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희 기고] 한겨레 창간의 주니어 공동대표 임재경 형

[고난 속 꿋꿋이 산 사람들·⑫] 아프레-게르 문청파 프랑스적 자유인

1950~1960년대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들의 자만에 가까운 자부심은 대단했다. 대학 중의 대학이라는 그런 부풀려진 생각이다. 해방될 때까지 한반도에는 경성 제국대학이라고 '대학' 명칭을 쓰는 학교는 하나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보성전문, 연희전문, 혜화전문 등 전문학교. 경성 제국대학을 이어받은 본류가 서울 문리대다. 그러니 그런 법통을 내세워 자만하는 것이다.

문리대에서도 특히 문학부가 콧대가 높았다. 거기에 여러 갈래의 학생 그룹이 있었는데 정치과를 중심으로는 페이비어니즘(Fabianism)을 따른다는 신진회(新進會)가 규모가 상당히 컸고, 그다음 문학 취미가 있는 사람들의 정문회(政文會)가 있었다. 영문과, 불문과 등 순수 문과에서 동아리 활동이 활발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다. 다만 그 학생들 가운데는 사르트르, 카뮈 등 프랑스의 문학과 철학을 따르고 샹송을 좋아하며 명동의 음악 감상실을 몰려다니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들은 흔히 문청(文靑*문학청년)이라고 불렸다. 아프레-게르(aprés guerre), 즉 전후파(戰後派) 문청이다.

설명이 길어졌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언론인 임재경(任在慶) 씨는 이 서울 문리대 문학부의 아프레-게르 문청의 전형적 인물 중 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임재경 씨와 절친했던 아프레-게르 문청의 대표적 인물 이기양(李基陽) 씨를 소개해야겠다. 이기양 씨는 정치과 졸업 후 곧 한국일보 기자가 되었는데 그의 생활은 프랑스적이고, 그런 말이 성립될지 몰라도 샹송적이다. 그와 이야기하다 보면 화법이나 제스처가 꼭 프랑스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 같다. 한때 프랑스 부대 통역으로 일한 경력도 보태진 것 같다.

소련의 파스테르나크가 <의사 지바고>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 때다. 스스로 '장 기자'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장기영 사장은 재빨리 미국 대사관 측에 연락하여 그 소설을 구해왔다. 그리고 이기양 기자에게 그 줄거리를 간추려 일요판에 한두 면쯤 대대적으로 소개하라고 지시했다. 그 후 일요판에 소개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 기자를 포함한 몇몇 기자가 회사에 얼굴을 비치지 않는 게 아닌가. 장 사장이 소설을 반납하라고 재촉을 하여도 절벽이다. 기자 서너 명이 그 책을 쪼개어 여관에서 합숙하며 번역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인사 조치가 뒤따랐다. '닥터 지바고 사건'이라고 명명된 이 일이 한국일보의 구전(口傳) 사사(社史)에 남게 되었다.

'닥터 지바고 사건'은 약과다. 그 후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독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얻은 이기양 씨는 조선일보의 유럽 통신원으로 있을 때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세계 여자 농구 대회를 취재한다고 갔다가 영영 소식이 끊긴 것이다. 그때만 해도 동서냉전이 첨예할 때다. 프라하행은 용기가 필요했던 것인데 그게 만용이 되어 버렸다. 이기양 씨에 관하여는 언론계에서 잘 알지 못하는 비밀 이야기가 있다. 부산 피난시절 부산 범일동에 있던 육군 병원에 다른 사람 면회를 갔다가 정신 병동 경환자실에 있는 그를 만난 것이다. 꼭 프랑스 연극 배우 같은 말솜씨고 제스처다. 첫 만남에 대단한 문학 청년이고나 했다. 소위가 되자마자 가벼운 정신병으로 입원한 모양인데, 그를 잘 아는 임재경 씨는 그 이야기를 듣고 아마 양광(佯狂)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짐짓 미친 척하는 것을 양광이라 한다.

그래서 색다른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프라하로 간 이기양 씨는 거기서 아주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독일어 언어권이니 언어에 불편도 없다. 그래서 아예 영영 거기서 낭만의 보금자리를 차린 것이다. 그런 행태가 아프레-게르 문청에 어울리는 게 아닐까.

아프레-게르 문청의 기질을 이야기할 겸 이기양 씨 이야기를 길게 했다. 그런 배경이야기가 같은 문청인 임재경 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다. 임재경 씨는 대학에서, 술집에서, 음악 감상실에서 이기양 씨를 졸졸 따라다녔단다. 그 무렵 임재경 씨는 영어, 프랑스어를 아주 훌륭하게 익혔으며 희랍어까지도 손대고 있었단다.

임재경 씨의 절친한 친구에 채현국(蔡鉉國) 씨라고 있다. 역시 임재경 씨를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철학과 출신인데 정통 철학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밤낮 길거리 철학, 일상 생활의 철학 이야기만 하여 내가 '가두 철학자'라고 이름 지은 바 있다. 임 형은 그를 '파격(破格)'이란 전치사를 붙여 호칭한다. 체구는 작은데 입심은 대단하다. 누구라도 도마 위에 오르면 그야말로 작살을 낸다. 그러면서 술도 잘 산다. 아주 어려운 친구들을 금전적으로 듬석듬석 도왔다는 소문이다. 집값이 쌀 때의 이야기겠지만 어려운 형편의 언론인들에게 집까지도 사주었다고 임재경 씨가 구체적으로 네 명쯤 거명하기도 한다. <창작과 비평>의 백낙청 교수와 가깝고, 민정당의 원내총무를 오래 했던 군 출신의 이종찬 씨와도 학생 때부터 아주 친하다.

나는 그의 아버님 채기엽(蔡基葉) 씨를 민족통일촉진회에서 만나 그의 프로필을 <민족통일>에 쓴 적이 있다. 중일전쟁 때 중국에 가서 사업을 크게 한 모양이다. 전쟁이 끝나자 학병으로 갔던 우리나라 청년들이 귀국할 배편을 기다리느라고 상해에 장기간 몰려있던 것 같다. 그때 채기엽 씨가 큰 집을 빌려 그 학병들의 숙식을 도왔다는 이야기다. 소설가 이병주 씨도 그때 신세를 졌다고 두고두고 고마워했다. 귀국해서는 흥국탄광이라고 큰 탄광을 경영하고 중고등학교도 설립·운영했는데, 채현국 씨는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은신하는 친구들을 위해 탄광과 학교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다. 많은 미담이 전해진다. 임재경 씨는 채현국 씨와 꼭 형제처럼 붙어 다니다가 결국은 사돈 간이 되었다. 임 형의 박사 따님이 채 형의 며느님이 된 것이다.


내가 1960년대 초 조선일보로 옮기고 보니 임재경 씨는 경제부, 손세일 씨는 문화부에 있었다. 나는 외신부를 잠깐 거쳐 정치부, 임 형은 경제기획원 출입인데, 당시 일본 차관이 들어오고 재일교포 재산 반입도 활발할 때라 한마디로 돈이 엄청나게 돌 때다. 따라서 경제기획원 주변에서나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주변에서는 돈 냄새가 풍풍 났다. 당시 경제부총리인 장기영 씨나 국회 재경위원장이자 공화당 재정 책임자인 김성곤 의원은 돈을 잘 뿌렸다. 정계에서 언론계까지 '떡고물'이 전파되었다.

그런데 아프레-게르 문청파인 임 형은 그 떡고물을 모두 풀다시피 하였다. 많은 친구에게 술을 샀을 것이다. 사내에서는 특히 손세일 군과 나에게 자주 손짓을 했다. 그 덕에 비싼 살롱에 가서 여러 번 호강을 했다. (문화부 손세일 씨나 정치부인 나는 살롱에 갈 형편이 못 되었다.) 그중 유별났던 한 경우를 설명해 두고 싶다. 일요일이 휴무이기에 토요일 저녁 나절이면 근질근질해진다. 처음에는 돈도 아낄 겸 싼 집에서 시작한다. 임 형, 손 형과 나, 셋이다. 우선 빈대떡 집이다. 그런데 거기서 발동이 걸리는 게 문제다. 간덩이가 커진다. 명동으로 바로 진출한다. '갈릴레오'에서 마시다가 통금이 가까워져 오니 밤새도록 영업을 하는 회현동 언덕의 '유엔 센터'로 옮겨 통금해제 때까지 마신다. 그리고 청진동의 해장국 골목은 자동 코스. 거기서 따귀해장국에 막걸리 한 대접.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참 못 말리는 족속이다. 우리 집으로 가기로 했다. 집식구 눈치가 고울 리가 없다. 우리 집을 나오니 손세일 군이 자기 집으로 가잔다.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술 마시는 것도 아니고 자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낮 시간을 보내니 오후가 되었다. 임재경은 어느새 날쌔게 사라졌다. 손세일이 근처에 채현국 씨가 사는데 가보잔다. 둘이 예의도 차리지 못하고 방문하니 아, 글쎄 임 형이 어느새 집에 들렀다가 거기서 또 술상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 우리는 몇 시간 연속 술자리를 갖는 셈인가.

임 형은 많은 신문사 친구들에게 인심 좋게 술을 샀다. 예를 들어 중앙일보의 소설가이기도 한 한남철 기자는 임 형을 만나면 "재경아, 딸그랑, 딸그랑" 한다. 양주 '온 더 락'을 사라는 뜻이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 미군의 월남전 개입이 확대되고 한국군의 파병 논의가 나올 때 아프레-게르 문청 임재경 씨의 태도가 어떠했겠는가는 설명이 필요 없을 줄 안다.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선우휘 씨는 조선일보의 논설위원, 편집국장을 하면서 임재경, 손세일 그리고 나 세 사람을 참 아껴주었다. 신문사의 전통은 선배나 상사가 술을 사게 되어 있지 후배나 부하가 술값을 내면 비정상적인 일로 취급하는 것이기에, 술은 항상 선우 선배가 샀다. 참 함께 어지간히 자주 마셨다. 시국도 논하고 때로는 학술 이론도 건드려 보았다.

▲ 1989년 한겨레 부사장을 지냈던 임재경 씨가 2003년 5월 청와대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임명장을 받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그러다가 선우 선생이 중앙일보에 '물결은 메콩 강까지'라는 월남 파병에 관한 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배들 모두는 극구 말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지성인의 한 사람인 선우 선생이 그 월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하는 데 반대는 못할망정 '북 치고 장구 치고'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적어도 지식인, 지성인이면 미국의 월남전 개입을 규탄해야 마땅한 게 아니냐는 논리에서다.

그러나 선우 선생은 요지부동이다. 당시 우리는 우리와 가까운 인물 가운데 선우휘 씨와 이병주 씨를 우리가 본받을 지성인으로 존경해 왔었다. 둘 다 모두 언론인이자 소설가다. 그리고 선우 씨는 약간 중도우파, 이병주 씨는 얼마간 중도좌파라는 인상이었다. 아무튼 그때까지는 선우 씨가 리버럴하다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 후 세월이 지나고 보니 선우 씨는 점점 강경 보수가 되고, 중도좌파인 인상이던 이병주 씨도 점점 보수화하였지만 말이다. 이미 소설 사고(社告)가 나고 난 후에 집필을 말라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들은 굽히지 않았다. 임재경 씨와 나는 정릉의 선우 씨 댁까지 따라가며 만류했는데 억지를 부린 셈이 되었다.

임 형도 월남 파병 반대에 투철했지만 나도 파병 반대의 글을 잡지에 쓰기도 하고, 신문에 파병 반대의 글을 받아 싣기도 하였다.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의 서인석 의원이 파병 반대였는데 나는 그를 강하게 설득하여 소속당의 방향에 어긋나는 파병 반대론을 조선일보 1면 찬반 토론 시리즈에 싣게 했다. 참 명문이었다. 그 후 임 형과 나는 공동의 친구가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정답게 술을 마시다가 월남 파병 이야기에 이르렀는데 그게 지뢰가 되고 말았다. 독일서 박사 학위를 하고 돌아온 그 친구는 열렬한 파병 찬성론을 폈다. 임 형의 반론이 불꽃을 튈 수밖에 없다. 험하게까지 된 논전 끝에 술자리는 서운하게 헤어지고 말았다. 임 형은 참 파병 반대에 강경했다.

내가 조선일보를 떠난 후의 일이라 사후적으로 알았는데, 임 형은 조선일보 시절 프랑스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1년간 프랑스 대학(소르본 대학)에서 유학하고, 장학금이 끊긴 후 반년 동안 연장하여 더 있었다. 그리고 독일의 대학(서베를린 자유대학)에도 1년 동안 유학했다. 공부한 이야기나 학문 이야기는 복잡하니 접어두고 인간을 느낄 수 있는 술 이야기나 소개해 보자. 참, 학문 이야기로 한 가지 에피소드만 말해 두자. 소르본 대학에서 프랑스 혁명사의 대가인 소블 교수의 강의를 청강할 때다. 청강을 미리 양해받았기에 교수도 임 형을 기억하고 있던 것 같다. 강의 도중에 교수는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인용하며 학생들에게 읽어 보았냐고 묻는다. 반응이 신통치 않으니 임 형을 지목한다. 박학한 아프레-게르 임은 파리와 런던 두 도시에 걸친 그 소설의 요점을 설명하여 소블 교수를 만족시켰단다.

파리의 싸구려 하숙집 동네에서 술 생각이 나서 동네의 술집에 가끔 들렸다. 우리식 대폿집인데 스탠드에 앉아 잔술을 시켜 마시는 구조로 된 모양이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많이 경영하여 프랑스 본토에 특히 북아프리카인들이 많다. 요즘도 무슬림들의 문제가 시끄러운 게 아닌가.

한번은 스탠드에서 한 잔 시켜놓고 마시고 있자니 알제리인인 듯한 체격이 좋은 청년이 옆에 앉더니 한잔 사겠다고 하며 잔술을 시켜 준다. 그리고 경계했던 대로 조금 있다가 임 형에 바싹 다가앉더니 몸을 더듬는 게 아닌가. 이미 생활 정보로 들어둔 바도 있다. 호모구나, 겁이 났다. 그렇다고 싸울 수도 당장 도망칠 수도 없다. 한참 참아가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고 그 친구가 경계를 늦춘 틈에 화장실에 가는 척하다 밖을 향해 냅다 뛰었다. 밖으로 나와서는 필사의 도주다. 그 알제리 청년인가도 줄기차게 쫓아온다. 임 형이 육상 체질이 아닌데 몹시 몸 달았을 것이다. 여하간 죽기 살기로 이를 악물고 뛰었다. 한참 뛰고 나니 이번에는 "뿡가, 뿡가"가 요란하다. 필사적으로 뛰어가는 젊은이를 수상히 여겨 경찰차가 쫓아온 것이다. 뒤쫓던 아프리카 청년은 사라지고…. 그것도 드물고도 좋은 경험이다.

이 글은 본격적인 전기가 아니라는 전제에서 시작하였다. 내가 가까이 지냈던 좋은 사람들의 스케치를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서이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까지 쓰기냐고 임 형이 역정을 낼지 모르지만 재미도 있고 하여 파리에서의 에피소드를 더 소개해야겠다.

파리에서 장학금으로 대학에 다니는 임 형에게 술값의 여유가 있을 리가 없다. 나와 비슷하게, 아니 나보다 더 주당인 임 형이 참 술이 마시고 싶었을 것이다. 주당끼리는 그 심정을 안다. 그러던 차에 한국에서 명사들이 와서 고급 호텔에서 리셉션이 있었다. 정일권 총리와 모윤숙 시인 등 일행이란다. 술이 고팠던('배가 고팠던'의 표현을 빌려) 임 형은 오랜만에 즐긴 모양이다. 다음은 그가 쓴 그때 관한 회고를 옮긴 것이다.

"웨이터에게 위스키를 한잔 달라고 하여 그 자리에 서서 죽 들이켰다. 이것이 리츠 호텔 기억의 전부다. 파리 번화가의 하나인 '메트로(지하철) 오페라의 계단에서 올려다 보이는 네온 광고판', '덜커덩거리는 자동차 바닥', '컴컴한 방의 좁은 벤치', '병원 수술대 같은 침대', '사복 두 사람이 내 겨드랑이를 끼고 오르는 층계'…. 그 다음 날 오후 간신히 떠올린 토막 난 기억의 필름인데 사고를 친 건 틀림없었다. 2~3일 뒤 어느 병원에서 200여 프랑의 응급 진료비 청구서가 날아왔다."

▲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함께 조선일보에 있다가 우리보다 먼저 조선일보를 떠난 이영희(리영희라 표기를 바꾸었다)씨가 권력 당국의 비위를 거슬러 구속되었을 때다. 임재경 씨는 이영희 씨를 깍듯이 존경하고 모셨다. 임 형이 갑자기 서울신문 주필 실로 오더니 이영희 씨의 석방 진정서에 서명을 하란다. 진정서를 살피니 아무도 서명한 사람이 없고 나를 대표서명자로 할 요량인 것 같다. 작전상 그럴듯하다. 서울신문 주필을 첫 서명자로 하는 게 정부에 내놓는 데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서울신문 주필이 서명했으니 하고 마음 놓고 서명을 할 것이다. 임 형은 그 점을 노렸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임 형, 그렇다고 내가 겁이 나서 서명 못 할 줄 알고!" 나는 즉석에서 서명하고 임 형은 대만족을 하였다.

서명운동은 아주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한겨레의 김효순 주필이 그때 맨 첫 번으로 서명했느냐고 묻는다. 이영희 씨나 다른 사람 모두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김효순 씨는 나에 대한 평가를 얼마간 바꾼 듯하다.

조선일보에서 정치부 차장까지 지낸 임 형은 경제기획원 때 장기영 부총리와 맺은 인연으로 장기영 씨가 사주로 있는 한국일보의 논설위원으로 옮겼다. 나도 사정이 있어 서울신문으로 옮겼을 때라 그때의 사정은 자세히 모른다.

신문사 편집국에는 150명 이상 200명 가까운 기자가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사람끼리 작은 그룹이 되기 마련이다. 조선일보 편집국에서 임 형과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이종구, 신홍범, 박범진 기자 등등이었다. 그러다 보니 서울 문리대 출신이 중심이다.

1974년 이른바 언론자유운동(투쟁)이 일어났을 때 동아일보가 가장 대규모였고 그다음이 조선일보였다. 그리고 공교롭게 임 형과 내가 가까웠던 사람들이 이 언론자유운동의 주동이 되었다. 나는 서울신문에 있었지만 관심을 가져 박범진 기자를 불러 만나고, 일종의 타협안을 가지고 밤에 방우영 사장의 사직동 댁을 방문하여 어설픈 중재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다음날 유건호 부사장으로부터 회사를 옮겼으면 그 회사 일이나 신경 쓰라는 공박을 받기도 하였다.

한국일보로 옮긴 임 형은 나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 조선일보의 언론자유 투쟁파들이 진을 치고 있던 여관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가서 격려하였다. 아주 한패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그 여관을 기습 방문한 조선일보 경영자와 마주치고 아주 심한 언쟁을 하기까지 이른다. 그 언쟁의 내용은 언론계에 널리 알려진 일이고 하여 여기서는 설명을 보류한다. 임 형은 그때부터 언론자유 투쟁에 나선 셈이다. 물론 신군부 쿠데타 후의 언론계 숙청 때 걸려 한국일보를 떠나게 되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언론자유 투쟁에 전념하게 되지만 말이다.

신군부 쿠데타가 난 후 임재경 씨는 '김대중 과도내각 명단'에 포함되는 억울한(영광된?) 누명을 쓰고 남영동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하고 서대문 형무소 살이도 잠깐 동안 하게 된다. 계엄사가 발표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전모' 가운데 포함된 '김대중 과도내각 명단'에는 그가 '경제 담당'이라고 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김대중 씨 측에서 '민주제도연구소' 설립을 구상한 모양인데 그 연구위원으로 거론된 사람들이 과도내각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사장 예춘호, 소장 이문영, 역사문화 담당 백낙청, 언론사회 담당 송건호, 경제담당 임재경 등등의 명단이 신문에 났다.

남영동에서는 풋내기 파견 수사관이 가혹한 고문은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송건호 씨가 당한 혹독한 고문과는 달랐다. 그리고 서대문 형무소에서는 오래 고생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노력한 덕인지 몰라도 계엄사가 '공소 기각'을 한 것이다. 여하간 그는 '김대중 과도내각 명단'에 올라 해직 기자가 된 것이다.

해직 기자가 된 그는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 있는 국제문제연구센터(CFIA)에 1년 동안 연수하는 행운을 갖게 된다. 미국에 있는 형제들이 노력하였고 특히 <창작과 비평>의 하버드 박사 백낙청 교수가 많이 도왔다고 한다. 그곳을 아는 한국 사람들 가운데 짓궂은 이들은 CFIA(Center for International Affairs)라 하지 않고 CIA(중앙정보국)라고 놀린다. 임 형이 간 1년에는 마침 정치인 김대중 씨도 그곳의 펠로우로 가 있어, 둘이 만난 자리에 있던 에드 베이커 하버드-옌칭연구소 부소장은 "과도정부 수반과 과도내각의 각료가 초면인 것 같으니 제가 소개해 드려야겠군요" 하고 농담을 하기도. 그렇게 같은 연구소에서 거의 1년 동안을 함께 지냈으면서도 임 형은 김대중 씨의 정치 행보를 따라가지 않았다. 언론인으로 일관한 것이다. 그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임재경 씨는 회고의 기록에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약칭 언협)' 결성의 계기가 되는 이른바 '검단산 결의'를 중요시한다. 동아투위의 이부영과 성유보, 조선투위의 신홍범, 80년해직기자협의회 대표 김태홍의 넷이 1984년 여름 팔당의 검단산에서 해직 기자 전체의 힘을 모으기로 한 것이다. 언협의 의장엔 송건호 씨가 추대되고 공동 대표에 임재경 씨 추대 논의도 나왔는데 <창작과 비평>의 일 때문에 사양한 모양이다. 그 이야기는 한겨레신문 창간 후 송건호 씨가 사장이 되고 임재경 씨가 부사장 겸 편집인이 되는 일과 관련해서 의미가 있어 해두는 것이다.

해직 기자들의 주류는 동아일보(130명 선)다. 그리고 훨씬 숫자는 적지만 그다음은 조선일보(30명선)다. 흔히 말하는 '동투' '조투'다. 해직 기자들의 여러 흐름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한겨레가 성사되었는데 그러자니 상징적 인물로 동아일보 측의 송건호와 조선일보 측의 임재경을 내세우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송건호 씨가 사장으로 시니어 대표이고, 임재경 씨가 부사장 겸 편집인으로 주니어 대표인, 말하자면 공동 대표 격이다. 임재경 씨가 한겨레를 떠난 후 부사장제는 없어졌다.

임재경 씨는 어학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 영문과 출신인 데다가 미국, 프랑스, 독일에 유학을 하여 영어뿐 아니라 프랑스어, 독일어에도 능통하다. 그리고 대단히 학구적이어서 평소에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사고가 학문적 기초에 자리 잡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높은 수준의 저술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었다. 본인도 언론인적 저술이 아니라 언론 아닌 학술적 저술을 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종로2가 낙원동 옆 골목에 오피스텔을 하나 얻고 연구하려는 자세를 갖추었었다. 오피스텔 서가에 보면 수준 높은 원서들이 진열되어 있어 부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주위의 그런 기대에 못 미쳤다. 역작은 80이 다 된 지금까지 아직도 안 나오고 있다. 내 나름대로 짐작하는 까닭이 있다. 첫째로 그는 연구 테마를 너무 무리하게 잡은 것 같다. 독일 유학에서 독일 현대사 연구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바이마르공화국에서 나치 히틀러의 등장이라는 독일 현대사는 많은 사람이 흥미를 갖는 중요한 시기이다. 그런데 그 시기에 관한 연구는 엄청나게 많이 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한국에 앉아서 그 시기에 관한 새롭고 특출한 연구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차라리 한국 안의 문제를 연구 과제로 삼았더라면 싶다. 그랬으면 무언가 이미 나왔을 것이다.

한 가지 생각되는 게 더 있다. 왕래가 편리한 위치에 오피스텔을 마련하고 연구실로 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니 친구들이 얼마나 많이, 자주 찾아들겠는가. 그는 바둑을 좋아한다. 아예 바둑판을 마련해 놓았다. 친구가 오면 자주 바둑 몇 판씩 두게 된다. 연구자에게 그게 얼마나 시간 낭비인지 짐작해 보면 알 일이다. 그리고 저녁 나절이 되면 거의 매일이다시피 대폿집에 가게 된다. 그가 술을 좋아하기는 하나 나이가 들면서 많이는 안 마신다. 폭음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여하간 그러한 일들은 연구에는 엄청난 지장을 주는 것이다.

임 형은 한때 <창작과 비평> 발행에도 편집고문으로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백낙청 교수와 무척 가깝다. 백 교수는 임 형의 연구에 많은 기대를 걸었었다. 그런 백 교수가 나중에는 얼마간 실망하는 말을 나에게까지 털어놓는다. "낮은 자주 바둑을 두고, 저녁에는 으레 친구와 어울려 술집에 가고…." 나도 엉망이어서 남의 말 할 형편이 못되지만 임 형의 학문적 성취를 기대했던 나로서도 참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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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언론인 출신으로 김영삼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역임했다. '비판적 보수주의자'로 불리며 이념을 떠나 보수와 진보 양쪽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원로 지식인이다. 프레시안에 연재한 기고를 바탕으로 <언론·정치 풍속사>를 냈고 이후 대담, 연재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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