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콜라 맛은 왜 나라마다 다를까?

[프레시안 books]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들에 대하여>

우리는 생존만을 위해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음식은 일상의 중요한 의례이며, 문화를 설명하는 분명한 척도다. 인간은 음식 섭취에서 쾌락을 얻으므로, 음식은 영양 보충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됐다. 우리가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음식을 먹었다면, 우리는 술을 즐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음식 섭취 문화는 빅토리아 시대를 거치며 극적으로 바뀌었다. 1860년대까지만 해도 유럽의 농민은 밀, 귀리, 호밀, 보리, 감자, 콩류 등을 제외하면 다른 것을 거의 먹지 않았다. 19세기 제국주의 지배 체제가 지구화하고, 기술이 극적으로 발달하면서 인류는 새로운 음식을 대량 소비하기 시작했다. 산업적 수단으로 가공된 '슈퍼 푸드'가 출현했다. 설탕이 대량 생산됐고, 포장 기술이 극적으로 발달했다. 초콜릿, 젤리처럼 설탕을 활용한 갖가지 음식, 통조림, 가공 탄산수가 출현했다.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들에 대하여>(게리 S. 크로스·로버트 N. 프록터 지음, 김승진 옮김, 동녘 펴냄)는 산업에 포장술이 등장하면서, 우리의 소비가 중독적인 쾌락 추구로 영구히 바뀐 역사를 설명한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우리의 소비 문화를 바꿀 발명이 쏟아졌다. 볼거리, 먹을거리, 들을거리가 기술 발달에 따라 포장되었고, 싼값에 쏟아졌다. 저자들은 이 변화를 '포장된 쾌락의 혁명'으로 정리한다.

책이 다루는 핵심 소재를 열거한다면, 포장된 쾌락의 혁명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조금 더 쉽게 추리할 수 있다. 책은 담배, 슈퍼 푸드(초콜릿, 아이스크림, 탄산수), 카메라, 유원지의 탄생 역사를 다룬다. 이들은 모두 종래 인류가 저장할 수 없으리라 여겼던 것을 저장하고, 작은 단위로 포장해 소비를 부추긴 제품이다. 필연적으로 중독이 따랐다.

슈퍼 푸드가 대표적이다. 슈퍼 푸드는 설탕의 대량 생산에 따라 인류의 혀를 유혹했다. 19세기 초에 들어 부자들만 먹을 수 있던 설탕이 가난한 사람들의 밥상에도 올랐다. 곧 다양한 식품이 만들어졌다. 캔디, 마시멜로, 누가, 젤리, 껌, 아이스크림, (코카콜라와 같은) 탄산수 등이 모두 19세기에 발명됐다. 술과 담배가 남자를 유혹한 사이, 설탕 음식은 여성과 아이를 홀렸다. 대량 생산 체제가 구축되니, 자연히 마케팅 열풍이 일었다. 초기 껌과 같은 설탕 음식은 소화제로 홍보됐다. 야만인의 퇴폐적 음료로 여겨진 코코아는 설탕과 만나 '슈퍼 푸드의 제왕' 초콜릿이 되었다. 초코바는 군인의 야전 식량으로 지급되었다. 이들 식품은 공통점이 있다. 고열량 음식이지만, 영양가는 없었다. 오직 지방 덩어리일 뿐이다.

저자들은 슈퍼 푸드, 곧 정크 푸드가 인류의 식습관을 완전히 바꿨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단 음식은 가족, 공동체로부터 개인을 고립화했다. 슈퍼 푸드는 개인의 신속한 식사와 군것질에 초점을 맞춘 음식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일하면서, 끼니 사이에 허기를 때우기 위해 슈퍼 푸드를 싼 값에 즐기기 시작하면서, 가족이 식사를 함께 나누는 데 사용한 시간이 줄어들었다. 대신 제조 업체는 이 음식을 대중 문화 매체로 소개했다. 설탕 음식은 연인의 밀어가 되었고, 음식을 끔찍이 가리는 아이를 위한 간식으로 포장됐다. 사람들은 설탕의 단맛에 중독되면서 주전부리 소비를 크게 늘렸다. 이는 비만 인류 비중을 크게 늘린 주원인이 되었다.

슈퍼 푸드의 성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건 포장이다. 설탕이 듬뿍 들어간 제조 식품을 한 입 크기로 먹기 좋게 나누고, 눈에 잘 띄도록 화려하게 꾸미고, 오래 보관하고, 멀리 운반하는 기술이 발달했기에 슈퍼 푸드가 널리 퍼졌다. 사람들은 포장된 쾌락에 중독됐다. 사람들은 값싸고 자극적인 슈퍼 푸드를 필요 이상으로 과다 섭취했다.

'쾌락을 포장한다'는 개념은 음반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리는 찰나의 순간에만 살아남는다. 예부터 사람들은 소리를 보존하려 했다. 13세기 영국의 철학자 로저 베이컨은 청동으로 '말하는 머리'를 만들고자 했다. 인류의 오랜 꿈은 빅토리아 시대 들어 제 모습을 드러냈다.

혀도, 입술도 없었다. 원통과 바늘이 소리를 냈다. 토머스 에디슨이 1877년 축음기를 발명하면서 인간의 경험을 영구적으로 바꿀 계기를 만들었다. 애초 기업인이 아이디어를 녹음하는데 활용되리라 여겨진 축음기의 역할은, 녹음 장치를 원통이 아니라 납작한 원반형으로 바꾼 에밀 베를리너의 '그라모폰(Gramophone)'의 등장 이후 영구히 변화했다. 발명가들은 (녹음이 아니라) 축음기의 재생 능력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됐다.

이 변화는 음악이 레코드라는 상자에 포장된다(canned music)는 개념으로 설명 가능하다. 이제 음악은 허공에 떠도는 찰나의 소리의 지위를 넘어섰다. 예전 음악은 공공의 소유물이었다. 이제는 개인이 소유할 수 있게 됐다. 음악은 사적인 쾌락을 제공하게 됐다. 음악이 포장되자, 음악에 중독되는 이들이 생겨났다. 음악을 수집하는 사람, 뛰어난 레코드를 감식하는 사람이 등장했다. 레코드 산업은 순식간에 거대해졌다.

책에서 '포장한다'는 개념은 눈에 보이는 제품을 담는 플라스틱 상자를 뜻하지 않는다. 형태를 달리한 쾌락을 사람에게 전달할 매개체를 뜻한다. 초코바의 포장이 비닐껍질이라면, 음반은 레코드다. 자극적인 엽궐련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바꾼 담배의 포장이 종이와 마케팅이라면, '보고자 하는 욕망'을 담은 포장은 영화와 사진이다.

따라서 책이 설명하는 포장의 의미는 무한히 확장된다. 19세기 말경 등장한 놀이동산은, 책이 설명하는 대로 ‘감각의 백화점’이다. 놀이동산은 앞서 설명한 모든 쾌락, 즉 혀, 귀, 눈을 자극하는 모든 쾌락을 한꺼번에 제공하는 쾌락의 집합체다. 놀이동산을 쾌락의 거대한 포장으로 설명하고, 그 역사를 산업적으로 훑으며 인문학적, 역사적 통찰을 동시에 주는 글쓰기 방식은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놀이동산과 관련해 이 책은 다중 감각적 즐거움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 명절과 축제, 장터의 역사를 나열하는 한편, 장소화된 쾌락이 주는 즐거움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어떤 자극을 줬는가를 효율적으로 짚는다.

이 책은 오늘날 대표적 소비의 총아를 소재로, 현대 소비 사회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19세기부터 훑어 거슬러 오른다. 즉, 우리가 왜 생산에서 소비 사회로 넘어갔느냐를 거시적 서사에서 설명하는 대신, 세밀한 눈으로 관찰한 결과로 정리한다. 그리고 후반부에 이르러 책은 저 모든 '포장된 쾌락'이 출현한 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급속한 변화를 거쳤는가를 살핀 후 미래로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책은 두 가지 통찰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쾌락의 포장이 인류를 소비 사회로 이끌면서, 쾌락 제조자들은 두 가지 장치를 움직였다. 강화와 최적화다.

강화란 쾌락의 강도를 높이는 것이다. 접근성을 높이고, 중독성을 키운다. 예전 코카콜라는 병에 담겨 팔렸다. 이제 탄산음료는 자동판매기에서 캔으로 손쉽게 구할 수 있다. 담배에는 필터가 달렸다. 휴대하기 불편한 레코드는 라디오로, CD로, 그리고 MP3로 대체됐다. 영화는 첨단 기술에 힘입어 상상의 세계에 머물렀던 순간을 관객에게 직접 보여준다. 액션이 늘어났고, SF 영화는 현실 너머를 영상으로 구현했다. 비디오 게임에서 관찰자에 불과했던 소비자는 서사의 진행자로 격상한다. 이 모든 자극은 예전보다 더욱 강력한 쾌락을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장치다.

최적화는 이들이 소비자의 생활 궤적, 문화적 배경 등에 맞춰 섬세하게 스며들도록 하는 장치다. 봄에는 사랑 노래가 나오고, 여름에는 블록버스터 영화가 쏟아진다. 코카콜라는 나라마다 다른 입맛에 맞춰 섬세하게 첨가물을 바꾼다. 제조 업체와 홍보 전문가의 날카로운 전략에 따라, 우리는 인스턴트식품, 인기 시트콤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게 됐다.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들에 대하여>(게리 S. 크로스·로버트 N. 프록터 지음, 김승진 옮김, 동녘 펴냄) ⓒ프레시안
오늘날 우리는 과잉 소비 시대에 산다. 우리의 시대는 쾌락을 포장하는 기술의 발달 위에 만들어졌다. 이는 마치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그린 모습과 다르지 않은 듯하다. 우리는 대중화라는 명목으로 대자본이 밀어붙인 고도의 쾌락 전술에 휩쓸려, 극도로 척박한 현실의 탈출구로써 쾌락을 짧게 음미하는 순간을 즐기는 듯하다.

저자들은 포장된 쾌락의 중요한 특징으로 빠르게 탐닉된다는 점과 함께 쾌락 추구자를 사회적, 자연적, 역사적 맥락에서 떼어낸다는 점을 꼽는다. 비디오게임이 보드게임과 달리 혼자 즐겨도 문제없다는 게 적절한 예다. 그러나 포장된 쾌락이 행복을 키우지는 않는다. 저자들은 행복을 함께 키우는 가치를 되살리자고 책 후반부에 호소한다.

이 책은 방대한 범위의 세밀한 역사를 포장된 쾌락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정리해, 인문학적, 경영학적, 사회학적, 역사적 맥락에서 통찰한다. 넓은 시각을 바탕으로 절제된 주제에 집중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뛰어나다. 소비자본주의 사회를 풍부하게 관찰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책으로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대안을 얘기하는 책의 후반부는 짧고, 자세함이 부족해 장대한 앞부분에 비해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당위로만 설명하기에,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불행하고, 쾌락의 역치는 끝없을 정도로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불행의 원천이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의 범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책은 시원하게 해소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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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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