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금 문학의 모습은 초라해 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문학의 힘을 신뢰하며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최근 시집 <곡면의 힘>을 펴낸 서동욱 시인(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도 그 가운데 한 명입니다. <프레시안>은 서동욱 시인과 함께 문학 칼럼을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문학과 관련된 이론적 논의는 매우 다채롭습니다. 서동욱 시인은 이 다채로운 논의의 핵심에 위치한다고 생각되는 세 가지 근본 주제를 꼽아보았습니다. 진실, 구원, 현실 참여가 그것입니다. 이 연재가 문학의 본성에 대해 숙고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동양의 시들, 두보의 작품이나 절절한 시조들을 보라. 이른바 순수 문학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정치적, 경제적 사건, 시가 발화되는 계급적 위치를 가리켜 보인다. 문학의 생산은 애초에 사회적 노동이었고 정치적 맥락에 자리했던 것이다.
우리 시대는 문학의 정치성이 견고한 지반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이론적 성찰이 더욱 정교해지는 시대다. 그런데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문학이 가진 사회적 힘 또는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논의는 하나의 딜레마를 형성하면서 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딜레마는 무엇이며 또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정명환 옮김, 민음사 펴냄)에서 전개된 장폴 사르트르의 '참여 문학론'은 이 딜레마의 한 축을 형성한다. 사르트르에게서, 우리 의식은 의미를 통해 세계에 관여한다.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것은 문장이다. 따라서 우리는 글을 통해 세계에 관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관여'라고 번역한 '앙가주망(engagement)'은 사르트르의 문학 이론에 붙은 명칭대로 '참여'라고 칭할 수도 있다. 글을 통해 세계에 관여하는 일은, 세계의 변동 불가능한 의미를 중립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전달하는 일이 아니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말한다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이름이 붙여지자마자 이미 그 이전의 것과는 완전히 똑같은 것이 아니며, 그 순결성을 상실하게 된다. (…) 만일 당신이 어떤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이름 붙인다면, 당신은 그에게 그의 행위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러자 그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고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면전에서 그의 행위에 이름을 붙이기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을 '보는' 동시에 남들에게 '보여진다'는 것을 안다. (…) 그렇게 된 이상, 그가 어떻게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수가 있겠는가? (…) 이렇듯 나는 말을 함으로써, 상황을 바꾸려는 내 기도 그 자체를 통하여 상황을 드러낸다. 나는 상황을 바꾸기 '위하여' 나 자신과 남들에게 상황을 드러낸다."
이렇게 볼 때 글이란 당연히 의미를 충실히 실어 나르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즉, 글은 햇살을 가장 잘 통과하게 하는 투명한 창문처럼 되어야 하며 중뿔나게 그 자체가 눈에 띠어서는 안 된다.
"말들은 애초에 대상이 아니라 대상의 지시자이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들을 통해서 알게 된 어떤 관념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그 관념을 전해준 말 자체는 한마디도 상기하지 못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 햇빛이 유리를 거쳐 통과하듯이, 말이 우리의 시선을 스쳐서 지나갈 때에 산문이 있는 것이다."
요컨대 말(글)은 의미(관념)를 실어 나르는 수레의 임무를 다하고는 사라져 버려야 한다. 실용적인 언어에 대해서는 이 점은 정말로 옳다. 수업 시간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장시간 늘어놓는 선생이 욕먹는 현장에서도 증명되듯, 전할 의미를 군더더기 없이 경제적으로 전하는 임무에서 벗어나 말은 베짱이처럼 게으름 부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예술로서의 말은 의미 전달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고유성에서, 가령 말의 음악성, 리듬, 구두법 등에서 성립한다. 이 점에 대해 알랭 바디우의 <베케트에 대하여>(서용순·임수현 옮김, 민음사 펴냄)가 잘 말해주고 있다.
"플로베르 이후 많은 작가들이 그랬듯이, 베케트는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음악뿐이며, 자신이 여러 리듬과 구두법들의 창시자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리듬 등을 통해 구성되는 저 고유성을 우리는 작품의 '자율성'이라는 말로도 부른다. 언어 자체의 즐거움의 원천이기도한 작품의 이 자율성은, 의미 전달이라는 실용성의 기준에서 보자면 말의 낭비일 것이다. 의미 전달의 실용성을 기준으로 삼자면, 의미 대신 말 자체의 생김새가 뽐내는 시적 언어는 거추장스러운 우회로이다. 따라서 우회로를 폐쇄하고 실용적 도구만 남겨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아도르노가 <미학 이론>(홍승용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에서 말한 대로 "앙가주망은 불가피하게 미학적인 양보로 되고 만다."
반대로 문학의 자율성 자체에서 문학의 정치적 힘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참여'와 '예술의 자율성'을 대립적 축으로 삼고서 생기는 다음과 같은 아포리아적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자율적인 작품은 사회적으로 무관하고 궁극적으로는 모독적인 반동적 작품이라는 판결을 유발하며, 반면에 사회적으로 일의적이고 논증적인 판단을 행하는 작품들은 그로써 예술을 부정한다."
작품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의미의 전달에 대해 생경한 자율성을 가질 때 그것은 사회적 책무를 벗어버린 반동적 작품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 반면 작품이 사회가 직접적으로 필요로 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수단이 될 경우 작품은 의미의 운반자에 그치며 작품이 되기를 포기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묘사될 수 있는 상황과 달리, 오히려 아도르노는 예술의 자율성 상실로부터 예술이 기존 사회에 순응하는 길을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이 그 자율성을 포기하면 기존 사회의 활동에 자신을 내맡기게 된다."
예술의 예외성이 사회 안에서 의미와 가치를 통용시키는 기존의 형식에 변화를 주지 않는다면, 기존의 형식에 의해 한계 지어진 의미와 가치만이 남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의 자율성이 산출하는 새로운 형식이 곧 사회적 해방에 대한 약속이 될 수 있을까? 몇 구절을 읽어보자.
"예술에서는 사회에 반대하는, 예술의 내재적 운동이 사회적이지, 예술의 명시적인 입장이 사회적인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새로운 예술, 모두가 원하는 형식의 해방 속에는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해방이 감추어져 있다. (…) 해방된 형식은 기존 상황에 대해 역겨운 것으로 여겨진다."
"장군이나 혁명의 영웅들을 충실하게 그려낸 초상화보다도 그림을 그리는 방식 속에 오히려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있고 사회적으로도 더 중요한 체험이 침전될 수 있다."
그야말로 작품 안에서 선언되고 명시되는 의미(초상화 속의 인물)가 아니라, 예술 자체의 자율적 표현(그림을 그리는 방식) 속에서 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함축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대해서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이 비경향적인 작품도 독일의 시민 의식을 해방시키는데 현저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괴테는 실연한 자의 감정과 사회의 갈등을 형상화하는 가운데 이 실연한 자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감으로써,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어도 실제로는 경직화된 소시민성에 저항하였던 셈이다."
예술의 자율성 자체에서 정치성을 읽어내고자 했던 이런 아도르노의 예술론을 후배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미학 안의 불편함>(주형일 옮김, 인간사랑 펴냄)에서 이렇게 요약하기도 한다.
"예술의 자율성의 핵심이 되는, '따라서' 예술의 해방 잠재력의 핵심이 되는 이질적 감성을 구하라. (…) 아도르노의 미학이 요약한 것은 바로 이러한 요구이다."
어떤 점에서 랑시에르는 아도르노 사상을 '비판적으로' 발전시켰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아도르노의 예술의 자율성 개념은 모범적으로 자율성을 구현한 고급 예술과 그렇지 못한 저급 예술 사이의 '위계'를 불러일으키면서, 일종의 예술적 귀족주의를 끌어들일 위험을 안고 있었다. 이에 대해 랑시에르는 다음에서 보듯 예술 행위 내지 작품의 자율성이이 아닌, 예술적 향유를 하는 우리 '감성 자체의 자율성'을 내세움으로써 특정 예술 작품만이 귀족화할 가능성을 차단한다.
"미적 자율성은 모더니즘이 찬양한 예술적 '행위'의 자율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각적 경험 형태의 자율성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아도르노에게서는 결코 용납되지 않았을 대중 예술 또한 우리의 감성을 변화시키는 정치적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어째든 핵심은 참여 문학론과 자율성의 예술론 사이의 간격을 가늠하다 보면 예술의 정치성과 관련된 딜레마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 식으로 문학이 의미의 운반자가 될 경우 문학은 사라지고, 사회적 맥락 속에 의미만이 남는다. 이때 문학은 고작해야 수사(修辭)로서 의미를 포장하는 예쁜 포장지, 프로파간다의 수단이 될 것이다.
반면 아도르노나 랑시에르가 말하듯 예술이나 예술적 감성이 자율성을 유지하고 그 자율성을 통해 사회에 관여할 경우, 예술은 사회적 현안들에 대해 직접적 주장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예술은 자율성을 상실하고 직접적으로 주장되는 의미의 운반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심각한 문제는, 정치적 명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예술의 자율성이 가져오는 해방은 기존의 정치로부터의 해방인지, 기존의 정치 안에 마련된 놀이터인지 구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런 난점을 대표하는 것이 앙드레 부르통의 초현실주의이다. 부르통은 <초현실주의 제2선언>에서 말한다.
"가장 단순한 초현실주의적 행위는 권총을 움켜쥐고 거리로 내려가서 군중을 향해 마구 쏘아대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에 입각한 해방을 빙자한 범죄에 불과하다. 혹시라도 예술가가 이런 범죄를 정치적 해방의 일환으로 받아들인다면, 예술가는 예술을 기만하고 스스로에게는 면죄부를 남발하는 셈이다. 그리고 저런 범죄의 정체성이란 고작 기존의 사회 질서 안에 그 자리가 얌전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해방과는 전혀 무관하다.
문학 또는 예술의 정치성과 관련된 이런 딜레마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관건은 정치를 무엇으로 이해해야 하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술이 관여해야 하는 정치가 특정 후보에 대한 투표를 독려하는 일이라면, 즉 사람들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프로파간다라는 수단을 만족시켜야하는 일이라면, 예술은 예술 자체의 자율성 또는 정체성을 상실할 뿐 아니라, 정치를 위한 최고의 역할 역시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프로파간다를 위한 전문적 기재들에 비하면 예술은 전적으로 부수적인 까닭이다.
그러니 현행의 정치적 절차가 아닌 '정치 자체'가 관건이 되는 맥락을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들뢰즈는 영상 대담 <질 들뢰즈의 A to Z>(대윤미디어 펴냄)에서 전통적으로 정치에서 기준이 되어온 다수적인 자들로 "첫째 남성, 둘째 성인, 셋째 이성애자, 넷째 도시 거주자"를 꼽는다. 정치의 장에서 사람들은 이 기준 안에 들기 위해 노력하든지, 이 기준에 의해 소수자로 분류되는 일을 감내하든지 한다. 둘 가운데 어느 길이건 결국 주도적 기준의 폭력 아래 놓이는 방식이다.
문학의 정치란, 이런 기준에 근거해 꾸며진 정치적 절차의 일부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이 기준 자체를 파괴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예술이 문화 안에 마련된 안전한 캡슐 같은 놀이터 안에 머물며 정치에 해가 없는 막무가내의 객기가 될 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문학의 정치, 나아가 예술의 정치는, 예술이 현금의 정치가 기반하고 있는 '저런 기준에 대해' 이질적일 뿐 아니라 위협적인 요소가 될 때 가능할 것이다.
후기
칸트는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유명한 세 가지 질문으로 표현하려 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이번에 연재한 세 편의 '문학 칼럼'은 이 물음을 문학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와 답하고자 했다.
'문학과 진실'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문학과 정치'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문학과 구원'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답하려는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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