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의 교훈…야권 총선 승리하려면?

[주간 프레시안 뷰] 국민은 '진짜 변화'를 원한다

"정치란 열정과 균형감각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입니다. 만약 지금까지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을 것입니다."(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


20대 총선 레이스의 서막을 가장 강력하게 열어젖힌 '필리버스터'가 멈췄습니다. 38명의 야당 국회의원들이 펼친 무려 192시간 25분의 대장정이 막을 내렸습니다. '국회로 온 나꼼수' '마국텔(마이 국회 텔레비전)' 등 20-40을 중심으로 필리버스터는 하나의 현상이었습니다.


시민들은 야당 국회의원들의 '존재 증명'을 기꺼이 시청하고 퍼날랐습니다. 이 현상은 소셜 미디어의 울타리를 넘어 술집에서도 주요 이슈였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정치사에 이런 강력한 메시지 폭풍이 또 있었을까요?
테러 방지법을 반대하기 위한 이번 필리버스터 대장정은 단순히 의사진행 방해 발언을 넘어 하나의 운동으로 승화됐습니다. 젊은이들에겐 또 하나의 거대한 정치 페스티벌이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한계에 도전하는 정치 스피치 리얼리티 쇼를 관람하면서 '한국의 야당에게도 이런 국회의원이 있었구나' 하는 감탄을 쏟아냈습니다.


지난 2월23일 오후 7시6분에 시작해 3월2일 오후 7시31분에 종료된 필리버스터는 정의화 국회의장의 돌연한 직권상정 방침이 빚어낸 우연의 산물이었습니다. 사전에 기획된 퍼포먼스가 아니었던 것이죠. 필리버스터가 국회선진화법의 규칙을 넘어 하나의 현상으로, 새로운 운동으로 발전해 간 것도 그것의 자연발생성, 육체적 한계에 도전하는 과감한 헌신성, 국민의 기본권 침해 우려가 상당한 테러 방지법 반대라는 정의로운 목적성, 고루한 국회TV를 소셜 미디어로 퍼나르고 참여의 공간을 넓혀낸 강력한 소통성 등이 융합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파장은 강력했습니다. 선두타자 김광진이 안타를 치고 문병호가 번트를 쳤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폭발력을 가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필리버스터를 필리버스터 현상으로 만든 것은 은수미였습니다. 10시간 18분 동안 이어진 은수미의 필리버스터에는 테러 방지법을 막아야 한다는 진정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고 사람들은 그 진정성에 마법처럼 빨려들었습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쓴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모든 사람에게 기적을 부르는 요정이 찾아온다고 했었죠. 그 영감을 받아 외화시키는 것은 행운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 요정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 같지만, 준비된 사람에게만 발견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국가정보기관으로부터 고문을 당하고 아직도 그 후유증을 앓고 있는 은수미에게 테러방지법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공포였을 겁니다. 그리고 정부여당의 테러방지법은 거의 무제한 개인 사찰이 가능한 법이었구요. 정의화가 직권상정을 결정했을 때 은수미는 선거의 유불리를 떠나 국민의 기본권이 파괴될 수 있는 테러방지법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것은 의원총회에서 '테러방지법을 막을 순 없더라도 국민들에게 그 위험성을 알리고 최대한 지연시킬 수 있는 필리버스터라도 하자'는 의견으로 이어졌고 이종걸 원내대표가 이를 전격 수용하면서 거대한 정치 록페스티벌이 시작된 것입니다.


필리버스터 10시간을 넘긴 은수미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TV나 소셜 미디어 앞에 몰려들었습니다. 은수미는 가누기조차 힘든 몸을 연단에 기댄 채 마지막 말들을 이어갔습니다. 눈물이 흘러내렸고, 영상 앞에 모여든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엔 매우 복잡한 의미, 젊은날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열정과 오랜 투옥생활, 아주 미흡하다고 느낀 4년 간의 국회의원 생활, 그가 대변하려고 했던 비정규직을 비롯한 '을'들의 고단한 삶, 청년들의 절망, 나아가 혼신을 다해 무제한 토론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러 방지법을 막을 수 없다는 자괴감 같은 것이 뒤섞여 있었을 겁니다. 발밑에서부터 머리끝까지 광속으로 오가는 회한과 연민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고 그 감정은 고스란히 시민들에게도 전달됐습니다. 은수미의 길고 긴 필리버스터의 흔적인 국회속기록에는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발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물론 저는 대한민국 국민을 믿습니다. 이 법이 통과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또 누군가 고통을 당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덜 고통을 당할 수 있는 방법을, 좀 덜 고통받는 방법을 제발 정부 여당은 좀 찾읍시다. 이것은 저는 사람을 위하는 것은, 약자를 위한 정치에는…여당도 야당도 없고, 보수도 진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국민을 위해서 생각하고요."


지난 2월23일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3월4일까지 트위터, 블로그 등 소셜 미디어에서 필리버스터를 언급한 글은 무려 338만8766건이 검색됐습니다. 정말 놀라운 숫자입니다. 이 같은 언급량은 2014년 4월16일부터 열흘 동안의 세월호 언급량 214만5028건을 웃도는 폭발력입니다. 은수미가 활약한 지난 2월24일 하루 언급량만 83만5218건을 기록해 최고점을 찍었습니다. 세월호 일일 최다 언급량을 기록했던 2014년 4월17일엔 33만3312건이었습니다. 인물 연관어 분포에서도 은수미가 압도적 1위를 차지해 가장 강력한 '필리버스타'임을 증명했고 김광진, 박원석, 정청래, 신경민, 박영선, 이종걸, 강기정, 홍종학, 김용익, 이학영, 문병호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24일 은수미 하루 언급량은 50만 건을 돌파해 소셜 빅데이터 관측사상 일일 최다 인물 언급량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기존 기록은 2012년 대통령선거가 임박했던 12월16일의 박근혜 43만 건과 문재인 36만 건을 훨씬 웃도는 수치입니다.

ⓒ유승찬

필리버스터는 정치 의제로는 보기 드물게 긍정어 분포가 부정어 분포를 압도한 것도 특징이었습니다. 긍부정 연관어를 살펴보면 합법적 반대, 응원, 중요하다, 필요하다, 잘하다, 기막힌, 좋은 같은 단어들이 상위권에 대거 포진했습니다. 다소 길게 필리버스터가 어느 정도의 크기로 우리에게 다가왔는지를 몇 가지 데이터를 곁들여 살펴보았습니다. 필리버스터는 한국 정치사에 가장 뜨거운 한순간으로 기록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필리버스터 현상을 주도했던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돌연 필리버스터 중단을 결정했습니다. 놀라운 일이죠. 담대한 마음으로, 테러 방지법을 막겠다는 각오로 필리버스터를 더 진행했다면 판을 완전히 뒤흔들 수 있었는데 말이죠.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존재할 겁니다. 혹자는 앞서 인용한 베버의 열정(필리버스터)을 제어할 균형감각(중단)을 발휘한 것이라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균형감각이 아닙니다. 역풍을 우려했다는 소리도 들리고, 안보 프레임으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보수언론의 협박성 프레임 말고는 뚜렷한 근거도 찾을 수 없는 것이 중단을 결정한 더민주 지도부의 논리였습니다. 그들은 중도층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경제 프레임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선거에서 역풍이란 이기고 있는 정당이 두려워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야권분열 이후 1여다야 구도가 형성됐고 새누리당이 압승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은 가운데 야당은 판을 흔들 모멘텀을 일부러라도 찾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더민주 지도부는 새누리당의 일방독주를 막을 수 있는 기적 같은 기회를 날려버렸습니다. 필리버스터 중단 결정은 균형감각이라기보다 두려움의 소산이고,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려는 정의로운 결정이라기보다 비대위 지도부의 권력체계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19대 국회 들어 거의 처음 주도권을 쥔 더민주가 전투에서의 유리한 고지를 일부러 내준 기이한 결정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가령 김종인 비대위는 문재인 안철수 갈등의 화근이었던 혁신안마저 버리고 당무위 권한까지 위임받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체계를 완성했습니다. 혁신안을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내 반대여론조차 형성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필리버스터가 권력의 수렴청정 흐름에 원심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늘(4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정례 여론조사는 필리버스터가 더불어민주당의 존재감을 상당히 끌어올렸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더민주 지지율이 지난 주 대비 4%포인트 급등한 23%를 기록했고 새누리당 지지율은 4%포인트 급감한 38%를 기록했습니다. 필리버스터를 이어갔다면 이 같은 추세는 더 가파르게 형성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필리버스터를 통해 사생활 침해 가능성이 알려지면서 20~40세대와 특히 여성층이 크게 움직였습니다. 20대 지지율은 새누리당의 경우 전주(27%) 대비 10%포인트가 줄어든 17%를 기록했고 더민주는 전주 대비 5%포인트 증가한 31%를 기록했습니다. 30대 지지율도 새누리당은 전주 대비 7%포인트 감소했고, 더민주, 국민의당, 정의당은 각각 3%포인트, 4%포인트, 3%포인트 증가했습니다. 40대와 50대 초반에서도 지지율 이동이 감지되는데 특히 40대 새누리당 지지율은 8%포인트 감소했고, 더민주와 국민의당은 각각 5%포인트씩 상승했습니다. 새누리당 콘크리트 지지율을 보이는 60대 이상에선 의미 있는 변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성의 경우에도 움직임이 뚜렷했습니다. 새누리당 여성 지지율은 42%에서 37%로 5%포인트 감소했고, 더민주 여성 지지율은 19%에서 26%로 7%포인트나 껑충 뛰었습니다. 테러방지법에 대한 찬반 여론도 반대 39%, 찬성 51%로 나타났고 박근혜 대통령 국정지지도도 30%대로 미끄러졌습니다. 필리버스터가 테러방지법에 대한 국민 여론을 실제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했습니다.


필리버스터는 테러 방지법의 위험성을 알리고 국민의 기본권 침해에 대한 우려를 국민적으로 확산시킨 매우 효율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이렇게 강렬한 정치 퍼포먼스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도 더민주 지도부가 '안보 프레임으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낡고 단순하며 수세적인 프레임에 갇혀 끓어오르는 대중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입니다.


물론 선거에서 경제 이슈는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불평등 문제와 청년실업, 경제민주화 등의 이슈는 국민의 삶과 직결된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제기된 문제, 즉 국민의 사생활 침해 위험성이 매우 큰 법안을 회피하는 정당이 경제 이슈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테러 방지법은 단지 안보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여성들이 여론조사 데이터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핸드폰과 계좌를 뒤질 수 있다는 공포는 상존합니다. 최근 텔레그램으로의 이주 현상이 다시 나타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메시지는 대중의 관심의 크기에 따라 전파됩니다. 총선을 앞두고 공천을 비롯한 내부 시스템 정비 문제가 시급한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판을 뒤엎을 수도 있었던 거대한 흐름을 역동적으로 껴안지 못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버스터가 불러일으킨 극적 깨달음은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국회 안의 필리버스터 정신을 국회 밖에서 창조적으로 이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매우 담대한 정치적 상상력이 대중의 패배주의를 새로운 가능성으로 '새로고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권이 이번 총선에서 집권여당의 공세를 뚫고 승리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강한 열정을 조직하며,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가령 "주 40시간 일하는 사람들이 가난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샌더스의 공감과 "캐나다 국민들이 변화를 원하면, 세상의 모든 자본도 변화를 멈춰세울 수 없다"는 트뤼도의 열정, 연두연설에서 최저시급 '텐텐법안'을 발의한 버락 오바마의 프래그머티즘을 구현할 수 있다면 아직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필리버스터 운동'이 보여줬듯이, 국민들은 '진짜 변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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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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