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페이퍼', 아이슬란드 정권 붕괴 위기

"유령회사 설립 자체가 도덕적 타격"…전현직 국가 수반 12명 연루

IMF 사태가 터져서 국민은 금 모으기를 하며 나라를 살리려고 할 때, 대통령은 조세회피처에 유령회사를 설립해 막대한 재산을 은닉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나면 그의 정치 생명은 하루아침에 끝날 것이다.

5일 BBC 방송에 따르면, 2013년 총리로 취임한 시그뮌뒤르 다비드 귄뢰이그손 아이슬란드의 총리가 지금 이런 상황에 처했다. 사상 최대의 조세회피처 금융거래 정보가 유출된 '파나마 페이퍼' 명단에 그가 연루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관련기사:노태우 아들 노재헌 역외탈세 의혹, SK는?)

아이슬란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금융산업이 붕괴될 위기에 빠졌고, 당시 정부는 금융산업을 개혁해 투명하게 만들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귄뢰이그손 총리는 조세회피처에 유령회사를 세워 막대한 자금을 빼돌린 뒤, 비정상인 금융거래를 일삼은 자국 대형은행들에 투자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이슬란드 국민을 격분시킨 이 사건으로 현재 이 나라에서는 전체인구 10%에 해당하는 국민이 거리로 나와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 4일 밤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 총리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AP=연합뉴스

총리가 유령회사 통해 자국 대형은행들에 몰래 투자


아이슬란드의 금융위기는 상환 불가능한 규모로 자금을 빌려 위험한 파생상품에 투자를 한 대형은행들이 파산하면서 초래됐다. 당시 은행들의 부채는 아이슬란드 GDP의 10배가 넘는 규모였다. 이 위기로 아이슬란드는 깊은 불황에 빠졌고, IMF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귄뢰이그손 총리는 2007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의 유령회사를 거쳐 4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아이슬란드 3대 대형은행들에 투자했다. 그는 2009년 말 1달러에 부인에게 이 회사의 지분 50%를 넘겼다. 하지만 앞서 그가 2009년 4월 중도우파 진보당의 의원이 됐을 때 법에 규정된 주식 보유 현황 신고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


아이슬란드 국민이 그의 행위에 격분을 한 이유는 아이슬란드의 금융위기가 조세회피처를 이용한 위험한 그림자 금융으로 초래됐는데, 총리도 이런 거래를 한 은행들의 채권자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즉, 은행의 구제 등 금융정책 결정자가 결국 은행의 이해 관계자였다는 말이다.

아이슬란드 경찰은 "4일 밤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벌어진 시위 규모는 2008년 금융위기의 책임을 물어 당시 우파 정권을 퇴진시킨 시위대 규모보다 크다"고 밝혔다.<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이번 사태로 아이슬란드 현 정부의 앞날에 의문이 드리워졌다"고 전했다.


AP 통신은 '파나마 페이퍼스'는 아이슬란드 총리뿐 아니라 전세계의 권력자와 부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재산을 은닉하는지 엿보게 해준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페이퍼컴퍼니, 유령회사, 셸컴퍼니 등으로 불리는 '서류상 기업' 자체는 불법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 씨가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3개의 유령회사를 설립했지만, 계좌도 개설하지 않았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반발한 것도 이런 입장이다.

전세계 부자와 권력자, 유령회사 설립은 기본?


하지만 5일 세정당국의 한 관계자는 "서류상 기업을 설립한 것 자체는 현행 법으로 규제를 하지 않을 뿐, 정상적이지 않은 거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설립할 이유가 없다"면서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도덕적으로 의심받고 타격을 받게 될 수밖에 없으며, 유령회사를 통한 금융거래는 탈세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는 행위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파나마 페이퍼'에 연루된 명단들은 충격적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등 현역 국가 수반들은 물론이고 축구선수 리오넬 메시, 영화배우 성룡 등 세계적인 유명인사들을 포함해 부자나 권력자로 거액의 돈을 주무를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조세회피처에 유령회사를 설립해 두고 있다는 의혹이 사실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파나마 페이퍼에 따르면, 이 사건에 연루된 전현직 국가수반만 12명이다. 특히, 푸틴 대통령의 돈을 '가난한 최측근들'이 관리해주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20억 달러의 금융거래도 이번에 드러났다.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거액의 자산을 버진아일랜드의 유령회사에 은닉한 사실이 드러나 탄핵 위기에 몰렸다.

호주 국세청은 파나마 페이퍼 명단으로 드러난 자국 국적 인사만 800명이 넘어 이들을 역외탈세 혐의로 조사에 들어갔다.

영국에서는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작고한 부친 이언 캐머런이 영국 부자들의 역외탈세를 돕는 역외 펀드를 운영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어떤 정치적 타격을 받게 될지 주목받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매형 덩자구이가 조세회피처에 유령회사들을 설립한 것이 드러나면서 그의 '성역 없는 부패 척결' 의지를 시험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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