다.

대학생들이 동성애 담론을 퍼트리고 '끼리끼리' 같은 레즈비언 인권 운동 단체들이 활동하면서 매스컴에 나와서 논쟁을 벌이니까, 갑자기 일반인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게이바'의 불이 환하게 켜지고, '레즈바'도 생기기 시작한다. 전에는 어두워서 일부러 찾아가도 어딘지 찾지 못했지만, 지금은 자신들을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까지 걸어놓고 있어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찾을 수 있다. 그런 운동이 있으니까 동성애자들을 등치는 조폭들의 활동도 급속히 사라졌다.

실제로 장애인운동이나 성소수자 운동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은 수적으로 적다. 그런 의미에서 소수자 운동은 매스(대중, 다수) 현상으로서의 운동이 아니라 쟁점을 제기하고 그걸 퍼뜨려나갈 때, 그 하위문화 속에 숨어 있던 사람(현상)들이 스스로를 끌어 올리면서 활동을 자연스럽게 해나가게 된다. 실제로 운동이 이런 식으로 전개되면서 사람들의 실생활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소수자 운동에서는 주체성 변화를 동반하면서 나아가는 측면과, 물밑에 있던 것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전에는 인식하지 않았던 것들을 사람들이 알게 되고, 관계 맺기를 다르게 해나가는 그런 측면이 중요하다.

소수자 되기

그런데 소수자 운동을 통해서 전개된 소수자 정치를 흔히 '정체성의 정치'라고 한다. 다수자 논리 속에서 소수적인 것을 드러내고 확인하는 커밍아웃 과정과 그 위에서 운동이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정체성의 정치는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특정 소수적/부분적 정체성으로 그 인물의 성격 전체를 특징지으려 할 때는 위험하다. 정체성의 정치가 위험한 것은 '우리를 인정해 달라'는 식의 인정논리로 가거나, '우리의 것을 건들지 마라'는 식의 '게토(ghetto)화' 방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소수자들은 항상 게토화의 위험에 있다.

게토화를 벗어나는 것은 닫힌 욕망에서 열린 욕망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욕망이라고 할 때는 프로이트와 라이히가 말하는 신체에 붙박인 성충동뿐 아니라,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다양하고 사회적인 광범위한 욕망을 생각하게 된다. 다양한 충동들을 포함하는 다양한 흐름, 즉 욕망의 흐름을 따라 펼쳐나가는 정치를 생각하려는 것이다. '정체성의 정치에서 욕망(특이성)의 정치로' 말이다.

소수자와 관련하여 제기하는 욕망의 정치는, 욕망의 흐름을 다수자적 관점에서 제어하려 하지 않고 흐르는 대로 놔두면서, 소수자가 스스로 관리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즉 욕망의 정치는 정체성을 넘어서 '다른 것 되기'로 가자는 것이다. 여기서는 '다수자를 기준으로 하는 표준화 되기'를 거부하는 것을 넘어서, 소수자들 내부의 차이들을 오히려 긍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 긍정 위에서 '소수자 되기'는 동일성을 지향한 결과로 나타나는 표준화한 방식과는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표준화하는 방식은 공통성을 끄집어내어 동일화하여 욕망의 형식을 단조롭게 만든다. 이에 반해서, 소수화하는 방식은 차이를 더욱더 구분해내면서 점점 다른 것들 사이에 소통 통로를 만들어 나감으로써 색다른 욕망 형식들을 발명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수자 세계가 분리와 차이를 오히려 강조함으로써 만들어낸 다양한 표현과 다양한 욕망 형식은 사회 전체를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수자보다 소수성을 문제 삼고 흩뿌리기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가는 방식에서, 소수자라는 사람(인물, 정체성)보다는 소수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특정한 소수자를 확인하고 정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지닌 소수성을 문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 또한,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소수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개인의 신분증명서 같은 소수자 개념이 아니라 개인들이 지닐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소수성에 주목하고 그것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결국 소수자 운동이나 소수자 문제에서는 소수자 되기가 중요하다고 본다. 소수자 자체는 무엇인가? 바로 색다른 욕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인 것이다. 표준화되지 않은 어떤 것들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으며, 그것을 드러내면서 색다른 관계들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소수자의 속성들을 부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드러내면 다른 사람과의 접속 범위와 강도, 그리고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동성애적 욕망이 나타날 때 그것을 남근(男根)주의적 전망 속에서 억압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표현하면 색다른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 물론 소수적 속성 자체를 특권화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적인 속성들을 흩뿌리는 것(분자화 과정, 미분화 과정, 미분적 특이화 과정에 착수하는 것)이 소수자 되기의 방식일 수 있다.

주변화된 다양한 소수자의 자기 주체성 찾기, 자기 정체성 확인과 더불어 다수자의 소수자 되기를 통해 새로운 자유의 공간을 만들어 가는 방향을 새로운 사회로 나가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소수자 되기는 다수자의 권력화를 깨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집중화, 초(超)코드화 하는 방향에 대항해 미분화와 분자화를 하면서 욕망을 해방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그 결과는 예를 들어, 자본주의적 이윤추구 양식에만 준거하여 다양한 표현 양식들을 압연(壓延)하는 방식에 제동을 거는 것이 될 것이다. 다른 것(적, 악?)을 때려 부수고 무언가를 공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게 가는데도 연결되면서 즐겁게 함께 가는 방식을 생각할 수 있다. 개별고유성/특이성을 긍정하면서 어떻게 소통의 폭을 넓힐 수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질적인 주체들의 복수적 결합을 생각할 수 있다. 표준화된 주체에서 벗어나 소수자 되기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소수자 안의 소수자를 향해서, 소수성 안의 소수성을 향해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방향이 바로 다양성을 내적으로 증진하고 사회를 풍요롭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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