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한국전쟁 참여한 당사국이었다"

[인터뷰] 남기정 서울대학교 교수 ① '기지 국가' 일본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6년이 지났다. 남북은 여전히 극한 대치 중이고 당시 동아시아에 펼쳐졌던 국제 정세 역시 별로 변화된 부분은 없어 보인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미국과 중국은 여전히 동아시아를 두고 긴장 관계에 놓여있다.

그런데 미국과 중국 외에도 한국전쟁에 적극적으로 결합했던 국가가 있었다. 바로 이웃 나라 일본이다. 일반적으로 일본이 한국전쟁 특수로 단숨에 경제 부흥을 이뤘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일본은 전쟁 기간 중 기지 역할을 하며 전쟁에 참여했던 '당사국'이었다.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의 남기정 교수는 최근 펴낸 <기지국가의 탄생 : 일본이 치른 한국전쟁>(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 일본이 미군의 핵심 거점 기지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남 교수에 따르면 한국전쟁 막바지인 1953년 1월 일본 내 미군기지는 무려 733개에 달했다. 이들 주일 미군 기지는 전쟁을 위한 전진기지, 병사 및 물자 수송의 역할을 하는 중계기지, 물자 보급과 훈련 및 병사 휴양을 위한 후방 기지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전쟁 기간 중 주일 미군 기지로부터 한반도로 약 100만 번 정도의 출격이 진행됐으며 투하된 폭탄은 70만 톤에 이르렀다. 인천 상륙 작전을 위한 병사 1만 명이 수송되기도 했으며, 원산 상륙을 위한 기뢰 제거(掃海) 및 미군 수송에 약 8000명의 일본인이 동원됐다. 이는 6.25에 참전한 미국 등 16개 국가 중 6위에 해당되는 규모였다.

남 교수는 일본이 한국전쟁에서 이같은 역할을 수행하면서 '기지국가'의 면모를 갖춰갔다고 밝혔다. 세계 2차대전 이후 일본은 평화헌법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평화국가'라고 자부해 왔지만, 그 실체는 '기지국가'였다는 것이 남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기지국가에는 평화헌법과 미일 동맹이라는 모순이 동거하고 있다"며 "일본의 좌파 진영은 미국의 일본 주둔을 미국에 의한 일본의 식민지화로 받아들이지만, 미군 기지는 일본 국민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결과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은 한국전쟁의 결과 얻어진 것이었다. 남 교수는 "일본이 전쟁에 관여한 방식 때문에 생긴 자장이 전후 국가의 형성과 운영에 어떠한 힘으로 작용했는지에 대해 고찰하지 않으면 전후 일본이 국가로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주민들이 (기지 때문에) 고통을 감내하는 구조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한국전쟁의 휴전체제 속에 편입된 현재의 구조를 깨지 못하는 한 지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서 결국 "1953년 이후 60여 년간 동북아를 규정하고 있는 휴전 체제를 깨지 않는 한 일본의 기지국가 탈피도 불가능하다"고 내다봤다.

인터뷰는 지난 20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편집인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프레시안>은 남 교수의 인터뷰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6.25전쟁 66주년을 앞두고 <기지국가의 탄생 : 일본이 치른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펴내셨다. 한국전쟁과 일본의 상관관계에 대해 널리 알려진 사항은 막대한 전쟁 특수로 일본이 단숨에 경제 부흥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이다. 2차 대전 패전으로 폐허가 된 일본 경제가 단숨에 일어나는 결정적 계기였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 보니 6.25가 일본에 미친 영향은 단순히 경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상 일본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 미국에 이은 제2의 전쟁 당사국이었던 것이다. 책에 따르면 6.25 막바지인 1953년 1월 현재 일본 내 미군기지가 무려 733개에 이르렀다. 이들 주일 미군 기지는 전쟁을 위한 출격기점으로서의 전진기지, 병사 및 물자 수송의 중계기지, 물자 보급과 훈련, 병사 휴양을 위한 후방기지 역할을 했다. 즉 주일 기지는 미국의 전쟁 수행을 위한 핵심 거점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주일 미군 기지로부터 한반도로의 출격은 약 1백만회, 투하된 폭탄은 70만톤에 이르렀다. 또한 원산 상륙을 위한 기뢰 제거(掃海) 및 미군 수송에 약 8천명의 일본인이 동원됐다. 사실상 전쟁 수행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이는 6.25에 참전한 미국 등 16개 국가 중 6위에 해당되는 규모였다. 이 때문에 초대 주일 미 대사였던 로버트 머피는 "일본이 없었다면 미국은 한국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이 책은 소개하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일본은 평화헌법을 내세워 스스로를 '평화국가'라고 자부해 왔다. 하지만 이 책 <기지국가의 탄생>은 1945년 이후 일본의 실체를 '기지국가'라고 규정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문제의식이 눈에 띄었는데, 우선 기지국가라는 개념이 어떤 것인지 소개해주신다면?

남기정 : 책에도 언급돼있지만, 제가 사용하는 '기지국가'의 개념은 '국방의 병력으로서 군대를 보유하지 않고 동맹국의 안보 요충에서 기지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집단안전보장의 의무를 이행하고, 이로써 안전보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국가'를 의미한다.

여기서 '국방의 병력'이란 국방군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일본의 전후 국가가 평화헌법이 규정한 제약 하에 놓여있음을 뜻한다. '동맹국의 안전 요충 지역에서 기지의 역할'이라는 부분은 미일 안보조약의 의무에 충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기지국가에는 평화헌법과 미일 동맹이라는 모순이 동거하고 있다. 나아가 기지국가라는 실체를 평화국가라는 외피가 덮어씌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의 좌파진영은 미군의 일본 주둔을 미국에 의한 일본의 식민지화로 받아들인다. 식민지의 표상이 군사 기지라는 것이다. 실제 미군기지와 관련된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일본이 자주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고 기지 주변의 주민들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구조 속에 있다.

이는 주일미군 기지가 일본 국민 일반의 의사에 반하여 강요된 것으로, 일본과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이익을 관철하는 거점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기반한 주장인데, 이러한 측면이 '기지국가'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미군기지는 미국에 의해 강요된 것이기도 하지만 일본 국민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은 한국전쟁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여전히 휴전의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따라서 주민들이 고통을 감내하는 구조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휴전체제 속에 편입돼있다는 현재의 구조를 깨지 못하는 한 지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무턱대고 미군 기지는 일본을 떠나라고만 이야기할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1953년 이후 60여 년간 동북아를 규정하고 있는 휴전 체제를 깨지 않는 한 일본의 기지국가 탈피도 불가능하다.

저는 원래 석사 때부터 한국전쟁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한국전쟁이라고 하면 당사자는 남북한이고 여기에 미국, 중국이 참전했고 소련의 스탈린은 중국을 뒤에서 밀어줬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일본에 대한 인식은 빠져있다. 결과적으로만 일본이 가장 이득을 봤다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인식의 전부다.

일본은 실제 한국전쟁 기간 동안 '기지'로서의 가치를 높이면서 독립을 이뤄냈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론적인 이야기만 나와 있지, 일본이 전쟁에 관여한 방식 때문에 생긴 자장이 전후 국가의 형성과 운영에 어떠한 힘으로 작용했는지에 대한 고찰은 없었다. 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규명해내지 않으면, 전후 일본이 국가로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일본을 평화국가라기보다는 기지국가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이 책의 논지는 2000년 도쿄대 박사학위 논문의 내용을 확대, 보완한 것이라고 들었는데, 당시 일본에서 논문이 나왔을 때 일본 학계의 반응은 어땠나?

남기정 : 학위논문으로 발표됐기 때문에 일본 안에서는 별다른 반향은 없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이 책의 내용을 약간 거북해한다. 특히 '기지국가'라는 단어는 평화 운동을 하는 쪽에서도 거북해하는 용어다. 이들은 스스로를 전후에 평화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생각하고, 현실적으로도 평화국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거기다 대고 제가 현실은 '기지'로 연명했던 국가라고 이야기하니까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일본에서는 한반도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이 없는 것 같다. 1931년 군부의 독주로 시작된 만주사변이나 중일 전쟁은 잘못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이전의 한국과 대만에 대한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별로 그런 생각이나 입장이 없어 보인다. 소위 일본 지식인들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거나 사죄하지 않고 있다. '기지국가'론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부분도 이러한 일본 지식인들의 사고와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남기정 : 관련이 있다고 본다. 2차대전 이후 일본에서는 평화문제가 논의됐는데, 일본 사회과학계의 '천황'으로 불리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 등 일급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담화회'가 만들어졌다. 이후 여기에 포함된 지식인들은 당초 미국만이 아니라 소련과 중공 등을 포함하는 전면 강화(講和)와 외국의 군사 기지를 절대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이것이 '평화문제담화회'에서 지난 1950년 1월 15일 발표한 '강화 문제에 대한 평화문제담화회 성명'의 내용인데, 여기서 마루야마 마사오, 우카이 노부시게(鵜飼信成),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 등 세 명의 지식인이 굉장히 큰 역할을 했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식민지 시기 조선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 <기지국가의 탄생 : 일본이 치른 한국전쟁>(남기정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우선 마루야마는 약관 26세에 도쿄대 조교수에 임용된(1940년) 소장학자로 당시 모든 실무를 담당했던 스타급 연구자다. 그는 식민지 시절 경성(현 서울)에서 군 복무를 했다. 이 때의 경험 때문에 반군국주의 사상을 갖게 됐다는 이야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병사 시절에 자기를 때렸던 상사가 있었다고 한다. 본인이 직접적으로 조선 민중을 접한 적은 없었지만, 조선의 식민지 지배가 무엇이냐는 생각은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어렸을 때 겪었던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 학살이 있었고 이에 대해 굉장히 마음 아파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또 아버지가 오사카 아사히 신문의 조선 특파원이어서 여러 접점 속에서 조선이 머릿속에 있었는데, 이를 완전히 지워버린 상황에서 평화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웠다.

아베 요시시게는 평화문제 담화회에서 원로급에 속했다. 당시 담화회를 두루두루 아우르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경성제국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

우카이 노부시게도 마찬가지로 경성 제국대학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다. 그는 이후 도쿄대학교에 사회과학연구소가 만들어질 때 참여했던 교수 중 하나다.

실제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다가 도쿄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교수가 된 사람이 꽤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조선에 대한 인식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이들은 일본에 들어와서 조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조선에서 자신이 열심히 노력했다는 일종의 '그리움'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있지만, 조선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은 없다.

즉 이들은 굉장히 선의에 찬 제국주의자로서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잔혹한 식민지 지배자의 모습은 아니다. 이들은 조선 민중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조선 근대사에 대한 연민의 감정도 있다. 하지만 조선의 식민 지배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은 없다.

그런 상황에서 한반도가 미소 냉전의 최전선이 되고, 이데올로기의 복잡한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전쟁까지 터지니까 평화를 제1의 가치로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조선이 굉장히 복잡한, 가치판단을 하기 싫은 대상이 돼버렸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잠정적으로, 의식적으로 그만두고 자기 문제에 골똘하게 되는 현실이 벌어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조선의 식민지 지배 문제에 너무 깊이 관여하면 이데올로기적인 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진흙탕 싸움에 빠져들기 때문에 평화문제를 논의하는 장을 만들기가 어려워지는 일본의 구조도 이들의 의식 행태에 영향을 미쳤다.

프레시안 : 이들이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를 생각하지 못한 측면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일종의 '자기 기만'도 있는 것 아닌가? 일본이 한국전쟁은 물론 베트남전쟁의 발진 기지 역할을 했음에도 평화를 이야기하고, 조선 지배에 대한 책임이 있으면서도 그 부분은 아예 제외시켰다는 것은, 다소 이해하기 힘들다.

실제 일본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공론장이라고 하는 잡지 <세카이>에서 조선 문제를 다룬 것은 해방 직후인 1945년 말에 한 번 있었고 이후에는 10여 년이 지난 1956년에 거론될 정도라고 들었다. 1973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납치 사건, 그리고 한국 민주화 세력의 유신 반대 투쟁을 접하고 나서야 일본 지식인들이 그나마 한국에 관심을 가졌다고 하던데,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기본적으로 일본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른바 '평화 의식'이라는 것이 현실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던 것 아닌가?

남기정 : 전쟁의 현실에서 몸을 빼면서 전쟁의 기원이랄까, 식민지 지배라는 전쟁의 기원에 대해서도 판단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을 기지국가로 만들어버린 한국전쟁

프레시안 : 이 책을 통해 한국을 비롯해서 미국, 일본, 중국, 대만 등의 관련 당사국들의 국가적 성격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규정됐다고 밝히셨다. 그러면서 당시 일본 내에서도 기지국가와 관련한 두 가지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우익에서는 기지국가가 아닌 정상적인 군사국가가 되자는 것이었고, 좌익에서는 평화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 사회주의 혁명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흐름이 당시, 그리고 이후의 일본 정치에 어느 정도의 현실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예를 들면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경우 경무장과 미일 동맹에 의존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우익에서는 전쟁 이전의 군사력을 지닌 정상국가로 돌아가는 움직임이 있었고 좌익에서는 전면 강화와 군사기지 반대를 외쳤는데, 이것이 현재의 보통국가 논의와도 이어지는 측면이 있는 것인가?

▲ 남기정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남기정 : 이어질 수 있다. 1950년대 초만 해도 요시다 시게루는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이른바 '요시다 노선'을 정착시키고 안착시킬 수 있을 정도의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여러 보수적인 정치인 중에 한 명이었다. 그가 자신의 구상을 현실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한국전쟁이 커다란 계기가 됐다고 본다.

만약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일본 안에서의 쟁투가 더 오래 갔을 수도 있다. 실제 1949년에는 일본공산당이 유효하게 정세를 끌어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일본 좌익운동은 약화됐다. 실제 일본공산당은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려는 이승만 또는 김일성의 소음모와 북한의 남침을 빌미로 대륙의 마오쩌둥(毛澤東)까지 몰아내려는 맥아더의 대음모 때문에 일본공산당이 당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는 좀 지나치게 정세를 읽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전후 이후부터 한국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좌익 쪽에서는 자기들이 하기 나름에 따라 요시다 정부도 타도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가지고 있었다. 요시다의 퇴진에 이어 혁명까지 밀어붙이지는 못하더라도, 조금 더 중도적 성향의 정치가로 세력을 바꿀 수 있을 정도까지는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군부를 비롯한 우익도 만만치 않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불과 5년 전에만 해도 힘을 가지고 있던 세력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대로 고꾸라질 사람들이 아니다'라면서 현실적인 구상을 가지고 재군비를 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 내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기지국가'로 모아지게 됐다. 실제 우익 내부만 보더라도 반미 우익보다는 친미 우익으로 정리되는 시기였다.

프레시안 : 일본 좌익을 좀 살펴보자면, 예를 들어 공산당 지도자인 노사카 산조(野坂参三)는 '미국 점령군은 해방군'이라면서 무장투쟁이 아닌 평화적 혁명 노선을 지향했다. 그랬다가 1950년 1월 6일 코민포름이 일본공산당을 비판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일본공산당의 의회주의 노선, 즉 평화 노선에 비판을 가한 것인데, 코민포름은 일본공산당에 적극적인 대미 투쟁에 나설 것을 요구했고 무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 배경에는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 성공과 10월 마오쩌둥의 승리가 있었다.

책에서는 일본공산당에 대한 대미 무장 투쟁 요구로 소련이 얄타 체제를 파기했다고 밝혔는데, 얄타 체제는 2차 대전 직후 핵무기를 갖게 된 미국이 독일에 대한 소련의 전쟁 배상 요구를 거부하면서 이미 유럽에서 깨진 것 아닌가?

남기정 : 그런데 당시 소련은 동아시아 내에서는 미국과 협력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부르주아 혁명이 먼저라는 생각으로 미국과 협력을 요구했고 소련은 일본공산당의 그러한 평화 혁명 노선을 용인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김일성에게 전쟁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는 한국은 전쟁이 나지 않는 상태로 관리하면서, 일본에서 발언권을 얻고 싶어 했던 스탈린의 구도였다고 본다. 만주지역에서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 남기정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그런데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이후 이러한 전략은 총체적인 변화에 직면했다. 특히 1949년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담판을 지으면서 상황이 크게 요동쳤다. 여기서 스탈린은 결심을 내리고 김일성에게 전쟁을 해도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 일본공산당에도 평화적인 방식이 아니라 무장투쟁으로 뒤흔들어 보라고 주문을 넣었다.

이에 같은 해 1월 12일 당시 미국 국무장관인 딘 애치슨은 미국신문기자협회(National Press Club)에서 연설을 통해 이에 대응했다. 그는 소련과 중국의 공산화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태평양에서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는 '애치슨 선언'을 발표했다. 이른바 애치슨라인이 그것이다.

프레시안 : 그런데 애치슨은 왜 여기서 한국을 제외했을까?

남기정 : 한반도를 제외했다기보다는, 일본을 통해 한반도를 확보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인다. 동아시아에서 방어 준비가 미처 되지 못한 상황에서 우선 유엔을 통해 정치적인 안전 보장을 하고 군사적으로는 오키나와를 통해 보호한다는 두 가지 전략을 가지고 한반도와 일본을 연계시킨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코민포름 비판이 나오니까 여기에 놀라서 일단 대응하자는 차원으로 나온 것이 '애치슨 선언'이라고 본다.

즉 한반도를 제외한 것이 아니라 방어하기 위해서 나온 선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걸 후세가 방위선에서 빠지는 것으로 해석한 측면이 있다. 실제 김일성도 이 선언을 전쟁을 하기에 좋은 신호인 이른바 '그린 라이트'로 인식하지 않았다고 본다.

일본에서 훈련한 한국군

프레시안 : 어쨌든 그 해에 한국전쟁은 벌어졌고 이 기간 동안 한국군 8000명이 일본 간토 지방에서 인천 상륙작전에 대비한 훈련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책에는 미국 극동군 사령부에서 일본군 6개 사단을 육성해서 한국전쟁에 투입하려고 했으나 1951년 3월 국무부의 반대로 무산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널리 알려진 사실인가?

남기정 : 새로운 내용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잘 드러내지 않았던 부분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공공연한 비밀처럼 이야기됐을 수 있지만 그 이후에 묻혀버린 역사가 된 것 같다.

실제 해방 이후 전쟁 직전에 한국군이 일본에서 와서 훈련을 받기도 했다. 한국전쟁 발발 전에 있었던 일로, 당시 신응균 대령을 단장으로 수십 명의 장교들이 일본 고텐바 기지를 비롯해 곳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훈련에 참여했다.

한국군 훈련을 위한 수송 현황을 보면 1950년 8월 19일부터 23일까지 총 17회, 73개 객차가 동원됐다. 객차의 수를 계산하면 나흘 동안 적어도 1만 명의 병사가 훈련 기지에 수송된 셈이다.

이후 한국군 파견 수송이 같은 해 9월 7~8일에 걸쳐 각 훈련 캠프의 주둔지로부터 요코하마 항으로 모아지는 양상을 보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들 부대는 당연히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에 투입됐던 것으로 관측된다.

▲ 인천상륙작전 당시 모습 ⓒ미 해군

그럼 왜 일본에서 훈련을 진행해야만 했을까? 일단 한국군을 전쟁에 투입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이들을 제대로 훈련시킬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일본은 과거에 마련해뒀던 시설도 있었고, 어떻게 훈련을 시키면 되는지에 대한 노하우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일본에서 훈련을 받고 한반도로 투입한다는 인식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대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백단'(白團)이라고 하는, 대만으로 건너갔던 구 일본군 장교들이 있었다. '백단'을 조직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 가운데에는 중일전쟁 기간 전범 리스트 3위에 올랐던 오카무라 야스지(북지나방면 사령관 및 지나파견군 총사령관)와 같은 거물급도 있었다. 이들은 1950년 1월부터 대만 장제스(蔣介石)의 '대륙반공'(大陸反攻)을 은밀히 돕고 있었다. 1969년 해산되기까지 ‘백단’의 일원으로 대만에 파견된 구 일본군 장교는 모두 83명이었으며 이들로부터 교육과 훈련을 받은 대만 군인은 6000명에 이르렀다.

결국 한국전쟁 직전인 1949~1950년 일본 내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자연스럽게 여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남한과 대만이 초기에 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들을 훈련시키고 도와주는 역할을 일본이 해야 한다는, 이에 대해 특별히 고민할 것도 없이 '당연한' 역할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었을 것이다. 미국이 직접 이들을 도와주지 못한다고 했을 때 일본이 이를 대신해야 한다는 구조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1950년 초부터 북한은 중국에 대해 국공내전에 참여했던 조선인 병사들을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했고, 이들 병사들은 1950년 4월, 6월 두 차례에 걸쳐 북한에 들어왔다. 그리고 6.25 남침의 핵심 병력이 된다. 미국의 역사가 브루스 커밍스가 6.25에 대해 1930년대 만주에서 벌어진 공산혁명세력과 친일군사세력 간의 재대결이라고 부른 것이 전쟁 발발 초기 상황이라면, 전쟁이 미중전쟁으로 확대되는 배경에는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동아시아에서 재현되고 있던 중일전쟁의 구도가 있었던 것이다.

(2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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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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