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핀란드化'를 비웃는가?

[프레시안 books] 장정일의 <냉전 이후> 서평에 대한 보론

지난 12일, 소설가 장정일은 <프레시안>에 역사학자 김기협의 새 책 <냉전 이후>(서해문집 펴냄)에 관한 서평을 보냈다. (☞관련 기사 : '냉전 이후' 한국의 선택은 친미 혹은 친중 뿐인가?) 이 글에서 장정일은 문명론에 입각해 서양과 동양 정치 철학을 비교하고, '힘의 지배'가 아닌 '헤게모니의 지배'를 이어갈 중국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김기협의 글에 일부 거리를 둔다. 김기협의 서세동점 인식에 따른 문명론적 해석은 신선해 반갑지만, 이를 걷어내면 남은 건 '친중이냐, 친미냐'는 문제밖에 남지 않으므로, 한국 스스로 역사에서 주체적 판단을 내릴 여지를 없앴다는 이유다.

이 글에 관해 김기협이 <프레시안>에 특히 '핀란드화' 모델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면서, 장정일의 인식에 관한 보론을 보냈다. 해당 전문을 소개하며, 두 사람의 글을 통해 더 심도 있는 논의가 이어지길 바란다.

서평에 답하는 저자의 글을 흔히 '반론'이라 부르지만, 내 책 <냉전 이후>에 대한 장정일의 서평 "'냉전 이후' 한국의 선택은 친미 혹은 친중 뿐인가?"에 답하는 이 글은 전혀 '반론'이 아니다. 굳이 이름 붙인다면 '보론(補論)'이라 할 것이다. 장정일이 꺼낸 이야기에 내 생각을 덧붙이려는 것이다.

무엇보다, 장정일이 비교를 위해 소개한 복거일의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문학과지성사 펴냄)에 나오는 '핀란드화' 논의에 관한 내 생각을 내놓고 싶다. 나는 복거일의 글을 읽지 않은 지 오래되므로 복거일의 생각에 직접 비평을 가할 능력은 없고, 장정일이 소개한 범위에 이야기를 한정한다. 장정일은 이렇게 썼다.

복거일은 "빠르게 늘어나는 중국의 영향력에 한국의 주권이 점점 자주 그리고 깊이 침해되는 현상"(7쪽)을 주목해야 한다면서, 중국의 영향력에 한국의 주권이 침해되는 현상을 '핀란드화(Finlandization)'라는 모델로 설명하고 있다. 핀란드화란 강대한 나라 옆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가 강대한 이웃의 눈치를 보면서 강대한 이웃에게 점차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양보하게 되는 과정으로('적응적 묵종'), 20세기에 핀란드가 러시아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주권의 손상을 입으면서 생존했던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용어다.

지은이는 미국의 정치학자 월터 래커의 말을 빌려, 핀란드화에 따른 적응적 묵종이 불러오는 가장 나쁜 것은 "사회의 도덕적 변질"(74쪽)이라고 말한다. 약소국은 강대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힘센 이웃이 신뢰하는 후보만을 고위 공직에 선출하거나, 언론을 검열하는 '국내 조정'을 쉬지 않고 행한다. 그러면서 국가의 구성원 전체가 현실 도피와 위선이라는 도덕적 타락에 빠지게 된다.

핀란드화라는 이름에 영문까지 붙여놓으니 마치 학계에 통용되는 용어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이 말은 냉전기 반공진영의 선전용 구호였고, 학술적 검토 대상이 된 일이 거의 없는 말이다.

핀란드 사람은 이 말을 불쾌하게 여긴다. 강대국에 인접한 나라의 현실적 문제를 무시하는 무식하고 오만한 태도가 비쳐진 말이라는 이유다. 핀란드 사람의 기분을 내가 쉽게 이해하는 것은 <해방일기> 작업 중 비교를 위해 핀란드 사정을 살펴본 일이 있기 때문이다.(2권 287-293쪽, 핀란드의 독립과 명예를 지킨 '연장전')이웃의 강대국에 휘둘리는 운명을 힘들게 헤쳐 나온 20세기 핀란드 역사에 나는 깊은 경의를 품게 되었다.

핀란드는 스웨덴왕국의 영토였다가 1809년 전쟁을 통해 러시아에 탈취되었다. 러시아는 핀란드를 자치령인 대공국(大公國)으로 만들어 간접지배 아래 두었다. 알렉산더 1세 차르가 핀란드 대공을 겸했다. 마치 청나라 황제가 유목 민족의 대가한(大可汗)을 겸한 것과 같은 체제다. 그래서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으로 차르가 퇴위하자 핀란드의 대공도 사라졌고, 그 해 연말 핀란드공화국이 독립했다.

19세기 유럽을 풍미한 민족주의는 민족국가의 내부와 외부만을 구분하는 단순한 세계관을 바탕에 뒀다. 그런데 러시아와 핀란드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핀란드 민족주의 자체가 러시아의 후원에 힘입어 자라났다. 수백 년간 스웨덴의 일부로 존재해 온 핀란드를 스웨덴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해 러시아 지배자들은 핀란드 민족주의의 성장을 부추겼다. 핀란드 인구 상층계급 15%가 쓰던 스웨덴어가 차르 지배 하에서도 계속 핀란드 공용어 자리를 지킬 정도였는데, 오랜 국어 진흥 운동 끝에 1892년 핀란드어가 스웨덴어와 나란히 공용어 자격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핀란드 민족주의가 완성 단계에 이른 바로 이 무렵 러시아가 '러시아화' 정책에 나섰다. 독일을 비롯한 서방 여러 나라와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여태까지 느슨하게 관리해온 제국 내의 이질적 요소를 더 긴밀하게 통합하려는 시도였다. 외부로부터의 위기가 내부의 통제 강화를 불러온 사례로, 임오군란(1882) 국면에서 청나라가 조선에 관한 통제력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킨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이 언저리에서 일본이 등장한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1904년 러-일 전쟁에 돌입한 일본은 핀란드 민족주의 봉기를 지원하려고 무기를 보냈으나 배가 난파하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다. 그런데 10년 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와 연합한 일본은 핀란드 민족주의 세력의 명단을 러시아에 넘겨 탄압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 위키피디아의 관련 정보)

1917년 10월 혁명으로 세워진 소련 볼셰비키 정권은 민족 자결의 원칙 아래 핀란드의 독립을 용인했다. 독립 직후 핀란드는 유산계층을 옹호하는 백군과 무산계층을 대표하는 적군 사이에 치열한 내전을 치렀다. 독일의 지원으로 승리를 거둔 백군파 의회는 독일에 종속하는 왕정을 추진했으나, 뒤이어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는 바람에 독립 공화정을 세우게 되었다. 소련과의 관계는 얼마동안 순탄했으나, 스탈린 집권 후 긴장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할 때 히틀러는 소련이 핀란드와 발트 3국을 차지할 것을 양해했다. 소련은 네 나라에 군사기지 제공을 요구했는데 핀란드만 거절했다. 얼마 안 되어 세 나라가 소련에 합병된 반면 핀란드는 소련을 상대로 100여 일에 걸친 겨울전쟁을 치렀다. 1940년 3월 전쟁이 종결될 때 핀란드는 영토 할양 등 상당한 양보를 강요당했지만 독립을 지켰다. 타격은 소련이 더 컸다. 소련 군사력 평가가 크게 낮아져 독일의 소련 공격 결정을 앞당기는 빌미가 되었다고 한다.

전쟁 종결 후에도 핀란드에 관한 소련의 요구가 가중함에 따라, 또 한 차례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핀란드는 영국에서 무기를 구입하는 데 실패하자 독일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1941년 6월 독-소 개전과 함께 제2차 핀-소 전쟁도 시작되었다.

핀란드는 대 소련 항쟁에서 독일의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추축동맹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겨울전쟁으로 빼앗긴 영토를 탈환하고는 진격을 멈추고 방어만 했다.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진 레닌그라드 포위작전 시에도 독일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에 말려들지 않도록 노력했고, 덕분에 종전 후에도 전범국의 멍에를 피할 수 있었다.

제2차 핀-소 전쟁을 끝낸 1944년 9월의 휴전협정은 핀란드에 엄청나게 가혹한 조건이었다. 그래도 독립은 지켰다. 독일과 최후의 결전을 남겨놓고 있던 스탈린이 더는 몰아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939년 12월 겨울전쟁 개전 이후 근 5년 동안 핀란드의 대 소련 항쟁에 아무 연합국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소련이 연합국의 일원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련을 적대하는 냉전 상황이 되자 자기네처럼 소련에 당당히 맞서지 못한다고 핀란드를 비웃으며 만들어낸 말이 핀란드화였다.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는 자기네와 달리 핀란드는 소련에게 군사기지를 제공하지 않고 있는데도!

핀란드의 존경스러운 20세기 역사를 깔보는 핀란드화라는 말이 철 지난 지금도 횡행하는 데 열 받아서 말이 많아졌다. 이제 장정일의 글 중 정말 많은 생각을 자아내는 마지막 대목을 살펴보겠다.

<냉전 이후>는 1)남한과 북한의 통일 문제와, 2)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미국․중국)의 지정학적 경합을, 3)문명사적인 렌즈로 성찰하고자 한다. 이런 기획은 1), 2)의 방법과 설명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한반도의 모순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러나 문명론을 얘기하면 할수록 우리가 역사 속에서 내릴 주체적 판단이나 역사에 개입할 능력은 찾기 힘들다. '원자론적 문명(서양)이냐, 유기론적 문명(서양)이냐?'는 꽤 거창하지만, 문명론을 걷어내고 나면 '친중파로 갈아 탈 것이냐, 친미파를 고수할 것이냐?'의 문제로 축소된다. 문명론(사)적 설명은 한반도를 탁란(托卵)하는 조류의 일종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환단고기>에 미친 '환빠', 상고사(上古史)의 수렁에 빠진 김지하, 북한의 종교인 김일성주의는 탁란하지 않으려는 필사의 노력이더란 말인가?

나는 <냉전 이후>에 앞서 한국현대사를 다룬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펴냄)와 <해방일기>(너머북스 펴냄)에서도 문명사의 관점을 적용하는 데 주력해 왔다. 그 노력을 깊이 살펴주는 것이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AP=연합뉴스

그런데 문명사 같은 거시적 관점을 제기한다 해서 우리의 "주체적 판단"이나 "개입할 능력"의 여지가 줄어든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는 그런 관점이 너무 생소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20세기 한국은 서양 근대문명의 우월성에 관한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믿음 속에서 자라난 우리는 특정 문명의 가치체계에 묶였으므로, 문명의 일반적 성격에 관한 감각이 퇴화되어 있다. 그래서 역사의 흐름도 '뜻의 역사' 아닌 '힘의 역사'로만 파악하기 쉽다.

힘의 역사 안에서는 작은 힘이 큰 힘 앞에서 아무런 작용력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뜻의 역사에서는 아무리 작은 뜻도 말살되지 않고 나름의 싹을 틔운다. 핀란드의 역사를 보라. '독립' 같은 거룩한 명제를 핀란드 민초가 내건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저 '핀란드인다운 삶'을 지키려 애썼을 뿐이고, 그 값을 기꺼이 치렀다. 19세기 말까지 유럽의 변방에서 낮은 문화수준과 취약한 국가 위상에 머물러 있던 한 소규모 민족이 백년 후 지구촌에서 가장 위대한 사회의 하나를 일궈내기까지의 과정에는 당랑거철(螳螂拒轍)과 같은 장면이 수없이 포개져 있다. 전쟁 한 번 겪을 때마다 많은 피를 흘리고 많은 손해를 봤다. 그러나 내 것 지키고 남의 것 넘보지 않는 자세를 꾸준하게 지킨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장정일이 말하는 탁란(托卵)은 사대주의의 다른 표현일까? 나는 '사대'가 유기론적 천하체제의 자연스러운 일부이며, 여기에 '주의'란 어미를 붙여 폄하하는 것은 유기론적 천하체제를 부정하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본다는 의견을 기회 있을 때마다 내놓는다. 탁란이 자연계에서 흔한 현상은 아니지만, 지속가능성을 가졌기에 하나의 현상으로 관찰되는 것 아닌가. 여기에 무슨 도덕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겠는가. 탁란 거부 현상일 수 있겠다고 장정일이 드는 사례들을 보면 그가 탁란에 쓸데없는 반감을 갖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확실한 생각은 알지 못하겠다.

제목에서부터 "친미 혹은 친중 뿐인가?" 했는데, 이 마지막 문단에서 그는 "문명론을 걷어내고 나면"이라는 조건을 붙인다. 아우, 그걸 왜 걷어내? 내 글에선 문명론이 알짜인데. 개항기 이래 목전의 이해관계에 휩쓸려 우리 민족사회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살피지 않는 풍조가 너무 많았다. 지금 '친미냐, 친중이냐'는 질문이 떠오르는 것도 중국의 성장에 따라 현실적 이해관계가 엇비슷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문명사적 관점의 개발을 통해 현실적 이해관계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사회의 주체적 입장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당연히 '친중' 쪽에 무게를 더한다. 북한 문제를 놓고도 미국을 만족시키는 길보다 중국을 만족시키는 길이 장기적으로 우리 민족사회에 더 유리한 조건을 형성해줄 개연성이 크다고 나는 본다. 분명히 말한다. 나는 친중파다. 하지만 과거의 대부분 친일파나 친미파처럼 일신의 이득을 위한 선택은 아니라고 믿어주기 바란다.

핀란드화란 말 때문에 떠올리게 되었지만, 핀란드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게 많다. 18세기까지 스웨덴의 지배를 받고, 19세기에는 러시아 지배를 받고, 20세기 들어서는 소련의 야욕에 맞서 싸우는 힘든 상황을 오랫동안 겪으면서도 침략을 막는 데 그쳤을 뿐, 기회가 왔다 해서 침략자 응징에 나서기를 삼갔다. 그래서 외세의 주구 노릇을 하지 않고 이웃의 존중을 받을 수 있었다. 핀란드는 1970년대까지 소득수준이 낮았는데도 스웨덴이 비자 면제로 취업 이민을 대거 허용하는 등 도움을 준 덕분에 쉽게 발전의 길에 오를 수 있었다. 2백 년 전까지 지배-피지배 관계에 있던 나라끼리 그토록 좋은 관계를 키울 수 있었던 데는 북유럽 국가로서 문화적 유대감이 한 몫을 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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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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