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현기환 청와대 정무수석이 정의화 국회의장을 찾아가 따졌습니다. "경제위기에 대비해 제출해놓고 계류돼 있는 노동법·경제활성화법 등은 외면하고 선거법만 처리한다는 것은 정부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현 수석은 청와대에서 브리핑을 갖고 이 같은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하기까지 했습니다. 대통령의 비서가 입법부의 수장을 압박했을 뿐만 아니라, 그걸 대수롭지 않게 떠벌리기까지 한 겁니다.
전혀 별개인 듯한 두 사안을 열거한 이유가 있습니다.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긴밀히 맞물린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장실에서 벌어진 풍경이 '중도' 안철수 의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제왕적 대통령제로 불리는 강력한 대통령제입니다. 이런 권력구조에서 대통령은 국가적 어젠다를 독점하다시피 합니다.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상황, 즉 삼권분립이 엄격히 지켜지고, 언론이 국가를 견제하는 본연의 역할을 다 하고, 시민은 집회와 결사와 표현의 자유를 맘껏 구가하는 상황에서도 그렇습니다. 헌데 이보다 못한 상황, 다시 말해 민주주의가 삐걱거리고 대통령의 만기친람과 독주는 심해지는 상황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대통령의 유일 체제라 불러도 무방할 판이 조성되고, 국론은 대통령과 그가 내놓는 국가적 어젠다에 대한 찬반으로 양분됩니다. 구도가 단순화되고 양극화되는 것입니다. 현기환 수석의 '도발'은 '박근혜 유일 체제'가 지르는 구령 소리입니다.
묻고 싶습니다. 이런 판에서의 중도는 어떤 의미일까요? 안철수 의원은 이분법적 사고에 혐오감을 실어 비판했던데 그럼 이분법에서 탈피한 유연한 정치행위는 어떤 걸까요? 박근혜 대통령에 반대하면서도 새정치연합과는 다른 포즈는 어떻게 취하는 걸까요? 시비와 찬반 이전에 정말 궁금합니다.
중도의 길이 열리기 위한 필요조건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지워지는 상황, 권력이 진공상태가 되는 상황입니다. 현직 대통령의 존재감이 극소화되고 국민의 모든 관심이 미래권력에 쏠리는 상황, 현존 권력의 작동이 극도로 제한돼 국민 삶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한 상황, 작동하는 힘의 체감도보다 작동할 힘의 기대감이 더욱 큰 상황, 바로 대선 판을 의미합니다. 이때는 중도를 외칠 수 있습니다. 옳건 그르건, 현실화할 수 있건 없건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건 현금박치기가 아니라 어음발행이기 때문에 맘껏 내지를 수 있습니다. 결제일은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하지만 대선은 멀리 있습니다. 그것도 총선을 통과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 채 저 멀리 물러나 있습니다. 안철수 의원이 먼저 통과해야 하는 문은 총선입니다. 박근혜에 의한 총선, 박근혜를 향한 총선입니다. 국회를 심판해야 한다는 박 대통령의 주장과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국민의 절규가 정면 충돌하는 상태에서 치러지는 총선입니다. 이런 총선에서 중도의 길은 어떤 걸까요?
안철수 의원과 마찬가지로 상당수 국민들도 반새누리·비새정연의 정서를 갖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비새정연' 정서를 구성하고 있는 핵심 줄기는 '낡은 진보'가 아니라 '무력한 진보'입니다. '싸움질만 해대는 새정연'에 대한 싫증이 아니라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새정연'에 대한 실망입니다.
'비새정연' 정서의 핵심이 이것이라면 정방향은 우클릭하는 중도가 아니라 좌클릭하는 진보여야 합니다. 하지만 안철수 의원은 그것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전에도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앞으로는 더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합니다. 이런 안철수 의원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하나 첨언하겠습니다. 안철수 의원은 기회 있을 때마다 '낡은 진보 청산'을 주장하던데 되묻고 싶습니다. 그럼 '새로운 진보' 또는 '스마트 진보'는 뭔가요? 설마 본인이 '새로운 진보-스마트 진보'의 표상이라고 자처하는 건 아니겠죠? 그렇게 자처하는 순간 특정한 진보 인사·세력이 아니라 모든 진보 인사·세력이 낡아서 청산돼야 하는 대상으로 내몰리기 때문에 묻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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