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중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복직할 것"

[인터뷰] 7년 만의 '복직의 길' 열어 낸 김득중 쌍용차지부장

"뭉클했고, 설레였고, 눈물도 나올 것 같았다. 정말 좋았고 기뻤다."

그를 만나기 전에 여러 언론과 했던 그의 인터뷰들을 읽어봤지만, 그의 입에서 이런 단어가 연달아 나온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적은 숫자였지만, 2009년 이후 거리에서만 보냈던 동료 중 18명이 일터로 돌아간 다음날이었다. (☞관련 기사 보기 : 쌍용차 해고자 '7년 만의 출근', 마냥 즐겁지 않은 이유는?)

"당사자들도 물론 그랬겠지만, 나 역시 설레여 그 전날 잠을 거의 못 잤다"는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김득중 지부장을 2일 만났다. 김득중(48) 지부장은 지난해 12월 해고자 복직 등의 내용이 담긴 합의를 이끌어 낸 당사자였다.

그 합의의 결과물로 1일 18명의 해고자가 '7년 만의 출근길'에 올랐다. 2009년 정리해고와 공장 점거 파업 이후 7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매일 같이 바랐던 출근길인데, 정작 출근버스에 올라타는 이들의 표정은 마냥 밝지 않았다.

함께 싸웠던 이들 가운데 누구는 먼저 들어가고, 누구는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잔인한 일이었다. 더욱이 남겨진 이들의 '복직일'이 언제가 될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저 "2017년 상반기까지 노력한다"는 모호한 단어만이 합의문에 남겨졌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김득중 지부장은 "남은 동료들도 모두 (공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는 말을 인터뷰 내내 여러 차례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는 제일 마지막에 복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확신과 불안 사이에서 서성이는 것은 것은 조합원들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득중 지부장. ⓒ프레시안(최형락)


"공장 밖에 남은 동료들도 모두 돌아갈 것이라 확신한다"

인터뷰 전날 저녁, 그는 복직한 이들과 식사를 같이 했다고 했다. 지난해 여름 45일의 단식 농성을 한 이후, 한 번도 마시지 못했던 술을 "기분이 좋아" 들이켰다. 무슨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궁금했다.

"다들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죠. 아직 밖에 남아 있는 동료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겠다는 얘기가 주였어요. 저도 조급하게 서둘지 말고 차분하게 역할들을 찾자고 말했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술 한잔 하면서 서로 마음들을 녹였습니다."

'녹였다'면 그 전에는 얼어 있었다는 얘기냐고 다시 물었다.

"그렇죠. 다들 기쁘지만 그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부담감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대화의 테이블에 앉는데만 6년이 걸렸고, 다시 1년 동안 협상을 거쳐 어렵게 서명한 합의서였다. 그럼에도 부족한 합의라는 비판은 안에서 더 많았다. 7년을 기다린 조합원들은 또 기한 없은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데 대해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합의안에 대한 찬반투표를 위한 총회에서도 찬성 의견을 말하는 이는 없었다.

"우려에서 오는 반발이었죠. (그런 의견이) 없으면 이상한 거죠. 우려의 목소리들을 다 들었어요. 다만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인데…. 사실은 그 구체적인 방법을 찾지 못했어요. 어쨌든 11개월 동안 혼신을 다했고, 조합원들도 7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지쳐 있었고요. 무엇보다 대화로 쌍용차 사태가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던 결과겠죠."

합의서는 5표 차로 '어렵사리' 총회에서 통과됐다.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해고자 일괄 복직보다 우선하는 전제 조건이었다"

비록 해고자 복직의 구체적 계획이 담겨 있지는 않았지만, 사내하청업체 소속이었던 비정규직 6명의 정규직 전환을 명시한 점은 큰 성과였다.

"협상 과정에서 두 가지는 반드시 우선 전제되어야 한다고 처음부터 못 박았었어요. 손해배상 소송 철회와 비정규직 정규직화였어요. 일괄 복직이 합의된다 해도, 이 두 가지가 해결되지 않으면 서명 못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비록 소수의 문제긴 했지만, 두 가지가 해결되고 우리가 복직의 문을 열면 나머지는 어떤 방식이든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어요. 안일한 판단인지는 모르지만…."

복직 대상자 187명 가운데 비정규직은 6명 뿐이었다. 그럼에도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협상의 전제 조건으로 김 지부장이 고집한 것은 "7년 동안 정규직-비정규직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동일한 '해고자'로 함께 싸우고 함께 울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굳건하게 안 된다던 회사가 두 가지 문제를 받아들이면서 협상은 속도가 붙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현재 진행 중인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최종 승소했을 때, 받을 수 있는 체불임금을 포기했다. 1인당 4억 원의 돈을 포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 지부장은 "고마웠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2년 경과 후 현재 시점까지 근속은 다 인정 받았어요. 그리고 이번 합의를 통해 사내하청 불법파견을 회사가 인정한 거죠. 그것도 대법원의 최종 판결 없이요. 현대차나 기아차는 아직도 문제가 되고 있잖아요."

대화조차 거부하던 회사가 협상에 나서고, 안 된다던 비정규직 문제까지 받아들이는 변화를 보인 이유가 뭘까 궁금했다.

"글쎄요. 회사도, 기업노조도 7년 동안 이어진 사회적 갈등을 원만하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진정성은 있었던 것 같아요. 더 긴 시간 갈등을 이어가기 보다는 잘 마무리 짓고 새롭게 국민의 사랑과 응원을 받으면서 도약하기 위한 각각의 결단 아니었나 싶은데요."

▲김득중 지부장은 지난해 12월 노노사 합의에 서명한 당사자다. ⓒ프레시안(최형락)

"동료들이 죽어갈 때 제일 힘들었지만…쌍용차로 돌아가야만 한다"


'내가 제일 마지막에 들어가겠다'는 선언도 그런 결단의 차원이었을까?

"그냥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제 역할이고 책임이기도 하고요. 또 저는 다 들어갈 것이라는 희망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어요. 합의서가 사실 불투명한 면이 있는데, 이 합의를 했던 지부장이 제일 마지막에 들어간다는 것이 전체 조합원의 복직을 담보할 수도 있고 조금의 위로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짧게 했던 것 같아요. 불안감이 해소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런데 모르겠네요. 조합원들의 불안감이 사라지는 건 시간이 좀 지나야 할 것 같아요."

김득중 지부장은 1993년 쌍용차에 입사해 17년차이던 2009년 해고됐다. 그리고 7년째 여전히 해고자다. 쌍용차 정리해고 문제가 불거진 후 세 차례나 단식을 했고, 2013년부터 지부장을 맡아 왔다. 가장 힘들었을 때가 언제냐는 질문에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2009년 파업 당시 제가 조직쟁의실장이었어요. 그때 77일 동안 공장에서 파업하면서 예상치 못한 친구들을 만났거든요. 파업이 끝나면 저 친구들과 소주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파업 후 1년 구속됐다가 나왔는데 소주 한 잔 하고 싶던 친구 중 한 사람을 영정으로 만났어요. 또 한 명은 노조 사무실로 놀러 왔기에 소주 몇 잔 마시며 얘기를 나눴는데, 나중에 그 친구도 자살했고요. 동료들이 죽어갈 때…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이렇게 계속 해야 하나…. 누군가 또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어요."

또 한참 말이 없던 김 지부장은 "나머지 현실에서 부딪히는 문제는 워낙 힘 모아주는 분들이 많아서 크게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파업 후에 누구도 자기 얘기를 하지 못했어요. 심지어 가족에게도. 다들 '누가 파업 하랬냐, 니가 선택한 거다'라는 시선으로 봤으니까요. 그런데 정혜신, 이명수 선생님이 오셔서 심리 치료를 해주고 우리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생겼죠. 공지영 작가는 우리 이야기를 책으로 써서 세상에 알려줬고, 대한문에서 농성할 때는 주부들이 '밥셔틀'이라며 오셔서 밥을 지어주기도 했고, 천주교 신부님들 미사해 주고, 기독교 목사님을 기도회 열어주고, 불교 신자들도 법회 해주고…. 힘들고 때로 견디기 어려운 시간도 있었지만, 그런 힘이 있어서 하루 하루 견뎠던 것 같아요. 유일하게 우리가 웃을 수 있는 공간이 그런 만남들이었어요."

김득중 지부장은 "지난 7년은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을 계속 지나왔다면, 이제 우리도 숨 고르기를 해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올해는 7년 동안 한 번도 고마움의 표현을 전하지 못했던 많은 분들에게 직접 인사드리고 싶어요. 확인을 해 보니, 저희에게 손 내밀어 주신 분들이 단체로는 150곳이 넘더라고요.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한 분 한 분 차분하게 만나 뵙고 쌍용차지부의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도 말씀드리고 얘기도 듣고 하려고요."

김 지부장은 "물론 합의서 이행을 위해서 회사, 기업노조와 함께 노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완벽한 합의는 아니지만, 늦게나마 쌍용차 노사가 '함께 살자'는 취지 속에 결단을 한 것인만큼, 이행을 해야죠. 1차 복직자들은 현장의 결원 인원을 충원한 것인데, 나머지 해고자는 한꺼번에 들어가는 게 좋지 않나 개인적으로 생각해요. 동종사들이 다 주간연속 2교대제를 실시하고 있는데, 쌍용차만 아직 안 하고 있거든요. 주간연속 2교대제가 실시되면 바깥의 해고자 전원이 들어갈 수 있어요."

김득중에게 쌍용차의 의미가 뭐냐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글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청춘을 바친 곳이에요. 아픔과 즐거움이 다 묻어 있는. 누구나 그런 생각은 하겠지만, 진실이나 명예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무엇보다 내가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실을 말해주는 것 아닌가 싶어요. 꼭 돌아가야 할 곳이죠. 돌아가야해요. 저 뿐 아니라 다른 해고자들고 같은 마음이겠죠. 제가 돌아가는 것이 해고로 인해 고통 받는 동료들이 다 일상을 찾게 되는 것 아닐까요. 저는 돌아가야 합니다."


▲"저는 돌아가야 합니다." 김득중 지부장이 말했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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