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는 '혁명의 도시'였다

[김윤태의 중국은 하나?] 상하이와 저항의 역사

상하이는 '극동의 가장 큰 상업 도시'로 불릴 정도로 근대 이후 상공업이 매우 발달한 지역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상하이와 관련된 화제는 정치보다는 경제와 연관된 경우가 더욱 많았다.

그러나 경제적 화제 못지않게 정치적 화제도 무시할 수 없이 풍부한 지역이 상하이다. 더군다나 중국의 운명을 결정했음직한 굵직한 사건들이 상하이에서 많이 일어났다. 중국공산당의 창당, 오사운동(五四運動), 오삽운동(五卅運動), 노동자 총파업 등은 중국의 운명을 결정한 중요한 사건들이었고 모두 상하이를 배경으로 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은 원래 극도로 혼란한 상황에서 출발한다. 중국공산당의 창당 역시 중국의 혼란한 역사에서 태동되었다. 신해 혁명으로 왕조(王朝) 정치가 막을 내리고 형식적 민주주의와 근대적 법률 체계가 갖춰진 듯했다. 그러나 내부까지 관통되는 혁명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고 군벌에 의해 다시금 원점으로 되돌아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들어왔다. 각지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회 같은 단체가 생겨났다. 진독수(陳獨秀)가 편집장을 맡았고 후일 중국공산당 기관지가 된 <新靑年(신청년)>이 1915년 상하이에서 창간되었다. 최초로 중국어로 완역된 <공산당 선언> 역시 상하이의 사회주의 단체에서 출판했다. 이만하면 상하이는 중국공산당 태동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때마침 일어난 5.4 운동은 상하이 지식인들의 마르크스주의 연구와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공간을 더욱 크게 넓혀 주었다. 5.4 운동은 학생, 지식인, 시민, 노동자 등 광범위한 대중에 의해 일어난 민중 대연합의 실천이었고, 후일 공산주의 혁명의 토양이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민중 대연합의 가장 영향력 있었던 학생 조직과 상인 조직 모두 상하이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1919년 6월 16일 상하이에서 21개 성 대표가 참가하여 '중화민국 학생연합회'를 창설했다. 상인 조직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의 시민 단체 중에서 가장 조직력이 좋은 단체가 상인 단체라고 할 수 있는데, 전국상회조직 중에서도 상하이 총상회(上海總商會)가 으뜸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1920년 8월에는 첫 번째 사회주의청년단이 상하이에서 창단되었다.

5.4 운동을 통해서 노동자는 스스로의 계급적 지위와 운동 능력을 자각했고 대중 조직의 경험도 축적했다. 공산당 조직이 탄생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 셈이었다. 게다가 코민테른의 지도로 중국공산당의 창당은 더욱 행보를 빨리했다. 이렇게 중국공산당의 탄생은 태동부터 상하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었다. 창당 대회라 할 수 있는 중국공산당 제1회 전국 대표회의도 상하이에서 열렸다. 1921년 7월23일 전국 각지를 대표하는 53명의 당원들이 상하이에 모여 중국공산당을 창당했다. 이렇게 상하이는 중국공산당을 출범시켰다.

오삽운동은 1925년 5월 30일 상하이의 노동자와 학생 1만여 명이 조계(租界) 당국의 불법적 행위에 저항한 운동이다. 특히 오삽운동은 중국공산당이 최초로 주도한 반제국주의 민중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또한 이 운동으로 인해 중국공산당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중국공산당 발전의 큰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상하이 난징로에 있는 오삽운동 학살 사건 기념비. ⓒwikimedia.org

얼마 안 되는 당력과 당원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전국적인 운동을 지속시킨 경험에 의해 중국공산당원의 혁명에 대한 신념은 크게 고무될 수 있었다. 다 같이 노력만 한다면 혁명은 충분히 성공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난 셈이다.

오삽운동은 중국공산당 자신은 물론 국민혁명의 전개와 북벌 전쟁, 북양 군벌의 패망까지 거대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렇게 상하이에서 발생한 오삽운동은 중국공산당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래서 5․4 운동이 중국공산당을 출산했다면 오삽운동은 중국공산당을 정식으로 전국의 정치 무대에 오르게 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사실 공산당의 창당과 오삽운동 외에도 상하이의 저항 역사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중국 공산 혁명의 토양이 되었다. 1926년과 1927년 세 차례에 걸친 상하이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투쟁, 1927년에서 1930년에 걸친 농민들의 여섯 차례에 걸친 무장 투쟁은 노동자 농민의 정치의식을 성장시켰고, 후일 공산당이 국공 내전에서 승리하여 대륙을 차지할 수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

상하이 노동자와 농민, 지식인의 저항 의식이 특별히 성장한 이유는 외국의 지배에 그대로 노출된 상하이의 정치 경제적 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중앙 정부의 권위와 통제가 미흡했던 당시로서는 외국 열강의 지배력을 방어할 방법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상하이 거주 중국인의 정치 경제적 생활에 대한 외국의 지배는 갈수록 그 정도가 깊어졌다. 이는 굳이 자본주의의 확장 논리를 빌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상황이다. 외국 열강의 지배가 노골화 되자, 노동자, 학생, 지식인들이 점차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반자본주의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상하이는 경제적 측면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도시가 아님이 분명하다. 상하이의 진가는 정치적 측면에서도 충분히 발휘되었다. 중국공산당을 잉태하고 발전시켜 지금의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중국에서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더없이 중요한 도시가 바로 상하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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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

동덕여자대학교 중어중국학과에서 중국 사회를 강의하고 있다. 외교부 재외동포정책 실무위원이며, 동덕여대 한중미래연구소에서 수행하는 재중한인연구사업단 단장을 맡고 있다. 국립대만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중국 사회에 관한 다양한 이슈뿐만 아니라 조선족 및 재중 한국인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 왔다. <재중 한국인 사회 조사 연구>, <臺灣社會學想像>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 연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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