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 압록강 버전은 따로 있다

[강주원의 '국경 읽기'] 단둥, 한 걸음 더 들어가기 ③

<응답하라 1988>의 대북 정책

다섯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응답하라 1988>이 인기다.

프로그램 홈페이지에는 "우리가 보낸 시간에 관한 이야기", "현재를 살아가고, 견디며, 잘 지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연가"라는 문구와 함께, "누구에게나 내가 살아온 시대는 특별하기에 그날들을 선명히 기억한다"는 설명이 있다. 나는 드라마를 시청 할 때 마다 덕선이 아버지가(성동일) 홍콩을 경유해서 단둥으로 출장을 떠나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렇다면, 한국이 아닌 중국 단둥의 누군가에게 한국 사회와 관련된 어떤 연도와 시대가 특별한 의미로 기억될까? 쌍문동 골목길이 아닌 단둥의 조선족 거리에는 네 집단이 모여 살고 있다. 중국 사람(북한 화교와 조선족 제외)까지 포함하면 다섯 집단이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응답하라' 버전으로 최소 네 편의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

네 집단의 사람들은 공식적인 남북 교류의 단절을 상징하는 5.24 조치가 발표된 2010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당 지도부도 '북한 돕기 성금'에 참여했던 '용천 폭발 사건' 당시에 피해 복구 지원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단둥의 2004년, 남북 교류 활성화의 계기가 된 '단둥 페리'가 인천과 단둥을 연결하기 시작한 1998년, 한-중 수교 1992년 전후 그들이 본격적으로 모여 들었던 시절을 기억하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응답하라 2010, 2004, 1998, 1992' 이외에, 한 편의 드라마를 더 연출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응답하라 1988'이다. 1988년은 네 집단 가운데 특히 단둥의 1세대 한국 사람에게 남북 교류와 관련된 기회를 제공해준 해이다. 그들은 서울 올림픽뿐만 아니라 남북 무역 즉 남북 경협의 계기가 되었던 노태우 대통령의 1988년 '7.7 특별 선언'을 기억한다.

또 그 해 10월에 발표된 대북한 경제 개방 조치인 '남북 물자 교류에 대한 기본 지침서'의 내용이 한국 사람의 삶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들은 단둥에 하나 둘 이사를 오고 그곳에서 북한 사람, 북한 화교, 조선족과 같은 거리의 이웃이 되었다. 아래 내용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27년 전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이고 22년 넘게 남북의 사람들을 만나게 한 정책이다.

민간 상사 북한 물자 교역 허용, 민간 상사 북한 물자 중계 허용, 북한 원산지 표시 상표 부착 허용, 직·간접 교역 물자 관세 미부과, 남북 경제인 상호 접촉·방문 허용, 북한 선적 상용 선박 입항 허용, 남북 경제 교류 관련 법제 보완.

<응답하라 1988> 드라마 덕분에 복고풍이 유행한다고 한다. 대북 정책에도 복고풍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무리일까? 하지만 1988년부터 단둥의 조선족 거리에도 쌍문동의 '가족 관계도' 처럼 '네 집단의 관계도'가 있고 나름 개성 있는 네 집단을 대표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얽히고설킨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

오늘따라 10년 전 단둥 중국어 학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17살의 북한 학생과 2007년 한 달에 두세 번 진하게 술을 마셨던 두 명의 북한 아저씨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때 내가 그들을 만나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1988년 남북 교류를 허용한 대북 정책이 발판이 되었다.

▲ 단둥의 기차역에 가면 평양발 기차의 도착을 알리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2015년). ⓒ강주원

▲ 압록강 오른쪽이 리영희 선생이 유년 시절을 보낸 삭주군이다(2014년). ⓒ강주원

박지원, 손기정, 장준하, 리영희와 대화를 나누다

내친김에 15년 전부터 촬영한 사진과 현지 조사 노트들을 뒤적거렸다. 한국으로 갈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두만강을 건너 북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북한 청소년 두 명의 뒷모습을 찍었던 사진이 그때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나에게 처음으로 단절이 아닌 교류의 중-조(북-중) 국경 모습도 있음을 깨달게 해 준 장면이다.

나는 현지 조사를 할 때 습관이 있다. 때문에 10년 넘게 단둥의 이야기를 담은 노트들에는 마음 속 대화를 나누었던 네 명의 이름이 수시로 등장했다. 박지원, 손기정, 장준하 그리고 리영희이다. 모두가 시기는 다르지만 단둥과 인연이 있다. 종이 모퉁이에 씌어 있는 그들 이름 옆에는 늘 물음표가 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본 장면과 내용을) 리영희였다면 (어떻게 볼까)?"이다.

약 200년 전 압록강을 건너 그 당시 중국의 국경 역할을 하던 책문으로 향하던 박지원이 현재 나와 함께 압록강변에서 노숙을 한다면 나에게 어떤 말을 해줄까? (…) 신의주에서 단둥(그 당시 안동)으로 출근을 하면서 마라톤 연습을 했던 손기정은 내가 지금 걸고 있는 압록강대로에서 무엇을 주목해야한다고 말할까? (…) 신의주가 아닌 의주에서 태어난 장준하는 지금의 삼국 무역의 현장인 단둥을 어떻게 나에게 설명할까? (…) 압록강 너머 삭주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리영희는 압록강의 새들과 단둥과 신의주를 넘나드는 네 집단의 삶의 풍경을 보면서 어떤 해석을 내놓을까?

2014년 겨울 스승과 함께 했던 4박5일의 단둥 현지 조사 노트를 다시 읽었다. 뒷장에 연구 내용과 상관없이 써내려간 글에도 리영희 선생은 있었다.

스승과 제자의 현지 조사는 <열하일기>의 책문에서 동네 결혼식 이후 남은 중국술을 공짜로 마시는 것부터 시작했다. 차가운 압록강 강바람을 피부로 느끼면서 보트에서 북녘 땅과 사람을 접한 뒤, 스승은 리영희 선생의 고향 삭주를 건너편에서 바라보면서 추억을 이야기하고, 나는 어느 봉제 공장의 여공들을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짐을 느꼈다.

민박집에서는 남쪽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서로 열심히 찍었다. 북한 식당들을 돌아다니면서 냉면을 섭렵하고, 신의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북한 노동자 10여 명을 호텔 로비에서 지켜보다가 호텔 조식을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먹었다. 신의주를 막 건너온 트럭들이 수속하는 세관의 모퉁이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고, 평양에서 온 국제열차와 사람을 보기 위해서 단둥 기차역에 간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만을 응시했다.

보세 창고에서 북한 물류의 종류와 흐름을 파악한 뒤, 조선족 거리를 구석구석 걸어 다니면서 북한의 변화상을 해석했고, 도매 시장에서는 북한 사람들의 쇼핑패턴을 따라다녔다. 황금평에서는 현재와 미래를 토론했고 이슬비 내리는 압록강변에서 신의주를 응시하면서 밤 산책을 즐겼다. 스승과 함께 했던 이번 답사 내내 리영희 선생도 함께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 압록강 상류의 북한 국경 지역은 변화하고 있다(2015년). ⓒ강주원

▲ 2015년 북한 만포 시에 건설된 새 아파트를 보고 한국 대표 지성 31인은 선전물이라고 단정한다(2015년). ⓒ강주원

압록강대로와 두만강대로가 국경이 되다

2015년 7월, 9박 10일 동안 압록강과 두만강을 바라보면서 써내려간 글에서도 나는 리영희 선생에게 묻고 있었다.

선생님이 보고 경험했던 강변은 어떤 모습인가요? 한국 사회는 압록강변의 북한 지역에 새롭게 건축한 아파트와 집들을 보고 선전물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북한을 직접 가지 못하지만, 분명 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전히 양쪽의 사람들은 삶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다만 철조망과 도로가 2006년 전후부터 새로 등장한 풍경입니다. 한국 사회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철조망에 주목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동안 달려왔던 압록강대로와 지금 달리고 있는 두만강대로가 앞으로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더 궁금합니다. 이곳에 국경의 개념이 없던 박지원의 <열하일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불과 10년 전만해도 어디가 중국 땅이고 북한 땅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던 압록강과 두만강변의 지역들이 많았습니다.

2015년 현재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지 않던 두 강의 상류 지역조차도 도로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강을 공유하고 강폭은 계절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중-조 국경은 늘 유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스팔트와 시멘트 도로가 지나는 중국 쪽 강변은 국경이 고정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북한 쪽도 곳곳에 제방과 도로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통일 이후, 우리가 만나게 될 국경은 철조망이 아니고 이 도로들이 될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에 자리 잡은 분단의 국경은 언젠가는 허물 수 있고, 중-조 국경의 철조망도 아직은 단절의 국경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이 건설하고 있는 압록강대로와 두만강대로는 여기까지가 중국 땅임을 무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도로들을 차로 달리면서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한반도와 중국을 구분하는 국경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도로 위에서 한국 사람들은 좌우의 눈이 아닌 한쪽 눈으로만 북한을 바라봅니다.

리영희 선생님, 이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시각을 가져야 될까요?

2015년 12월 5일 리영희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덧 5년이 되던 날, 우연히 나는 10년 전 일본 오사카에서 리영희 선생과 동행한 추억이 있는 동료들과 술 한 잔을 했다. 나는 내년(2016년) 봄 그들과 함께 삭주 건너편 압록강변에 갈 것을 약속했다.

▲ 압록강에 도로가 생기기 전 풍경은 이 모습이 아닐까(2015년). ⓒ강주원

▲ 같은 장소에서 카메라를 조금만 돌리면 압록강변을 따라 신작로가 보인다(2015년). ⓒ강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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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원

강주원 박사는 북한 사람, 북한 화교, 조선족, 한국 사람 그리고 탈북자를 동시에 연구하는 인류학자다. 2006년 10월부터 2007년 12월까지 15개월 동안 단둥에서 살면서 현장 연구를 한 것을 비롯해 지난 10년간 단둥을 수없이 방문하며 수백 명의 단둥 사람과 인간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국내외 언론 및 시민·사회단체의 국경 취재 및 관광을 자문하는 일도 병행 중이다. <나는 오늘도 국경을 만들고 허문다>(글항아리 펴냄)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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