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살린 6.25? "전쟁 덕 톡톡히 봤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3> 한국전쟁, 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첫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국전쟁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 "공산군 물리친 이승만의 공? 잘한 게 없다"

[한국전쟁, 두 번째 마당] "북한, 전면전은 못할 것…한국전쟁 공포 때문"

프레시안 : 전쟁을 겪으며 가족과 헤어진 이도 많았다.

서중석 : 전쟁고아, 전쟁미망인, 이산가족이 많이 생겼다. 전쟁이 나면 (대개) 남성은 총알받이가 되고 여성도 큰 고통을 당하는데, 한국전쟁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가 1948년생인데, 우리 또래가 전쟁고아가 많이 됐다. 1950-1960년대엔 참 고아원이 많았다. 남-남 이산가족이 많이 수용됐고, 북한에서 내려온 어린애들이 부모를 놓쳐 수용된 경우도 많았다.

고아원은 원조 물자 운용과도 관련이 많았다. 원조 물자가 그리 많이 갔다. (많은) 고아원이 원조 물자로 운영되다시피 했다. (고아원 운영을) 외려 돈 버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일부 있었다. 참고로, 원조 물자 분배를 기독교 단체 등에서 대행한 것이 교인 수가 늘어나는 데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프레시안 : 정부 차원에서 전쟁고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있었나.

서중석 : 내가 문제 삼는 게 그거다. 이승만 정부도, 박정희 정부도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이 부모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운동을 (사실상) 안 했다. 조금이라도 민(民)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들이었으면,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1983년 KBS에서 이산가족 찾기 TV 생방송을 했다. 반응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KBS 건물 담벼락엔 헤어진 가족을 찾는 벽보가 수만 장 붙었다. 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한 사람이 10만 명이 넘었고 이 중 1만189명이 상봉했다.

당시 <신동아> 기자로 일하면서 매일 거기 가서 살다시피 했는데, 그때 생각을 많이 했다. '왜 이걸 10년 전, 20년 전에는 안 했나.' 반공 체제가 느슨해지고 긴장이 완화될까 두려워 안 한 것 아니겠나. 한국전쟁의 슬픈 이야기 중 하나다.

▲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진행되던 1983년 7월 여의도 KBS 광장. 헤어진 가족을 찾는 전단이 바닥에 카펫처럼 깔렸고, 가족을 찾는 이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연합뉴스

정전 후 30년 만에야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승만·박정희는 왜?

프레시안 : 전쟁을 겪으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도 변화가 생겼다고 앞에서 이야기했다.

서중석 : 전쟁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전쟁을 겪으며 변화된 여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조선 전기까지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조선 후기 이래 여성들의 경제권과 사회적 권익이 아주 약화되고 여성이 경제적으로 남편에게 종속되는 면이 강했다. 그런데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남성이 많이 죽고, 또 크게 다쳤다. 그러다 보니 여성이 집안을 꾸려야 하는 경우가 아주 많아졌다. 시부모를 봉양하고 시동생을 가르치고 자기 새끼들도 먹이고 가르쳐야 하는 문제에 직면한 거다.

이에 따라 여성이 가장으로 나서거나 그전보다 집안일에서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농촌뿐만 아니라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 부산 국제시장처럼 도시에 있는 큰 시장들에서도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건 전쟁 이후 변화된 여성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상당히 큰 포목점 같은 걸 하면서 시장에서 힘을 발휘했고, 그게 안 되면 명동에서 달러상을 하거나 극장에서 암표상이라도 했다. 남성들이 어쩔 수 없이 여성의 사회적·경제적 진출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점점 가게 된 거다. 그전과 비교하면 큰 변화다.

프레시안 : 다른 측면에서도 변화가 있었을 것 같다.

서중석 : 그런 것(경제적 진출 확대) 못지않은, 어떤 면에선 더 큰 게 성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여성에게 극도의 정절을 강요하는 사회가 있지 않나. 우리 사회에도 그런 것이 조선 후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있었다. 여성이 정조를 뺏기면 자살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고, 싫어하는 남성이라 하더라도 그 남성이 윽박질러 성관계를 맺으면 결혼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풍조까지 있었다. 그만큼 여성의 성이 무시당했다.

자주 생각나는 사례가 있다. 일제 때 사회주의 양대 세력이 있었는데, 그중 한쪽 활동가의 부인을 반대편 사회주의자가 강제로 욕보인 일이다. 이 일로 그 여성은 자살했다. 난 그 여성이 목숨을 끊은 건 (여성이 성적으로 치욕을 당하면) 자살해야 한다는 풍조를 따른 건 아니라고 본다. 그 여성이 그 정도 수준은 넘었을 거라고 본다. 문제는 반대편 사회주의자다. 사회주의자라면 근대적인 연애 사상을 갖고 성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게 사고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가장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여성을 굴복시키고 욕보임으로써 상대 파벌을 욕보이고 굴복시키겠다는 식의 사고를 하고 여성에게 그렇게 했다. 이런 게 한 시대의 분위기를 잘 얘기해준다. 한국 사회가 그런 면이 강했다. 그런데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

<자유부인>이 중공군 50만에 해당하는 적?

프레시안 : 그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는 어떤 것이 있나.

서중석 : 대표적인 게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이다. 1954년 정초부터 <서울신문>에 연재돼 아주 큰 사회적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대학 교수, 변호사, 문인, 그리고 작가 정비석 사이에 아주 재미난 논쟁이 벌어졌다.

제일 문제가 된 게 교수 부인이 연애를 할 수 있느냐(는 거였다). 한 서울대 교수는 '저속하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법대 황산덕 교수다. 황 교수는 '교수 모욕',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적'이라고 <자유부인>을 비판했다. <편집자>) (교수 부인이) 대학생하고 키스하고 품에 안고 댄스까지 했다는 건 도무지 용납될 수 없다는 게 보수적인 정치인과 여성들의 사고였다.

당국에선 (<자유부인>이 현실을 어둡게 묘사했다며) 정비석이 빨갱이들의 사주를 받고 그런 걸 쓴 것 아니냐고 추궁했다. 뭔가 사건만 생기면 빨갱이하고 연루시키는 게 그 당시 사회 분위기였다. 노동 문제만 생기면 다 '배후에 빨갱이가 있다'고 하고 (1960년) 마산의거가 생기면 또 '배후에 빨갱이가 있다'고 하면서 족치던 사회 아니었나. 정비석도 당국에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프레시안 :
참 특이한 사회였다.

서중석 : 그땐 그런 사회였다. (1956년) 영화로도 나왔는데, 이때는 검열에 걸렸다. 제일 문제가 된 게 키스신이었다. (대학생과) 포옹하는 장면, 댄스신도 풍기 문란이라고 문제 삼았다. 그런 이유로 상영을 못하게 해 사회 문제가 됐다. 그래서 나중에 일부 장면을 삭제하고 상영했다. (개봉 전날 정오까지 상영 허가가 나지 않았다. 키스신 등을 덜어낸 후에야 겨우 개봉할 수 있었다. <편집자>)

영화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 무렵엔 <자유부인>처럼 10만 명 넘게 본 영화가 별로 없었다. 소설도 참 많이 팔렸다. 그때는 5만 부 이상 팔린 책이 거의 없었다. <자유부인>하고 <얄개전>, <영어구문론>이 당시 5만 부를 넘긴 책들이다. (소설 <자유부인>은 14만 부나 팔렸다. <편집자>)

프레시안 : 키스신이 그렇게 큰 논란이 됐다는 게 요즘 세대 눈엔 신기하게 비칠 것 같다.

서중석 : 재미난 글이 있었다. <한국일보> 사설로 기억하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도대체 지금 우리 사회에 남 앞에서 키스를 하는, 무지몰각하고 비도덕적인 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개탄해 마지않는다.' 한마디로 키스신을 용납해선 안 된다는 거였다. 그 영화가 문제가 됐을 때 일부 국회의원은 물론 여성 운동을 주도하던 사람들도 상영을 반대했다. (여성 단체는 소설 <자유부인>이 논란이 됐을 때 '여성을 모독하는 작품'으로 <자유부인>을 공격하기도 했다. <편집자>) 참고로, 키스신이 들어간 최초의 한국 영화가 <자유부인>은 아니다. 1954년에 나온 <운명의 손>이라는 간첩 영화에 처음 등장했다.

전쟁과 여성, 그리고 1950년대

프레시안 : <운명의 손> 역시 <자유부인>을 만든 한형모 감독이 만들었다. <운명의 손> 여주인공이 입술에 담뱃갑의 셀룰로이드를 붙이고 키스신을 찍었음에도, 여주인공의 남편이 감독을 고소하는 한편 남자 배우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다.

서중석 : 1955년엔 박인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화여대생을 포함한) 70여 명의 여성을 농락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두 가지가 화제가 됐다. 하나는 이 여성들 중 이른바 '처녀'는 1명뿐이었다는 박인수의 말이다. 여대생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고, 이대생이라 하면 지위가 굉장한 사람으로 이해되던 때라 더 화제가 됐다. (사회 전반적으로) 성적으로 문란했는데도 여성한테만 아주 심하게 정조를 요구하던 때여서 더 그런 측면도 있다. 다른 하나는 1심 판결에서 판사가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박인수와 관계를 맺은 여성이 잘못한 거라는 판결이었다. (이런 논리에 따라 박인수는 1심에서 공무원 사칭 부분만 유죄 판결을 받고, 간음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편집자>) 물론 2심에 가서 뒤집혔다.

그런데 이 시기 재판에 다른 면이 있다. 여성들이 (간통죄 사건 재판정에) 그렇게 많이 몰려들어서 항의하고 소리를 질렀다. 법정에 못 들어간 여성들이 창문에 매달려 지켜보는 일도 있었다. 전 부흥부 차관 부인의 간통죄 사건 때는 여성들이 법정을 메우고, 차관을 욕하면서 부인을 응원했다. 부인이 무죄 선고를 받자 여성들의 함성 소리가 법정에 울려 퍼졌다고 한다. 여성들이 그간 쌓인 억울함을 그렇게 풀며 재판에 적극 참여하는 모습이 나타난 거다.

프레시안 : 그런 측면과 다르게, 대체로 이 시기 여성의 삶은 고단하고 사회적 지위 또한 여전히 낮지 않았나.

서중석 : 축첩이 굉장히 많던 시대였다. 조선 후기에도 그렇고 일제 때도 그렇고, 축첩을 남자의 위신을 세우는 방편처럼 여기는 아주 나쁜 풍조가 있었다. 전쟁으로 남성을 잃은 여성이 많았는데, 이들에겐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다. 성적 욕구를 해결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경찰, 군인, 지역 유지 등의 첩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미군을 비롯한 군대가 주둔하는 곳의 기지촌 여성들의 삶도 고단했다. 이렇게 몸을 팔거나 첩이 돼야 하는 기구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늘어난 것도 전쟁과 관련 있다. 그러나 전쟁을 거치면서 성적 자유가 확대되는 측면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댄스홀이 1950년대에 많이 퍼진 것도 그런 것의 하나로 볼 수 있다. (1960년대에) 5.16 정권이 한 일 중 하나가 댄스홀을 습격해서 거기 있던 남녀를 잡아들인 거였다. 깡패 소탕과 마찬가지로 그것(댄스홀 습격)을 사회적 개가로 이야기하고 그랬다. (정리하면) 전쟁을 거치면서 성적 자유가 확대된 것과 함께 여성의 정당한 항의가 늘어나고 그게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억울한 죽음, 그럼에도 시신조차 수습하기 어렵던 시대

프레시안 : 다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봤으면 한다. 지난 6월, 한 조사에서 고교생 응답자의 69%가 '6.25는 북침'이라고 답했다고 언론이 보도하자 박근혜 대통령이 이를 인용해 역사 교육이 문제라고 강조해 논란이 일었다. 박 대통령은 그 직후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6.25전쟁을 정확히 알리는 올바른 역사 교육을 반드시 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중석 : 고교생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학생 중에도 한국전쟁, 4월혁명, 6월항쟁 같은 현대사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역사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지만, 교사들이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칠 시간도, 여건도 마련돼 있지 않다. 근현대사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논란이 된 조사에서) 중요한 건 문항을 어떤 식으로 제시했느냐다. 남침, 북침은 어려운 단어다.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조사 결과가 사실과 다르게 나올 수 있는 거다. 그런 건데, (대통령이) 과잉 반응을 한 측면이 있다.

프레시안 : 매년 그랬듯, 올해도 어김없이 6월에 '잊지 말자 6.25'를 강조하는 보도가 적지 않았다.

서중석 : 이미 반세기 넘게 지났다. 역사적으로 한국전쟁을 어떻게 되돌아볼 것인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40-50년 전과 지금은 관심 분야가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현재 시각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잊지 말자 6.25', '상기하자 북괴 만행' 같은 것들은 1950-1960년대에 많이 나왔던 구호들이다. 아주 강렬한 색채의 그런 반공 구호들이 지금도 적절한 건지 고려해야 한다. (1987년) 6월항쟁 이전까지는 극우 반공주의가 위력을 발휘했다. 그렇기 때문에 '잊지 말자 6.25', '상기하자 북괴 만행'에 초점을 맞춰 한국전쟁을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 속엔 수십 년 동안 꽉 막혀 질식된 것들이 있었다. 뭐냐 하면, 한국전쟁 기간 동안 (학살 피해를 비롯한) 엄청난 수난과 고통이 발생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프레시안 : 1950-1960년대 분위기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줬으면 한다.

서중석 : 내가 어릴 땐 한국전쟁의 참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부모가 (전쟁 때) 죽었다는 집도 꽤 여럿 있었다. 집단 학살이란 말이 의미하듯이 한 마을에서 수십 명이 같은 날 죽은 경우도 많지 않나. 그런데 서로 얘기하기를 아주 꺼렸다. 동네에서 함께 제사를 지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하거나 곡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겁이 나서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는 일도 꽤 있었다.

프레시안 : 시신을 수습하다가 자칫하면 빨갱이로 몰릴 수도 있었기 때문 아닌가.

서중석 : 그렇다. 당장 어떻게 될까봐 못하기도 했고, 연좌제 때문이기도 했다. 연좌제에 걸리면 육사 입학이나 공무원 임용은 물론이고 1970년대에 중동 같은 해외에 나가는 데도 제약이 많았다. 연좌제에 걸린 사람 중 많은 수는 학살 피해 가족이었다. 군대와 경찰이 마구잡이로 죽였는데, (살아남은 가족들은 그 이후까지) 그 큰 고통을 당해야 했다. 1950년대엔 이런 문제에 대해 쉬쉬했다. 아무 말도 못했고 사회 문제화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6월항쟁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계기가 생기면서 비로소 보도연맹 학살을 비롯해 한국전쟁을 전후해 벌어진 그 엄청난 민간인 학살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등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됐다.

프레시안 : 그런 의미에서도 6월항쟁은 현대사의 분수령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한 가지 덧붙이면, 1950년대에는 '북괴의 학살 만행'이란 말을 그렇게 많이 했던 것 같진 않다. 이승만 대통령의 6.25 담화들을 찾아서 쭉 읽어봐도, 인민군 또는 북한 공산당의 집단 학살 만행을 언급하는 대목이 별로 없다. 집단 학살이 있던 직후였기 때문에 대통령 담화에도 그런 상황이 반영된 것 아닌가, 학살 만행을 언급하더라도 1970년대에 언급한 것과는 많이 다른 것도 그 때문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후에도 집단 학살이라는 말은 잘 안 쓰고 대개 '북괴의 학살 만행'이라고 불렀는데, 이게 집중적으로 교육된 건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다. (그에 앞서) 1968년에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게릴라들의) 청와대 습격 시도 사건, 푸에블로호 사건, 울진·삼척 무장 게릴라 침투 사건이 터졌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교육이 그렇게 심하진 않았다. 그런 교육이 집중적으로 이뤄진 건 유신 체제, 특히 1975년 인도차이나 사건(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 공산화. <편집자>) 이후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전쟁에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지도 여전히 논란거리다.

서중석 : 6.25전쟁이란 말에도 일정하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용할 수도 있다고는 본다.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났다는 건 상당히 중요하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브루스 커밍스는 그전부터 연속적으로 벌어진 사태가 더 큰 전쟁으로 확대된 게 한국전쟁이기 때문에 연속적인 남북 관계와 국지전의 연장선에서 전쟁을 봐야 한다는 걸 상당히 중시한다. 난 그렇진 않다고 본다. 6월 25일 이전에 벌어진 국지전과 6월 25일 발생한 전쟁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 그런 점에선 6월 25일에 전쟁이 났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남북한 간에만 전쟁이 벌어진 게 아니다. 작전을 주도한 건 미군과 중국군이었다. 화력은 물론 병력에서조차 미군이나 중국군이 국군이나 북한군보다 더 많았던 때가 많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빼고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가 참전한 국제전이었다. 내전의 성격도 지녔지만 발발부터 국제전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6.25전쟁이라는 표현도 그렇고 요즘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책을 보면 이런 국제전적인 성격이 너무 약하(게 다뤄지고 있)다. 그런 식으로는 이 전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도 한국전쟁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 한국전쟁이란 표현은 Korean War를 번역한 것이라는 점에서 조선전쟁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한국전쟁과 군대의 팽창, 그리고 박정희

프레시안 :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한국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했다. 박 대통령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여순사건 후 진행된 숙군(군대 내 좌익 색출) 과정에서 예편을 당한 박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현역으로 복귀했다. 이를 감안할 때 박 전 대통령이 부활할 수 있는 길을 한국전쟁이 열어준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서중석 : 어떤 글인가에서 '6.25전쟁이 박정희를 살렸다'는 논조로 쓴 걸 읽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이렇게도 해석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1948년 여순사건 이후 군 프락치 색출 작업이 진행됐다. 그 속에서 박정희가 남로당의 중요한 프락치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면서 박정희가 자수를 하게 되고, 그 후 중형을 선고받고 군복을 벗게 된다. 이것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 박정희의 모습이었다.

숙군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장교가 처형을 당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살아났다. 그 이유에 대해 많은 사람이 '박정희가 굉장히 기회주의적인 것 아닌가. 남로당에 들어간 건 (사회주의자였던) 형 박상희(5.16쿠데타의 주역인 김종필의 장인. <편집자>)의 죽음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쨌건 당시 남로당이 세력이 있어 보였기 때문인 것 같은데, 잘 안될 것 같으니 같이 일했던 남로당 프락치들의 인적 사항을 알려주고 혼자 살아난 것 아니냐'고들 한다. 또 백선엽·김창룡 같은 '만군파'(일제 때 만주군 출신 인사들. <편집자>)가 적극 구명한 덕에 살아난 것 아니냐고도 이야기한다. 그런 것들과 함께, 박정희가 살아난 건 가장 중요한 정보를 줬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만큼 사람이 자기 자신을 180도 바꾼 것이고 그것을 해당 기구에서 인정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 아니겠느냐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난 후 김창룡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중 하나가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를 복직시킨 것이었다. 안두희는 (전쟁 발발) 당시 감옥소에 들어가 있었다. 재판장에서 안두희가 '대한민국을 위해 김구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까 변호사가 '안두희는 국가에서 표창해야 할 인물'이라고 했고, 공판장 주변엔 '안 의사'라고 치켜세우는 벽보가 붙고 그랬다. 이승만 정부는 안두희의 계급을 올려주기까지 했다. 전쟁 발발 후 (군은) 안두희를 복직시키고 나중에 예편할 때까지 아주 편안하게 잘 모셨다. 어떤 특명 아래 움직여 그렇게 됐다(고 봐야 한다).

같은 일이 박정희한테도 일어난다. 군에 복귀할 수 있게 된 거다. 강제 예편을 당한 후 박정희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이던 백선엽의 배려로 정보국에서 문관으로 일하다 전쟁을 맞았다. 그리고 전쟁이 난 직후 현역으로 돌아왔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박정희가 그렇게 쉽게 군복을 다시 입기는 어려웠을 거다.

박정희는 전쟁 중에 군공을 세우거나 한 건 별로 없었다. 소득이 있었다면, 군에 다시 복무하게 되면서 육영수 씨하고 재혼하게 된 거다. (전체적으로) 한국전쟁이 박정희에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준 건 틀림없다. 박정희가 전쟁의 덕을 톡톡히 본 건 맞지만, 6.25가 박정희를 살려줬다고까지 보는 건 과한 표현인 것 같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은 현대사에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문제적 인물이다. 사진은 2011년 11월 14일 박 전 대통령 생가(경북 구미) 부근에 세워진 고인의 동상 제막식 모습. 박근혜 대통령이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박 전 대통령 개인사와 별개로, 한국전쟁을 거치며 군대가 급속히 팽창했다는 건 짚어야 할 대목이다. 그걸 통해 5.16쿠데타의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한국전쟁은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한다. 북한 역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그 이전보다 더 김일성 중심으로 권력이 재편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서중석 :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을 극도로 단순화된 사회로 만들었다. 남쪽은 극우 반공 체제가 됐다. 북쪽도 마찬가지인데, 본래 북한 정권이 수립될 때는 여러 세력이 권력을 나눠가졌으나 전쟁을 겪으며 숙청이 계속됐다. 그러면서 나중에 수령 유일 체제로 가게 된다. 한국전쟁은 남과 북에서 모두 한쪽으로 치우친 권력을 갖게끔 했고, 남북 모두 군인이 지배하는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데도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남한의 경우, 30년간 군대의 획일화된 사고와 문화가 사회를 지배했다. 그런 단순화가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를 괴롭히고 있지 않나.

(군의 팽창도 중요한데)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10만도 채 안되던 한국군이 전쟁이 끝날 때는 60만에 육박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고 미국에 계속 요구하면서 병력이 72만까지 늘었다. 미국이 경고를 많이 했다. 병력이 너무 많으면 나중에 큰 짐이 될 거라고. 당시 국방비는 대부분 미국 원조로 충당했다. (미국이 제공한 원조 물자를 팔아 마련한 돈을 대충자금이라고 했는데, 대충자금 지출 중 가장 큰 항목은 국방비였다. <편집자>) 그렇다고 해도 한국 정부가 져야 하는 짐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72만 병력을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나중에 60만으로 감축하게 된다.

장교들은 미국 가서 연수와 훈련을 받으면서 대단히 강한 엘리트 의식을 갖게 된다. 집단성이 굉장히 강한 조직이기도 했고. 1950년대 말부터, 한국은 군대가 지배하는 사회로 갈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5.16쿠데타를 계기로) 그게 이뤄지는 거다.

프레시안 :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 이만 정리했으면 한다.

서중석 : 해방과 한국전쟁은 한국 사회를 혁명적인 상황으로 바꾸어 놓았다. 다만 신기할 정도로 한국 사람들이 그걸 잘 인식하지 못했다. 해방과 한국전쟁은 한국 사회를 연속 혁명으로 변화시켰는데, 우리가 이 점을 대개 놓치고 있다. 이제라도 깊이 있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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