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베네딕트 앤더슨을 보내며] 나라 없는 남자의 죽음

정치학자·역사학자·제3세계 연구자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12월 12일 저녁 강연차 방문한 인도네시아에서 죽었다.

1936년생인 앤더슨은 1957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문학사를 마친 뒤, 미국 코넬 대학교로 옮겨 1967년 인도네시아 독립 투쟁과 국민 국가의 형성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다. 그는 아시아와 남미 국가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국민주의(nationalism)를 결합시킨 "국민은 상상된 정치적 공동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우리나라에서 베네딕트 앤더슨은 '탈민족론의 거두'로 오해받아왔는데, 이는 '국민'을 뜻하는 nation을 '민족'으로 잘못 번역한데서 연유한다. nation을 언제나 모든 맥락에서 '국민'으로 번역할 수는 없다. '민족'으로 번역해야 맥락이 이해될 때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nationalism은 민족주의가 아닌 국민주의로 번역해야, 역사적 현상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베네딕트 앤더슨의 이론을 '탈민족론'으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가 말한 상상되고 기획되어진 공동체는 '민족'이 아니라 '국민'이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국민(nation)의 개념을 제한·주권·공동체라는 세 가지 상상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상상은 거짓이나 사기를 뜻하는 게 아니며, 오랜 시간 걸쳐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인식의 산물'이라는 의미다. 제한(limited)은 영토와 국경이라는 공간적 측면이다. 주권(sovereign)은 국가 권력이 신의 의지나 핏줄에 따른 종교적·신분적 질서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로 존재해야 한다는 정치적 측면이다.

마지막으로 공동체(community)는 불평등과 착취 관계에 상관없는 수평적 동지로서의 우애를 강조하는 정신적 측면이다. 국민의 출현은 자본주의 발흥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전제가 깔린다.


▲ 젊은 시절의 베네딕트 앤더슨. ⓒwikipedia.org
개인적으로 베네딕트 앤더슨을 알게 된 것은 역사학자인 그의 동생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 때문이다. 유럽 혁명사를 공부하던 중 만난 책인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 Lineages of the Absolutist State>(김현일 옮김, 현실문학 펴냄)는 봉건제로부터 자본제로 이행하는 격변의 시기를 다뤘다.


봉건제에서 자본제로의 전환은 국민(nation)의 탄생을 가져왔다. 역사적 산물인 국민은, 역시 역사적 산물인 민족(ethnic group)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국민은 근대 주권 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출현하며, 국민은 국가(state)의 물질적·군사적 자원으로 동원된다.

대한민국처럼 단일 민족이 단일 국민을 이룬 경우는 세계적으로 대단히 드물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다민족이 하나의 국민을 이룬다. 고려 시대부터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되기 시작한 한반도의 주민들은 한민족(韓民族)을 이뤘고, 120여 년 전 대한제국을 경과하면서 하나의 국민적 실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남북 분단으로 하나의 민족이 두 개의 국민으로 분열되어 고착되는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사랑한 인도네시아 국민은 20세기 중반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수백 개가 넘는 잡다한 민족들이 네덜란드 식민지 주민으로 살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종식을 계기로 하나의 국민으로 주조(鑄造)되었다. 국민은 다양한 민족을 하나로 묶는 도가니였다. 이 때문에 베네딕트 앤더슨은 "문제는 (국민들 사이에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어떤 공통된 상상이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공통된 상상이 만들어지는가"라고 역설했다.

민족 모순(national contradiction)과 계급 모순(class contradiction)이 얽히고설킨 한반도의 역사와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인식론의 정립이 중요했고, 구체적으로는 민족-국민-국가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립이 절실했다.

기본적인 사회과학 학습을 거치면 국가는 쉽사리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지만, 단일 민족으로의 통합 과정을 거쳐 왔고, 결과적으로 단일 민족이 단일 국민을 이룬 한반도 남단의 경험에서 민족과 국민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제대로 설명하는 일은 실로 쉽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한 혼란이 운동 진영에서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의 소모적 논쟁을 부추겼고, 결국 한국 노동 운동과 진보 운동의 집결체였던 민주노동당을 내파시킨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민족 문제와 계급 문제라는 숙제를 조금 더 잘 풀게 된 데는 앤더슨 형제의 저작이 큰 도움이 되었다. 1990년 우리말로 번역된 페리 앤더슨의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와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라는 부제목이 주제목이 되어, 1991년 번역된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나남출판 펴냄)이 그것이다.

개인의 지적 성장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준 인연으로 앤더슨 형제의 학문과는 아무 상관 없는 필자가 베네딕트 앤더슨의 죽음에 관심을 갖고, 미국의 인문학 잡지에 실린 짓 히어(Jeet Heer)의 글 '베네딕트 앤더슨, 나라 없는 남자(Benedict Anderson, Man Without a Country)'를 번역했다. (☞관련 기사 : Benedict Anderson, Man Without a Country)

"국민의 공통된 기억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not exist, but forged)"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주장은 현 시기 쟁점이 되고 있는 국정화 역사 교과서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시사점을 준다. 좋은 대통령만 역사를 만드는 게 아니다. 나쁜 대통령도 역사를 만든다. 나쁜 대통령만 역사책을 바꾸는 게 아니다. 좋은 대통령도 역사책을 바꾼다. 우리가 아는 역사적 진실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유해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화장되어 자바 해(海)에 뿌려질 예정이다. (필자)

▲ 인도네시아 공산당 지지자들이 1965년 수하르토 쿠데타 이후 억류되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 ⓒjacobinmag.com

베네딕트 앤더슨이 어제(12월 12일) 79세로 인도네시아 말랑에서 죽었다. 그는 국민주의(nationalism)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로 1983년 쓴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로 국제적으로 유명하다. 국민주의라는 주제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을 가졌던 이전의 학자들과 달리, 앤더슨은 국민주의를 이방인에게 연대감을 느끼게 만드는 통합적인 상상의 과정으로 보았다.

"국민주의의 병리적 특징, 타자에 대한 공포와 증오의 국민주의적 뿌리, 국민주의와 인종주의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게 진보적·세계주의적 지식인들 사이에 일반적인 시대에, 국민들(nations)은 사랑, 종종 심오한 자기희생적 사랑을 불어넣는다는 점을 되새기는 게 유용하다"고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에서 썼다.

"시, 산문, 음악, 조형 미술 같은 국민주의의 문화적 산물들은 이러한 사랑을 수천 가지의 형태와 스타일로 아주 명징하게 보여준다."


국민주의 연구자로서 베네딕트 앤더슨이 속한 나라(nation)가 어딘지를 말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앤더슨은 대영제국을 떠돈 아이였다. 1936년 중국 쿤밍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계 영국인이었던 아버지는 세금을 걷는 제국의 기관인 중국 해양세관에 근무했다. 1941년 일본 제국이 중국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자 가족은 캘리포니아로 도망갔다. 1945년 아일랜드로 돌아왔지만, 그들은 자기 조상의 땅에서 모호한 지위를 점했다. 가계(家系)의 한 갈래는 오랜 경력의 아일랜드 민족주의자(nationalists)였지만,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서 그들은 아일랜드 민족(nation)의 핵심인 가톨릭 정체성 없이도 명망을 누리는 특권 소수자로 존재했다.

앤더슨 일가는 아일랜드 사람도 아니었지만, 영국인(English)도 아니었다. 중국 경험은 제국의 밑바닥을 깨달을 기회를 주었다. 뛰어난 역사가였던 동생 페리 앤더슨과 그 자신에게, 중국 식민지 경영에서 부패와 싸웠던 아버지의 경험은 어린 시절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고 썼다.

1956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부 졸업생이던 앤더슨은 수에즈 위기를 둘러싼 항의 시위로 급진화되었다. 그는 반제국주의 학생들의 편에 선 자신을 발견했다. 그들 다수가 앤더슨처럼 식민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고, 수에즈 운하를 차지하려는 영국-프랑스의 시도를 지지한 영국 국민주의자들(British nationalists)에 반대했다. 케인브리지 대학교에서의 경험을 통해 앤더슨은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반식민주의 학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케인브리지 이후, 앤더슨은 코넬 대학교 대학원을 다니면서 인도네시아 연구에 몰두했다. 앤더슨이 미국에서 생의 많은 시간을 보낸 건 맞지만, 그를 미국인(American)이라 말하는 건 그리 정확하지 않다. 사실 앤더슨에게 고국(homeland)이 있었다면, 그건 인도네시아였다. 그는 심장과 마음 전부를 인도네시아 연구에 던졌을 뿐 아니라 정서적으론 그곳에 살았다.

앤더슨 형제의 언어 능력은 초인적이었다. 페리 앤더슨은 유럽의 주요 언어들을 읽을 수 있었는데, 가족 중에 자기 형이 진짜 다언어 사용자라고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선언한 적도 있었다. 베네딕트는 네덜란드어·독일어·스페인어·러시아어·프랑스어를 읽었고, 인도네시아어·자바어·타갈로그어·태국어로 말했다. 그는 자주 인도네시아어로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언어 습득 능력은 가족들이 타고난 것이었다. 페리와 베네딕트의 여동생인 인류학자 멀라니 앤더슨은 알바니아어·그리스어·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를 유창하게 했다.

내가 아는 인도네시아 친구 하나는 베네딕트 앤더슨이 농담을 할 수 있을 만큼 자바어를 편하게 구사했다고 놀라워했다. 그 친구는 인도네시아 전문가인 인류학자 클립포드 기어츠(1926~2006년)와 앤더슨을 비교하는 걸 좋아했다.

"나는 기어츠를 읽으며 늘 득을 보는데, 그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나의 이해를 깊게 해준다. 반면, 앤더슨은 내가 전혀 몰랐던 인도네시아의 실체(things)를 보게 만든다. 그는 여느 인도네시아인만큼 인도네시아를 잘 안다."

▲ 1965년 수하르토 쿠데타 이후 학살당하는 인도네시아 공산당 지지자들. ⓒwordpress.com

1965년과 1966년 사이, 인도네시아는 반혁명 폭력에 휩싸였고, 이는 1967년 미국이 지원한 반공 독재자 수하르토의 권력 장악으로 이어졌다. 이어진 숙청 과정에서 60만 명에서 100만 명에 달하는 인도네시아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대부분은 공산당 지지자들이었다. 인도네시아 군부가 학살 대상을 고르는 과정에 깊숙이 참여했던 미국 중앙정보부는 1968년 비밀 해제한 자료에서 "20세기 최악의 대량 학살 중 하나"로 명명했다.

수하르토 쿠데타의 폭력은 앤더슨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사랑한 사람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발견한 느낌 같다"고 썼다. 그는 쿠데타의 진짜 역사를 연대기 순으로 정리하고 수하르토 정권의 선전을 반박하는 운동(cause)에 투신했다. 1966년 코넬 대학교에서 앤더슨과 그의 동료들은 <코넬 페이퍼(The Cornell Paper)>를 익명으로 냈다. 이 책자는 쿠데타에 관한 공식적인 설명이 틀렸음을 드러낸 중요 문건이 되었고, 인도네시아 반체제 인사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읽혔다.

앤더슨은 인도네시아공산당(PKI) 총비서였던 수디스만에 대한 1971년 여론 조작용 재판을 직접 목격한 두 명의 외국인 중 한 명이었다(수디스만 재판이 1966년~1967년 열렸음을 미루어 볼 때 1971년은 1967년의 오타로 보인다). 앤더슨은 나중에 수디스만의 증언을 번역해 출간했고, 이는 인도네시아 역사의 핵심 문헌이 된다.

1972년 앤더슨은 인도네시아에서 추방되었다. 그 자신이 만든 나라(nation)의 망명객이 된 것이다. 수하르토 정권이 타도된 1998년에야 인도네시아에 돌아갈 수 있었다(베네딕트 앤더슨이 인도네시아를 재방문한 때는 1998년이 아닌 1999년이다). 사적으로 친구들을 방문하고 나서 앤더슨은 인도네시아의 주요 신문인 템포(Tempo)가 후원한 감동적인 이벤트를 갖기도 했다.

잡지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에 나온 뛰어난 기사에서 언론인 스콧 셔먼은 앤더슨의 인도네시아 귀환을 이렇게 묘사했다.

"자카르타 중심가의 고급 호텔에서 예순둘의 앤더슨은 숨 막히는 열기와 싸우려 가벼운 셔츠와 헐렁한 바지를 입고서 긴장하고 기대에 들뜬 300명의 장군, 고위 언론인, 나이 든 교수, 옛날 학생, 호사가를 대면했다. 유창한 인도네시아말로 그는 정치적 반대 세력의 소심함과 (특히 1965~1966년 대량학살과 관련하여) 역사적 기억 상실을 비판했다."

앤더슨은 수디스만과 함께 재판을 받았던 어린 중국인 공산주의자와 재회하기도 했다. 앤더슨은 그가 수디스만과 함께 죽임을 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의 기적적인 생존은 수하르토 정권이 모든 것을 파괴하진 못했다는 하나의 징표였다.

앤더스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상상의 공동체>는 인도네시아 역사라는 도가니에서 태어났다. 많은 언어와 민족들(ethnicities)로 이뤄진 인도네시아 같은 다양성의 국민들(diverse nations)은 어떻게 뭉치는가? 이 국민들은 왜 때때로 허물어지는가? 거대한 국민을 이루는 사람들을 서로 죽이지 않도록 막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때로 국민적 결합(national cohesion)은 실패하는가? 이것들은 앤더슨에게 추상적인 질문이 아니었다. 대신 인도네시아 역사에 대한 생생한 몰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상상의 공동체>는 앤더슨의 가장 잘 알려진 저작이지만, 그가 쓴 모든 게 읽을 만하다. 초국민적 테러리즘에 관한 연구 중에서 2005년 나온 <세 깃발 아래서 : 아나키즘과 반식민주의적 상상력(Under Three Flags: Anarchism and the Anti-Colonial Imagination)>(길 펴냄)보다 더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thoughtful) 것은 거의 없다.

앤더슨은 전 지구적 문화(global culture)에 대한 유창한 지지자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문학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세계 여행자인 베네딕트 앤더슨이 인도네시아에서 죽은 것만큼 어울리는 건 없다. 인도네시아는 그가 진정으로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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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원

택시노련 기획교선 간사,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사무국장, 민주노동당 국제담당, 천영세 의원 보좌관으로 일했다. 근로기준법을 일터에 실현하고 노동자가 기업 경영과 정치에 공평하게 참여하는 사회를 만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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