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살인 사건, '남성 혐오' 걱정 말라!

[기자의 눈] '남성 혐오'를 걱정하는 언론들

강남역에서 발생한 여성 살인 사건을 놓고 '여성 혐오' 범죄인지 아닌지 논란이 뜨겁다. 경찰은 살해범이 '조현병'(피해망상) 질환자라서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니다"라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는 분위기다.


경찰은 22일 브리핑을 통해 범인이 "모르는 여자가 자기에게 담배꽁초를 던지고, 지하철에서 여성들이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가고, 일부러 여자들이 내 앞에서 천천히 가서 나를 지각하게 만들고, (식당에서 일하는데) 일부 여성들이 서빙에 대한 불만을 제기해 주방에서 일하게 만드는 등 이렇게 있다간 내가 죽을 것 같아 내가 먼저 죽였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이중 서빙에 대한 불만 제기는 직접 당한 일도 아니고 매니저를 통해 전달받았는데, 여성이 제기한 적은 없으며 일부 남성 손님이 문제를 삼았다고 한다.

범인은 또 경찰 진술에서 자신의 범죄에 대해 "여성 혐오가 아니다. 일반 여성에 대한 반감은 전혀 없다. 나는 여성에게서 실제 피해를 당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인터넷상의 여성 혐오에 대해) 어린 사람들의 치기 어린 행동인 것 같다. 나는 그런 이들과 다르다"고 답했다고 한다.

범인의 이 같은 진술과 정신병을 근거로 "여성 혐오 범죄는 아니다"라는 게 경찰이 내린 중간 결론으로 보인다.

여기서 의문을 제기한다. 범인이 진술한 근거 없는 '피해자가 일면식도 없는 여성'이었던 이유는 모두 정신병적 증상이며, "여성 혐오가 아니다"는 피해자의 발언은 중요한 무게를 갖기 때문에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니다'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 타당할까?

사회적인 차원에서 '여성 혐오'라는 말의 함의는 '너 여자 싫어해?'라는 감정적인 차원의 물음이 아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폭력의 피해를 당하느냐는 행위가 발생하느냐 여부다. 소수자 집단에 대한 '혐오(증오) 범죄'는 특정 소수자에 대한 폭력이 발생하느냐 여부를 따진다.

이번 사건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 '여성 혐오 범죄'가 만연해 있다는 것은 다수의 통계로 확인되는 현실이다. 2015년 1월부터 8월까지 발생한 강력범죄(1만 5227건) 중 여성이 피해자인 경우는 87%에 달했다(경찰청 통계). 피해자 10명 중 9명이 여성이라는 얘기다. 대다수의 가해자가 남성인데, 범죄 대상이 '여성'인 비율은 오히려 증가해왔다. 1995년에 강력범죄의 여성 피해자 비율은 72.2%였다.

한국에서 '여성'에게 강력 범죄가 집중된다는 사실은 국제적인 비교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UNODC(유엔마약범죄사무소)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2008년 한국 살인 사건 피해자 중 여성 비율은 51.0%로 과반이 넘는다. 주요 국가 중 과반이 넘는 건 한국이 '유일'하다. 2위인 프랑스가 34.3%, 그다음인 영국이 33.9%로 큰 차이를 보인다. 같은 유교권 국가인 중국도 30.1%에 그쳤고, 총기 사고가 다발하는 미국도 여성 살해 비율은 전체 살인 사건의 22.5%였다.

강남역 사건이 정신병력이 있는 피의자에 의해 저질러져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런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강남역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쏟아지고 여성들의 애도와 분노의 목소리는 '여성을 혐오'해서 죽였느냐를 따지자는 게 아니라, '여성'이어서 죽임을 당하는 현실에 대한 증언이자 집단 고발인 셈이다.

그런데도 일부 언론은 이번 사건을 '여성 혐오 vs. 남성 혐오'라는 엉뚱한 갈등으로 몰아가며, 더 나아가 '남성 혐오'에 대한 우려까지 표출하고 있다. '여성이라 죽였다'는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여성 혐오가 뭐냐'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남성 혐오'의 실체는 왜 안 따지나?

'남성 혐오'의 실체가 뭔가? 일부 언론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산발적으로 열리는 여성들의 집회 현장에서 집회를 방해하는 남성들을 향해 "재기해, 재기해!"라고 외쳤다며 '남성 혐오가 심각하다'고 보도했다.('재기해'는 2013년 자살한 한국남성연대 대표 성재기 씨를 빗대 욕하는 말이다.) (☞관련 기사 : 국민일보 보도)


물론 '재기해'라는 말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는 집회를 방해하는 남성들에게 쏟아진 비난이다. 더 나아가 남성 일반을 상대로 한 '혐오 표현'일지라도, 이는 욕(언어폭력)에 그친다.

반면 '여성 혐오'의 양상은 욕, 차별적 행위, 구타, 성폭력, 살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레디즘(http://cafe.daum.net/ladism)


솔직해지자. '남성 혐오'를 말하는 이들이 진정 걱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성들이 불특정 다수인 남성들에게 너무나도 폭력적인 욕을 해서 걱정되나? 아니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쏟아진 여성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는 '여성에게 너무나도 폭력적인' 한국 사회의 민낯인가? 그도 아니면, 여성들이 집단행동을 통해 너무도 당연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안전할 권리)를 주장하는 그 자체가 걱정되나? '암탉이 시끄러우면 집안이 망한다', 여성들이 분노를 말하는 것 자체가 걱정되는 것 아닌가?

'여성들이 죄 없는 나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고 느껴지는 남성들이여, 그렇다면 '남성=잠재적 범죄자'로 여겨지는 현실을 바꾸는데 동참해달라. 여성들이 범죄자 취급한다는 행위의 실체는 무엇인가? 의심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 신체적 접촉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하거나 불편한 기색을 취하는 것, 날카로운 말 한마디를 던지는 것 이외에 또 어떤 것들이 있을 수 있나? 경찰이 용의자를 체포하듯 실질적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남성들의 '심기'가 불편한 것 이외에 더 나아간 언행은 드물다. 억울하다고? 당신을 의심하는 눈초리의 그 여성은 그 순간 당신을 혐오하는 게 아니라 공포에 시달리고 있을 뿐이다!

지금 언론이 해야 하는 일은 '여성 혐오 vs 남성 혐오'라는 말도 안 되는 잣대로 현실을 왜곡하고, 엉뚱한 갈등을 부추기는 게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말하는 바, 요구하는 바를 전달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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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프레시안 편집·발행인. 2001년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편집국장, 워싱턴 특파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아이들 파는 나라>, <아노크라시> 등 책을 썼습니다. 국제엠네스티 언론상(2017년), 인권보도상(2018년), 대통령표창(2018년)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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