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칠콧 보고서'로 불리는 영국의 이라크전 조사위원회의 공식 보고서가 6일(현지시간) 공개됐다.
존 칠콧 조사위원장은 보고서를 발표하며 지난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참전한 영국 토니 블레어 행정부의 결정에 대해 "잘못된 정보에 의한 침공이었으며 외교적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지지 않고 참전했다"며 "총체적으로 잘못된 판단에 의한 전쟁으로 참전 목적도 달성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지난 2009년 설치된 위원회가 7년 간의 조사 과정을 거쳐 이 같은 결론을 내려 이라크전 참전은 영국 외교정책 사상 최악의 실패 사례로 공식화됐다.
2003년 당시 영국의 참전을 결정한 토니 블레어 총리도 '부시의 푸들'이란 세간의 오명을 씻지 못하게 됐다. 영국은 2003년 3월부터 시작된 이라크 침공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한 나라다.
칠콧 위원장은 "영국은 (이라크를) 무장 해제시키기 위한 평화적 수단을 다 써보기도 전에 이라크 침공에 참여하는 선택을 했다. 군사적 행동은 최후의 수단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참전 근거도 부실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칠콧 위원장은 "블레어 전 총리는 사담 후세인의 위협을 과장했다"며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수용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밝혔다.
대량살상무기 보유 의혹을 빌미로 침공한 이라크에서 미국과 영국은 끝내 그 근거를 발견하지 못해 '실패한 전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칠콧 위원장은 이어 "분명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침공이 야기할 결과들이 과소평가됐다"며 "후세인을 제거 이후 계획이 완전히 불충분했다"고 했다.
그는 "이라크 참전 여파로 테러리스트가 나타나고 알카에다 등이 영국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기관의 경고가 있었지만 블레어 총리는 이를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전후 이라크는 내전과 혼란으로 이슬람국가(IS) 등 극단적 무장단체들이 창궐했으며 이는 전세계를 테러 공포에 노출시키는 심각한 부작용으로 이어졌다.
또한 영국이 이라크전에 개입한 2003년 3월부터 2009년 7월까지 영국군 179명이 사망했으며, 이라크인은 15만 명이 사망하는 등 무고한 피해도 속출했다. 칠콧 위원장은 "이라크 국민들이 엄청나게 고통을 받았다"고 말했다.
블레어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과 함께" 부시에게 서한
보고서에는 블레어 총리가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도 공개됐다.
이에 따르면 이라크 침공 8개월 전인 2002년 7월 28일 서한에서 블레어 총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과 함께 하겠다"며 부시 대통령의 외교정책에 강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또한 2003년 3월 침공 당시 보낸 서한에서 블레어는 "자유민주주의와 법적 질서와 관용에 대한 우리의 가치를 퍼뜨릴 수 있다. 다음 세대를 위해 국제적 우선순위를 정의하게 되는 때"라고 이라크 침공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침공 3개월 후인 6월 2일자 서한에서는 "우리가 준비됐는지 모르겠다"며 "우리가 무너진다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복잡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고서 공개 직후 블레어 전 총리는 성명을 통해 "변명 없이 당시 있었던 어떤 실수에 대해서도 모든 책임을 지겠다"면서도 "이 보고서 공개로 내가 이라크에 침입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기만 행위를 했다는 일간의 의혹들이 잠재워지기를 바란다"고 발뺌했다.
그는 "사담 후세인을 타도하기 위해 군사행동을 취한 내 결정에 대해 사람들이 찬성하든 반대하든, 나는 선의에서, 또 이 나라에 최선의 이익이 된다는 신념으로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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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콧 위원회는?
영국의 원로이자 조사위원회를 이끈 존 칠콧 경의 이름을 따 '칠콧 보고서'로도 불리는 이라크전 조사위원회의 최종 보고서는 260만 단어, 총 12권으로 구성됐다.
2009년 고든 브라운 총리의 지시로 설치된 조사위원회가 지난 7년 간 150여 명의 진술과 15만 건에 달하는 문서를 검토한 것을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과정에서 기밀문서의 공개 범위를 둘러싼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각에선 블레어 전 총리를 전범재판에 회부하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지만, 위원회는 이라크전 참전 대한 법적인 판단은 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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