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vs. 홍위병, 민주주의가 낳은 20세기 괴물!

[유라시아 견문] 다니엘 벨과의 대화 : 중국 모델 ①

동서의 만남

그와의 인연은 오해에서 출발했다. 참새 방앗간처럼 들리던 캘리포니아 대학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서점에서 그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이 2011년 가을. 제목은 "China's New Confucianism : Politics and Everyday Life in a Changing Society."

황당한 마음이 일었다. 중국에 대해 무얼 안다고 이런 책을 쓰나? 칭화 대학교 소속이라는 속표지를 보고는 코웃음도 났다. 마냥 삐딱했던 것은 동명이인을 잘못 여겼기 때문이다. 다니엘 벨(Daniel Bell)이라는 미국의 유명한 사회학자가 있다. <이데올로기의 종언>, <후기 산업 사회> 등을 쓴 걸출한 지성이다.

1970년대에 이념 대결의 허울을 지적하고 지식 사회의 도래를 주장했으니 선구적이었다고 평할 수도 있겠다. 조금 어깃장을 놓자면 자유주의-자본주의의 승리를 예언하는 선전선동의 색채도 없지 않았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설파하는 이데올로기적 지식인이라는 선입견이 강했던 것이다.

그랬던 이가 은퇴한 이후에는 중국 대학에 자리를 얻어 중국을 옹호해주는 책을 쓴 걸로 착각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나는 중국 신유가의 동향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신좌파들만 주시했다.

그런데 막상 서문을 읽자니 재미가 있었다. 그 자리에 서서 1장까지 내쳐 읽었다. 결국은 구입까지 했다. 학위 논문 쓰기를 잠시 미루고 계속 읽어갔다. 그만큼 흡입력이 컸다. 중국 사회의 저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예리하게 포착하는 눈썰미가 발군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여 약력을 다시 살폈다. 과연, 그 다니엘 벨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혀 다른 다니엘 벨(Daniel A. Bell)이었다.

그의 책을 몽땅 구하기 시작했다. [Beyond Liberal Democracy], [East meets West] 등 제목부터 쏙쏙 눈에 들었다. 전자에서는 이미 '새 정치'를 궁리하고 있었고, 후자서는 리콴유가 제기한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가장 진지한 학술적 천착이 돋보였다. 공자를 화자로 등장시켜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허점을 논박해가는 가상의 대화 형태도 재기발랄했다. 이론적으로 명민할 뿐더러 글재주도 빼어났던 것이다.

그 후 신간이 나오면 꼬박꼬박 구해 읽게 되었다. 2013년 엮은이로 출간한 [The East Asian Challenge for Democracy]는 직접 번역해볼까 하는 마음도 일었다. 이메일로 의사를 타진하면서 첫인사를 텄던 것이다.

장칭도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장칭의 유교 헌정과 의회 삼원제의 핵심을 간추려 소개한 책이 [A Confucian Constitutional Order : How China's Ancient Past Can Shape Its Political Future]이다.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그가 '프린스턴-차이나(Princeton-China)' 시리즈의 총괄 책임자이다. 대륙의 사상 동향, 그 중에서도 신유가의 사상을 영미권에 알리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허핑턴포스트> 등에도 간간이 칼럼을 기고하여 자유주의 정치 이론과 유교 정치 간의 대화와 소통을 이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칭화 대학교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그의 경력부터가 東西(동서) 간 대화를 상징한다. '자유주의적 좌파'에서 '유교 좌파'로 전향했다는 사상적 이력 역시 古今(고금)을 잇는다. 나로서는 동서합작, 고금합작을 견인하는 동지를 만난 셈이다.

대화의 수단 역시 동서를 넘나들었다. 영어가 모국어이고 중국의 명문 대학에서 강의하는 그에 견주자면 나는 영어도 고만고만하고 중국어도 그저 그렇다. 중국어 이름(贝淡宁)까지 있는 그의 탁월한 어학 실력에 의지하여 영어가 막히면 중국어로, 중국어가 궁색하면 영어로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양쪽이 다 마땅치 않을 경우에는 한자를 써서 보여주었다. 서구의 계몽(Enlightenment)과 대비되는 율곡의 擊蒙(격몽)을 말하고 싶었으나, 현대 중국어에는 없는 단어이고 영어로도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직접 써서 보여주니 곧바로 뜻이 통했던 것이다. 옛사람들의 필담의 재미까지 곁들인 즐거운 대화였다.

▲ 다니엘 벨 중국 칭화 대학교 교수. ⓒytimg.com

가장 덜 나쁜 제도

이병한 : 선생님은 캐나다에서 태어나서 영국에서 공부를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중국에서 교편을 잡고 자유민주주의의 대안 찾기에 골몰하고 계시죠. 민주주의가 가장 덜 나쁜 제도("민주주의는 지금까지 때때로 시행돼 온 다른 모든 형태의 정치 체제를 제외하면 가장 나쁜 체제다")라고 했던 처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십니까?

벨 : 절반만 동의합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당시에 자유민주주의의 경쟁자는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파시즘, 소련의 공산주의였어요. 자유민주주의가 가장 덜 나쁜 제도였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의 경로 또한 그 방향으로 흘렀고요. 하지만 지금은 20세기가 아닙니다. 처칠의 말이 미래에도 유효할 것인가에 대해서 저는 갈수록 회의적입니다.

이병한 : '대안은 없다'고 했던 대처의 말도 거부하시는 셈이네요.

벨 : 맥락이 조금 다르죠. 대처는 신자유주의를 관철시키고자 했던 발언이었고요. 제가 회의하는 것은 1인 1표라는 선거 제도가 과연 가장 훌륭한 지도자를 선출해내는 제도인지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 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병한 : '정치적 실력주의(Political Meritocracy)'에서 대안을 찾으신 겁니까?

벨 : 아직 단정적으로 답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은 선거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신뢰가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 요긴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화부터 허물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열린 마음으로 대안적 정치제도를 논의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병한 : 그래서 편하신 책의 제목도 [The East Asian Challenge for Democracy]였습니다. 전치사가 'over'나 'against'가 아니라 'for'입니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는 더 이상 신선한 화두가 아닌 것 같습니다. 따지고 보면 68 혁명까지 거슬러 오를 수 있지 않습니까?

벨 : 그렇습니다. 그래서 참여 민주주의, 숙의 민주주의(심의 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 등 여러 제도적 대안이 강구되어왔습니다. 일부 실행도 되고 있고요. 그러나 선거 민주주의의 한계를 도리어 더욱 심화시키는 면이 있습니다.

이병한 :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벨 : 참여 민주주의의 정점을 중국은 이미 경험해 보았거든요.

이병한 : 무슨 말씀이신지요?

벨 : 문화 대혁명이죠. 중국에서는 '大民主(대민주)'라고 했었죠. 기존의 어떠한 사회적 위계도 부정하는 거대한 민주주의의 실험장이었습니다. 68 이후 서구 좌파의 상당수도 알게 모르게 문혁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문혁은 마오쩌둥 1인 숭배가 만연하고 홍위병들이 날뛰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참여 민주와 1인 우상화가 동시에 전개되었어요.

문화 대혁명이 좌파적 극단이었다면, 우파적 극단으로는 히틀러의 등장을 들 수 있겠죠. 나치즘 역시 열광적인 대중민주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참여가 선거제 민주주의의 대안이 아닐 수 있다고 봐요. 권력을 소수에서 다수로 나누고는 것만이 '민주주의'라는 생각은 그릇된 편견입니다. 그러면서 정작 권력을 운영하게 될 소수를 어떻게 도덕적으로 훈육시킬 것인가 하는 민주주의 이전의 오래된 정치 교육은 누락되고 말았어요.

즉, 선거라고 하는 제도의 바탕에 깔려 있는 세계관, 인간관 자체를 깊이 성찰해 봐야 합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자유주의적 공리의 근거를 진지하게 다시 따져봐야 합니다. 합리적 이성을 가진 인간들의 주체적 의사 결정에 맡기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계몽주의적 인간관은 이미 여러 방면으로 부정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선거를 할 때 정책을 따지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하는 게 아니라는 경험적 연구가 산적합니다. 감정에 훨씬 휘둘리고 인지적 편견도 깊이 반영됩니다.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인간관에 기초해 성립된 정치 제도 또한 수정이 불가피하지 않을까요.

사실 보통 선거를 통하여 국가의 최고 지도자를 뽑게 된 역사는 지극히 짧아요.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0년이 안됩니다. 자유민주주의가 가장 덜 나쁜 제도라고 확신하기에는 그 역사적 검증 기간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이병한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종언' 등 자유민주주의가 득세했습니다.

벨 : 마르크스의 통찰에서도 배울 지점이 있습니다. 그 사회의 지배 이념은 지배 계급의 이념이라고 했습니다. 한 시대의 지배 이념 또한 지배 국가의 이념일 것입니다.

이병한 : 미국 패권의 산물이다?

벨 : 영국과 미국이 패권을 쥐었던 시절의 소산이라고 볼 여지가 큽니다.

이병한 : 일각에서는 선거제의 대안으로 추첨제, 제비뽑기를 주장합니다. 그게 아테네 민주주의의 본모습에 가까웠다고 하지요. (☞관련 기사 : "국회의원, 선거 대신 제비뽑기로 정하자")

벨 : 절차적 공정성을 최대로 확보하는 게 목적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추첨으로 선거를 대체하기만 하면 기존의 선거제 민주주의가 가졌던 한계가 사라지는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더 유능하고 덕망을 갖춘 인물들이 국가를 경영하는 결과에 가까워지나요? 지도자를 제비뽑기로 뽑을 거라면, 법률과 정책을 주사위로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참여 민주주의를 심화시키다 보면 결국 이런 모순에 처하게 됩니다. 현재 선거제가 안고 있는 최대의 문제는 절차적 공정성의 부족이나 평등성의 위배에 있지 않습니다. 결과물, 산출물이 갈수록 부실하다는 것입니다. 정치인의 자질, 정치의 수준이 점점 더 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병한 : 왜 그럴까요?

벨 : 현대 민주국가의 선거는 갈수록 시장화, 미디어화 되고 있습니다. 선거제 정치 문화란 소비 문화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예능 산업, 스포츠 산업과 점점 더 유사해집니다. 미국의 대선 과정은 메이저리그 야구와 너무나 비슷해요. 민주당과 공화당의 후보 선출 과정은 아메리칸리그와 내셔널리그에 빗댈 수 있습니다.

양 리그의 정상이 다투는 '가을 야구', 월드 시리즈가 11월의 대선이죠. 1년 내내 유권자는 미디어의 시청자이자 정치 시장의 소비자가 됩니다. '여름 야구', 올스타전에는 선거도 직접 하지 않습니까? 야구팬들이 직접 표를 행사해서 양대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를 선출한다는 착각을 선사합니다. 그러나 그 올스타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결국은 구단의 자금력과 성적에 좌우되는 것이거든요.

실제 선거 정치 또한 월가와 거대 자본, 거대 미디어에 좌우되면서도 유권자들은 주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착시를 갖게 됩니다. 최근에는 미디어 산업이 도리어 선거제를 기민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시청자가 참여하여 우승자를 뽑게 만드는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이 성행하죠. 정치와 시장, 미디어와 소비가 일체화되고 있습니다.

이병한 : 재미있는 비유이기는 한데, 실력과 인기의 비례를 따지자면 그래도 야구 쪽이 더 잘 반영하는 것 아닌가요? 실력이 있는 선수들이 연봉도 높고 인기도 높습니다. 반면 정치에서는 인기가 높은 사람들이 꼭 정치를 잘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게 문제지요.

벨 : 결국 초점은 참여의 강화가 아닙니다. 사실 최상의 정치는 사람들이 정치에 무심해도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왕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평안한 사회가 태평성대입니다. 선거제 민주주의는 사고를 거꾸로 하고 있어요. 정치에 참여하는 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합니다.

이병한 : 물론 대중들의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번에 교정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선거의 매력이지 않나요.

벨 : 이론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실제의 경험적 연구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지난번에 오판했던 유권자들이 다음 선거라고 달라진다는 보장이 전혀 없어요. 유권자의 표심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게 통계적 사실에 가깝습니다. 미국 같은 경우 유권자로 처음 투표했던 정당을 죽을 때까지 투표하는 경우가 90%에 가깝습니다. 영국도 70%가 넘어요.

이병한 : 일생을 통하여 정치적 지지에 변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벨 : 통계적 진실은 그렇습니다.

이병한 : 정책이나 토론을 통하여 투표를 하는 것도 아니다?

벨 : 후보 간 토론을 전후로 한 유권자의 표심도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스포츠 경기와 거의 흡사해요.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를 응원하고, 반대 후보를 비방하는데 더 열성이죠. 정말로 안타까운 사실은 정책 토론을 주시하고 면밀하게 분석하는 소수의 지적인 사람들은 정작 투표율이 낮다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민주주의 국가의 경험적 연구 결과들이 비슷합니다. 영국에서 투표를 가장 적게 하는 직업군이 교수와 의사입니다.

이병한 : 권력 견제의 차원에서는 어떻습니까. 독재 권력의 남용과 부패를 줄이는데 선거제가 일정한 역할을 하지 않나요. 그래서 20세기 내내 민주화 운동이 도처에서 이어졌던 것 아닐까요.

벨 : 이 역시 경험적으로 연구해볼 대목입니다. 선거제 민주주의 국가가 덜 부패했다고 단언하기 힘들어요. 중국과 미국, 어느 쪽이 더 부패했을까요? 쉽게 단언하기 힘듭니다.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 인도가 세계 최대의 권위주의 국가 중국보다 덜 부패합니까? 역시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인도네시아와 대만(타이완)은 민주화 이후에 부패 지수가 더 나빠졌습니다. 선거가 시작되면서 정경유착이 더 심해졌습니다. 그에 반해 완전한 선거제를 누린다고 보기 어려운 싱가포르, 카타르, 아랍에미리트(UAE) 같은 국가들의 청렴 지수가 훨씬 높지요. 즉 선거의 실질적인 효과에 대한 정밀한 사회과학적 연구가 필요합니다.

세계적인 표본 조사를 동시에 진행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는 선거 제도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맹신을 버릴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더욱 다양한 정치적 실험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습니다.

▲ 아돌프 히틀러가 대중 민주주의가 낳은 괴물이었다면, 문화 대혁명은 급진적인 참여 민주주의가 낳은 괴물이었다.

실사구시

이병한 : 그간 써오신 책들을 다시 살펴보니 사고의 궤적이 엿보이더군요. 처음에는 유교 고전의 정치철학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 점점 더 중국의 현실 정치에 주목하고 계시고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벨 : 영국에 있을 때는 당대의 중국 정치에는 관심이 덜했어요. 실은 중국에 살던 첫 10년 동안도 비슷했습니다. 제자백가의 정치 이론 연구에 주력했지요. 현실 정치를 경험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조건이 중국에 갖추어지지도 않았고요. 아무래도 변화의 계기는 리위안차오(李源潮, 현 국가 부수석)와의 만남이 결정적이었습니다.

2012년 5월로 기억합니다. 중국공산당 당원들과 외국 학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정치 개혁 포럼에 초대받았어요. 저로서는 중국 고위직 인사를 처음 만난 경험이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리위안차오와 직접 토론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죠. 매우 지적이고 밀도 높은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병한 : 어떤 얘기를 주고받으셨나요?

벨 : 공산당원의 선발과 승진에 관한 내부 시스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하나의 제도를 모든 조직과 단위에 적용하는 것(one-size-fit-all)이 적당하지 않다는 발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병한 : 그 하나의 제도가 선거를 말하는 것이겠죠?

벨 : 그렇죠. 정부의 단위에 따라 그에 적합한 제도를 시행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공산당의 간부 평가 항목이 단위별로 다르다는 것이지요. 기층에서는 인민과의 소통과 교감 등 민주적 자질을 중시하고, 지위가 올라갈수록 실력과 청렴성을 더욱 강조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왜 마을 이장부터 국가 수반까지 선거로만을 뽑아야 한다고 여기느냐.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며 서방 학자들에게 훈수도 두었습니다.

국가의 최고 지도부로 올라갈수록 더욱 복잡한 제도적 절차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경제와 과학, 국제 관계, 역사, 정치철학 등 다방면에 뛰어난 견식을 가진 지도자를 걸러내야 한다고요. 게다가 그들은 여전히 부족하고 모자라다는 자각을 안고 더욱 더 배우려는 자세를 견지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갈수록 지구화되고 변화의 속도가 빠른 현대 세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강조했죠. 기존의 관습에 물든 이들이 아니라 혁신을 습관으로 길들인 사람들을 뽑는 제도를 정교하게 만들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병한 : 흡사 기업의 최고 경영자 선발 같습니다.

벨 : 일견 그렇습니다. 중국공산당은 리더십 교육에 열성이니까요. 반면에 다른 면모도 있습니다. 14억을 이끄는 최고 지도부라면 14억 인민은 물론 중국 밖의 사람들도 고려할 수 있는 안목과 덕성도 겸비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세계의 5분의 1만큼이나 5분의 4에 대한 사고를 동시에 해야 한다는 뜻이죠.

과연 선거제 민주주의가 그런 지도자를 뽑아내는 최선의 제도일 수 있는가? 리위안차오는 아무리 민주주의 국가를 다녀 봐도 그런 것 같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저로서도 딱히 부정하기 힘들었어요. 그날의 대화가 두고두고 자극이 되었던 것입니다. 중국의 현실 정치 기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이병한 : 그래서 제출한 개념이 '정치적 실력주의'입니다.

동서 사상의 접목을 통해서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모델을 고민 중인 다니엘 벨 칭화 대학교 교수와의 인터뷰는 3월 3일(목요일) 계속 이어집니다. (☞관련 기사 : 40대가 60대보다 1표씩 더 가진다면 박근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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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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