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희 기고] 한겨레 창간 이룩한 송건호 선생의 민낯

[고난 속 꿋꿋이 산 사람들·⑪] 항상 당위를 강조한 아주 소심한 선비

훌륭한 언론인의 평가 기준을 놓고 생각할 때 언론 자유가 문제 되지 않는 선진국에서와 언론 자유가 위협받고 있는 그 밖의 나라들에서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하여 미국과 한국에서의 평가 기준이 다르다. 미국에서는 흔히 월터 리프만, 또는 제임스 레스턴을 이야기 했었다. 언론의 수준과 영향력이 기준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수준과 영향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언론 자유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얼마나 용감하게 그 언론 자유를 위해 투쟁하여 왔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만약에 대표적인 언론인 한 사람을 고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송건호 씨라고 많은 사람이 말할 것이다. 최석채 씨나 천관우 씨도 거론되기도 하나 끝내 조금만큼도 굽히지 않고 싸워낸 사람은 송건호 씨가 아닌가.
송건호 씨에 관하여는 이미 평전도 나와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따라서 이 글은 총체적인 송건호론을 하려는 게 아니라 다만 내가 직접 겪은 송건호 씨에 관한 여러 이야기의 조각들을 모아서 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까 하는 것이다. "시종의 눈에 영웅은 없다"라던가. 송건호 씨를 얼마간 가까이서 접한 나의 눈도 비슷할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그는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양심분자일 뿐이다. 소심하고 겁이 있는 것 같고….
언론계와 대학의 선배라서 선배라고 호칭하는 게 익숙한데, 우선 송건호 선배는 어리숙한 면이 있다. 약삭빠르다, 까다롭다 등의 표현은 전혀 안 맞는다. 조선일보, 민국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 등 많은 신문을 옮겨 다녔기에 언론계에 지인이나 친구도 많다. 그 가운데 조선일보에서 출발한 이정석(李貞錫) 씨와는 아주 절친했다. 송 선배가 한국일보 외신부 차장으로 있을 때다. 전화가 걸려 왔다. 받으니 "OO 통신사인데 지금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죽었다는 지급전이 들어왔으니 받으세요"하는 것이다. 송 차장은 긴장하여 온 편집국에 소리쳐 알리고 원고를 받기 시작했다. "워싱턴발 AP지급전=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편집국장이 달려오고, 이어 사장도 편집국에 올라오고, 송 차장이 받아쓰는 원고 한장 한장이 릴레이 되어 갔다. 그렇게 몇 분 동안 계속되다가 전화선 저쪽에서 웃음이 터졌다. 송 차장은 "너, 정석이구나, 장난쳤구나." 나중에 이정석 씨는 한국일보에도 분명 외국 통신사 직통의 텔레타이프가 있는데 그 무슨 멍청한 받아 적기냐고 익살이다. 송 차장은 이정석 씨에게 "너, 장기영 사장이 가만 안 둔다더라"고 말하고. 통신사나 신문사의 텔레타이프는 에이피(AP), 유피아이(UPI) 등 통신의 기사를 동시에 전한다.
한국일보가 조간이었는데 지방판은 오후 6시쯤 지나면 나온다. 한번은 오종식 주필이 3층에서 2층 편집국으로 급히 내려오며 "송건호가 누구야!"고 노기한 소리를 지른다. 문화면에 박태선 장로의 신앙촌 르포 기사가 송건호 외신부 차장 명의로 실린 것이다. 여하간 그때 언론계에서 사교(邪敎) 비슷하게 간주하던 신앙촌의 르포를 한국일보가 실을 수 있느냐는 것이 오종식 주필 분노 폭발의 원인이다. 송 차장이 나타나지 않아 호통은 없이 끝났다. 그러나 의문은 남게 되었다. 외신부 차장이 굳이 박태선 장로 신앙촌의 르포를 쓸 이유가 있었나. 그만큼 평가하는가. 하기는 일부에서는 신앙촌 공동체 생활의 일치단결된 모습을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였다. 그러니 송 차장이 용감하게 동조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여하간 의문은 계속 남아있게 되었다. 송건호 씨와 박태선 신앙촌이 무슨 관계인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 의문이 풀리는 듯했다. 그때 한국일보의 부장급이었던 한 인사가 그 르포를 장기영 사장이 송건호 씨에게 직접 지시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털어놓아서이다. 장기영 씨의 각 방향의 관심과 교제에 비추어 볼 때 있을 수 있는 이야기다.
송 선배와 내가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에 함께 있게 된 60년대 말의 일이었던 것 같다. 행정구역 통폐합 안이 보도되었는데 거기에 보면 충북을 나누어 부분 부분을 충남, 경기, 강원도로 붙여주고 충북 자체는 없앤다는 것이 있었다. 송 선배와 나는 같은 충북 출신이다. 송 선배는 일단 우선 충북 분할안에 수긍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다음 날 회사에 나와서는 "그것 생각해 보니 괘씸한데…. 왜 충북을 없애려 해…" 한다. 사고나 행동이 좀 굼뜨다. 민첩하지 못하다. 오래 생각해서 결론을 내린다. 충북 사람을 놀리는 농담에 "아버지 바위 굴러유" 하니 아버지는 이미 바위에 치였다는 게 있다. 행동이 매우 느리다는 놀림이다. 그리고 그 후 충북이 소년 체전에서 계속 1등을 하자, "아버지 돌 굴러유" 하니 아버지는 "피했다" 하더란다. 송 선배나 나나 좀 느린 편이다.
▲ 1985년 1월 25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서 송건호 당시 한겨레신문 발행인이 한겨레 신문 창간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논설위원실에서 오후 늦게 일을 하다 보니 둘이 남게 되었다. 저녁 식사시간쯤 되었을 것이다. 송 선배는 갑자기 "아이고 갈비나 한번 실컷 먹어보았으면~"한다. 놀랐다. 그가 남긴 글에도 나온다. "고기를 실컷 먹어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때 논설위원은 고기를 실컷 못 먹을 만큼 박봉은 아니었다. 또 회사 월급 말고도 외부 원고료, 강의료, 방송·TV 출연료 등이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런 푸념이 나왔을까. 그것은 그가 책을 많이 사기 때문이다. 헌책방을 자주 다니지만 신간도 주로 수입 일본 서적을 많이 샀다. 그러니 생활비를 주고 나서의 용돈이 책으로 다 나가고 갈비 먹을 돈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는 술을 별로 들지 않으니 술 이야기가 아니고 갈비 이야기다.
어느 날 퇴근 무렵이 되니 나에게 책방에 같이 가잔다. 그는 영어도 잘하지만 주로 일본 서적을 읽는다. 해방 직후 대학에 들어간 세대이니 일본 책에 익숙해서일 것이다. 종로통에 있는 외국서적 취급점에 가서 새로 들어온 일본 책을 살펴본다. 그리고 한두 권 고른 후 이왕 함께 나왔으니 자기 집에 같이 가잔다. 흑석동 조선일보 사주 집 밑쪽 길가 뒷골목에 있는 허름한 집 앞에 당도하니 책을 와이셔츠 밑쪽으로 감춘다. 부인에게 들키면 "또 책이냐"고 핀잔인 모양이다. 자기 방에 들어가자 책을 꺼내 놓는다. 벽면 그득한 서가에는 책이 꽉 차있는데 한쪽은 약간 검은 기운이고 또 다른 쪽은 밝은 색이어서 책의 구입연대를 알 수 있을 듯했다. 송 선배는 역시 책벌레다. 나도 책벌레인데 다만 나는 별로 읽지 않는 책벌레라는 차이이다. 송 선배는 나와 서울 법대 동문이라고 했는데 책을 살펴보니 법률 관계 책은 거의 없다. 역사, 사회, 경제, 철학 등 흔히 말하는 사상 서적이 거의 전부다. 관심 분야가 나와 매우 흡사한 면이 있다.
서울 법대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첨가할 것이 있다. 한번은 모교에서 장학금을 내달라는 편지가 왔다. 그 이야기가 화제가 되니 송 선배는 펄쩍 뛴다. "서울 법대 사람들은 입신 출세주의자가 대부분이다. 거기에 장학금을 보탤 이유가 없다. 차라리 딴 분야의 학생들은 몰라도."
사상계에서 조선일보로 왔다가 동아일보로 옮긴 손세일 씨는 임재경 씨와 함께 나와 셋이 어지간히 몰려다녔었다. 동아일보의 실세 간부가 된 손세일 형이 조선일보 논설위원인 나를 만나자 더니 마침 동아일보의 정치 담당 논설위원이 공석이 되었는데 나보고 오란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지만, 그때는 동아일보가 조선일보 보다 그 명성이 훨씬 위였다. 물론 봉급도 더 높고. 그러나 나는 회사의 월급을 받으며 1년 외국 유학을 한 적이 있어 그런 조선일보에 신세진 일 때문에 가볍게 회사를 옮길 입장이 아니었다. 생각해 주는 친구가 고맙기는 했지만 사양했다. 그래서 손세일 씨가 점을 찍은 것이 송건호 논설위원이다. 송 선배는 동아일보의 정치담당 논설위원으로 옮겼다. 인생에 있어서 우연이 중요한 계기가 될 때가 많다. 나는 나대로, 송건호 선배는 송 선배 대로 이 동아일보에의 이동 문제는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이 되었다.
나는 얼마 안 있어 본의 아니게 서울신문 편집국장으로 차출당하는 몸이 되었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사주 간에 사람 빌리기 이야기가 된 결과라 할까. 송 선배는 동아일보에 옮긴 후 언론 파동을 거치며 일생의 중대한 전환기를 맞는다. 송 선배는 동아일보 정치담당 논설위원, 나는 조선일보의 정치담당 논설위원. 둘은 청와대가 마련한 정치담당 논설위원들의 모임의 멤버가 된다. 가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3선 개헌 후 대통령이 되고 유신을 하기 전의 어느 시점이었을 것이다. 지내놓고 보니 그때 박 대통령이 정치적 선택을 놓고 여러 가지 구상을 굴리고 있을 때였던 것 같다. 여하간 한번은 논설위원들과 술을 엄청나게 마셨다.
김삼웅 씨가 저술한 <송건호 평전>에는 내가 쓴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다.

"박정희의 손길을 끝까지 거부한 송건호에게, 박정희와 관련하여 한 가지 '비화'가 전한다. 당시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있던 남재희(나중에 민정당 국회의원, 노동부 장관을 지냄)의 전언이다. 유신 전, 8대 국회 때의 일이다. 그때 박 대통령은 언론계를 포함한 각계 인사들과 부지런히 접촉했다. 유신 후에는 달라졌지만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박 대통령은 대여섯 신문사의 정치담당 논설위원을 청와대로 초대하여 푸짐하게 술을 냈다. 나는 조선일보 정치담당 논설위원으로 참석했는데, 동아일보의 유명한 송건호 씨도 있었다. 안주는 중국 음식에 술은 시바스 리갈이었고, 박 대통령이 계속 술잔을 돌려서 모두 취해 버렸다. 박 대통령은 담배도 뽑아 권하면서 불도 붙여주는 파격적인 친절을 베풀었다. 대통령과 논설위원 사이라는 벽이 거의 무너졌다. 나중에 당시 김종신 공보비서관에 들은 이야기다. 송건호 씨가 소피를 보려고 화장실에 갔을 때 박 대통령도 거의 동시에 화장실에 가게 되어 나란히 서서 생리 현상을 해결했다. 그때가 방광의 압박을 풀었기에 기분이 좋을 때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송건호 씨를 좋게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다. '송 선생, 내가 송 선생을 뭔가 꼭 하나 도와주고 싶은데 원하는 거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각하, 요즘 지방에 공장들이 엄청나게 세워졌다 하는데 저는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한번 보고 싶습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욕심 없고 순진한 부탁이다. 그 덕(?)에 송건호 씨는 나중에 산업시찰단에 포함되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세계 여러 나라의 발전 과정을 연구하고 싶다고 했으면 연구 자금을 두둑이 타냈을 것이다. 사실 그 모임에도 참석했던 경향신문의 이명영 씨는 '김일성이 여럿 있었다는 것을 연구하겠다'고 하여 두둑한 연구자금을 타냈으며, 후에 <김일성 열전>을 저술하기도 했다. 송건호 씨는 그런 대쪽 같은 선비였다."

각사 논설위원 10명 가까이가 2주간 동남아를 여행한 일이 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호텔에서 일행이 한가롭게 잡담을 하던 끝에 송건호 선배가 관상 이야기를 하였다. 나름대로 관상을 보는 이론이 있었다. 확인은 해보지 않았지만 송 선배의 동생이 관상 전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신통한 일이다. 그 자리에서 송 선배는 임방현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유독 지목하여 "관운이 보인다"고 하였다. 신통하게도 그 관상이 정확하여 얼마 있지 않아 임방현 씨는 청와대로 옮겨 특별 보좌관, 대변인이 되었다. 그 호텔 방에서 송 선배는 두 번째로 나를 지목하였다. "약간 관운이 보인다. 한 10년쯤 후다." 역시 신통하게도 나는 미구에 서울신문으로 옮기게 되고 10년 후쯤에 낙하산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출마하게 된다. 송 선배는 임방현 씨와 나의 관상만 말하였지 다른 사람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논리적인 추측인지, 진짜 관상을 보는 눈이 있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위의 두 경우는 여하간 적중하였다 할 수 있다.
송 선배는 온순하고 용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남아 단체 여행에서 특출한 면을 보였다.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타일랜드,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을 다니면서 가까운 버마(미얀마)를 빼놓은 것이다. 송 선배는 혼자서 용감하게 예의 그 큰 카메라를 걸치고 일행에서 이탈하여 버마 여행을 감행하였다. 감행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버마 여행 후 다시 일행과 합류하였다. 그때만 해도 버마와의 관계가 원만한 것은 아니었고 버마의 독재 체제는 약간 위화감을 주는 상황이었다.
동남아 여행에서의 스캔들급 이야기 하나를 털어놓아야겠다. (이 이야기는 안 하는 것인데….) 젊은 남성들이니 적선 지대 술집에 가지 않았다고 할 수가 없다. 많은 사람이 단체로 가니 그것도 서비스인지 대단한 미인이 한 사람 끼어있다. 모두 연장자인 송 선배에 그 미인을 양보하였다. 모두 양보하고 송 선배는 사양하고 하는데 일행에 끼어든 일행 아닌 언론인이 날름 차지했다. 송 선배를 원망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송 선배는 그것도 시찰이라고 적선 지대까지는 가기는 갔으나 여자는 가까이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에서 지켜본 송 선배의 논설이나 그 밖에 잡지 등에 발표한 그의 글을 읽고서의 느낌은 그의 논설은 새로운 분석을 시도하는 측면보다는 명분을 따지고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당위론을 내세우는 면이 강하다는 것이다. 분석적 측면보다 당위론적인 측면이 두드러진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건방진 이야기이지만 이론적 구성이 출중하다기보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명분론이 강하다고 하겠다. 송건호 씨가 남긴 글 가운데 그의 언론인으로서의 수난의 나날을 기록한 '고행 12년, 이런 일 저런 일'은 꼭 읽어 둘만 하다. 압제하에 양심적인 언론인이 어떻게 고난의 생활을 하였는지가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동아일보 기자 대량 해고사태 때(당시 그는 편집국장이었다) 스스로 사표를 낸 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약 회사에 그냥 남아 있으면 하나둘도 아니고 수십 명을 내 이름으로 해임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양심상 도저히 그 자리에 그냥 눌러 있을 수가 없었다. 약 130여 명 중 거의 50여 명을 내 이름으로 해임한다는 것은 죽으면 죽었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도 사랑하는 처자가 있고 설혹 방법상 다소의 이견이 있더라도 언론의 독립과 자유라는 어느 시대에 내놓아도 떳떳한 명분을 가지고 투쟁하는 그들을 해임할 수는 없었다."

▲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생활고에 시달리며 취직을 하려는 송건호 씨를 권력은 철저히 그 기회조차 봉쇄한다. 그러는 한편 권력의 현직(顯職)을 제시하며 유혹하기도 한다. "바로 이 무렵 나는 청와대로 들어와 자기를 도와달라는 대통령의 교섭을 받은 일이 있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이 있은 직후였다. (…) 하여간 통신사 사장인 전직 장관이 청와대에 보고하면서까지 채용해 줄 까닭도 없고 보니 결국 나의 모든 구직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다시는 구직운동을 않기로 마음먹었다." 실직자가 되어서의 생활고와 불안은 심각한 것이다. 다음 서술은 그 상황을 매우 리얼하게 적고 있다.

"75년 내가 신문사를 그만둔 첫해는 매일같이 불안이 나를 쉴 새 없이 괴롭혔다. 갑자기 두려워지기까지도 했다. 아이들 여섯을 데리고 어떻게 사나? 내달은 어떻게 사나? 아니 내년엔 어떻게 될까? 온갖 잡념이 거의 24시간 쉴 새 없이 나를 불안과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76년이 되고 다시 77년이 되면서 처음 매일같이 집요하게 못살게 굴던 공포가 3, 4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것이었다. 3, 4일간은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별 탈 없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불안 공포가 찾아왔다. 이런 때는 거의 미칠 것만 같았다. 훗날 깨달은 일이지만 이 불안 공포가 사라진 것은 거의 3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7년이 지난 후에도 어쩌다 2. 3개월에 한 번 정도의 불안 공포가 엄습해 오는 수가 있었다. 몇 달 만에 한 번씩 엄습해 오는 이 불안 공포는 상당히 심각했고, 이마에서 진땀이 흐르는 정도였으나 3년이 지나고 4년이 넘고 80년에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부터는 이 불안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어졌다."

신군부 쿠데타가 있은 후 그는 김대중 씨와 정치적으로 얽어매어져 구속되고 심한 고문을 받는다. 그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기는 했으나 정치와는 전혀 무관하였지만 덮어쓴 것이다.

"내가 수사를 받은 것은 5월 20일부터 6월 7일까지 만 19일간이었다. 나는 그때의 체험을 통해 고백한다. 인간이란 육체적 고통을 참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만약 노련한 수사관이 연행해 온 피의자한테서 모종의 진술을 받고자 한다면 100% 가능하다는 것을 체험했다. 수사관은 내가 전혀 알지도 못하고 하지도 않은 일을 시인하라고 강요했다. 물론 나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그 거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4일만인가 나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모든 것을 허위로 자백했다. 허위 자백 안 하면 나는 그곳에서 맞아 죽거나 평생 불구자가 될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이 자백을 강요하는 그런 행동을 하라고 해도 못 할 그런 위인이다."

고문의 후유증 때문이겠지만 그는 자주 졸았다. "무슨 모임이 있을 때 나는 늘 졸았다. '가족'들은 나를 '고사리'라고 별명을 붙여 웃어대기까지 했다 한다." 드디어 말년에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파킨슨증후군으로 8년 동안을 투병 생활을 하다가 75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송 선배는 현실 정치 참여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로지 언론을 필생의 천직으로 알고 헌신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김대중 씨와 정치적 유대를 맺은 것으로 조작, 모략하여 그를 그렇게 핍박하고 못살게 굴었다니…. 그리고 고문과 그 후유증으로 그의 수명마저 단축시키다니….
정권의 언론 탄압에 동아일보 편집국장 자리를 내던지고 수난의 세월을 참고 견디고 드디어 주로 해직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한 언론 자유 투사들과 함께 한겨레 신문을 창간하게 되고 그 대표로 사장을 맡게 된 것은 한국 역사, 한국 언론사의 정사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여기서 굳이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을 줄 안다.
다만 내가 아깝다고 생각하는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고 싶다. 한겨레 주필도 지낸 김효순 씨가 주일 특파원으로 있을 때다. 송건호 사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일본에 왔다는 것이다. 대개 특파원은 회사 간부의 안내를 하는 등 일을 거들게 마련이다. 그래서 김효순 씨는 공항에 나가려고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더니 일본 여행 마치고 지금 귀국하기 위해 공항에 나와 있다는 것. 사장이지만 아랫사람에게 신세 지지 않으려 하는 겸손한 태도다. 그게 송 선배의 진면목이다. 줄기찬 민주화 투쟁으로 수난을 당했던, 고려대 교수를 지낸 이문영 씨는 <겁 많은 자의 용기>(삼인 펴냄)라는 책을 냈다. 내가 접촉해 본 그의 성품이 그렇지만 그 제목이 마음에 든다. 사실 송건호 씨 책에도 그런 책 제목을 붙여 <겁 많은 자의 용기> 또는 <소심한 자의 용기>라고 해도 썩 어울릴 것 같다. 외양과 내실이 어긋나는 그런 양상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선비들이 흔히 그렇지 않았던가. 송건호 씨는 한국사에 남을 대표적 선비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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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언론인 출신으로 김영삼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역임했다. '비판적 보수주의자'로 불리며 이념을 떠나 보수와 진보 양쪽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원로 지식인이다. 프레시안에 연재한 기고를 바탕으로 <언론·정치 풍속사>를 냈고 이후 대담, 연재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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