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 이수인, 파업 준비 중 만난 미지의 세계

[드라마 <송곳>에서 말하지 못한 이야기 ⑤]

김경욱 씨가 하나하나 이삭줍기 식으로 모은 사람과 까르푸 중동지부를 세웠다. 2003년 4월 말이었다. 김경욱 씨는 자신이 노조원을 조직하고 지부를 세웠기에 당연히 자기가 중동지부장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투표 결과 부하 직원인 이모 씨가 지부장이 되었고 김경욱 씨는 사무장이 되었다. 꼭 지부장이 되기를 원한 건 아니었지만 막상 투표에서 떨어지자 씁쓸하고 창피했다. 인덕이 모자랐을까. 그래도 마음을 다잡았다.

'뭐가 됐든 지점장만 날리면 되는 거 되는 거 아닌가'

지부를 만든 뒤 할 일은 파업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싸우려면 제대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업을 중동지부 홀로 할 수는 없었다. 조합원이 50명도 안되기 때문에 파업을 한다 해도 회사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을 게 뻔했다. 김경욱 씨가 까르푸 노조 중앙에 파업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지원을 요청한 이유다.

당연히 도와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까르푸 노조 중앙에서는 난색을 표했다. 당시 까르푸 노조는 장기간 파업 끝에 단체협약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죽을 고생해서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이제 겨우 노조 활동해보려 했는데, 또 다시 파업하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1997년 결성된 까르푸 노조는 그간 단체협약을 체결하지 못하다 2003년 4월 7일 단체협약을 겨우 체결했다. 노조는 이를 위해 320여 일 동안 파업을 진행했다.

무노동‧무임금 원칙에 따라 장기간 파업을 하면서 까르푸 노조 위원장은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파업을 하자고 하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김경욱 씨는 노조 위원장 개인 사정은 알지 못했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노조는 싸우는 조직인 줄로만 알았다.

‘지부에서 싸우겠다고 하면 중앙에서 지원해주고 같이 싸워줘야 하는 게 아닌가? 우리를 대상으로 조합원 교육할 때는 그렇게 이야기해놓고 정작 싸우자고 하니 꽁무니를 빼는 건가'

ⓒJTBC

그러나 파업하기 싫다는 노조 위원장에게 지부 사무장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었다. 중동지부만이라도 파업을 할 수 있게 파업 찬반투표만이라도 해달라고 부탁했다. 싸움은 중동지부만 한다며 중앙과 다른 지부는 파업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자 중앙에서도 당황했다. 지부가 강경하게 나오니,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중앙노조에서 고민하는 가운데 김경욱 씨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미래를여는노동자연대(미래연대)라는 운동조직이었다. 미래연대는 당시 까르푸 노조를 좌지우지하는 일종의 '비선' 조직이었다. 까르푸 노조 조직국장, 교선국장 등이 미래연대 활동가였다. 미래연대 활동가 중 한 사람이 위장취업으로 까르푸에 비정규직으로 들어와 투쟁하다 해고된 상태였다. 까르푸 노조 위원장은 민주노총 서비스연맹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미래연대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 미래연대 대표가 중동지부 사무장, 즉 김경욱 씨와 중동지부장을 보고 싶어 한다고 연락했다. 당시 김경욱 씨는 노동계 내 정파를 전혀 알지 못했다. 미래연대 대표라고 하니 '어마어마한' 조직의 '어마어마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가슴이 설렜다.

'대표가 우리를 보자고? 우리가 뭐라고…'

열일 제쳐놓고 만났다. 서울 구로에 있는 사무실이었다. 김경욱 씨는 그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하나하나 생생하게 기억했다. 훗날 김경욱 씨가 이랜드 사태 관련 책을 쓴다고 마음먹었을 때, 생각한 첫 문단은 미래연대 사무실 방문기였다고 한다.

미래연대 사무실은 구로단지의 후미진 2층 건물에 있었다. 사무실 앞에는 '빈민~', '비정규직 재정사업장' 등 여러 푯말이 붙어 있었다. 그 푯말을 뒤로 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더욱 음침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철거 투쟁' 조끼를 입은 몇몇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시크한 표정의 20대 초반 여성은 의자에 쪼그려 앉은 자세로 담배를 입에 물고는 컴퓨터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김경욱 씨에게 이런 분위기는 익숙했다. 군대에서 전투사령부를 찾아갔을 때와 비슷했다. 그런데 거기가 미래연대 사무실이 아니었다. 그곳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음침한 분위기를 넘어 어두컴컴한 곳에 다다랐다. 거기서 미래연대 대표를 만났다.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 하는 투사의 은닉 장소가 이런 곳이 아닐까 싶었다. 그 곳에서 만난 미래연대 대표는 얼굴은 까맣고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다. 이전에 인터넷에서 봤던 일제시대 좌파 활동가 같은 느낌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단단하게 생긴 사람이 어두컴컴한 곳에 앉아 있었다. 거기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경욱 씨가 초긴장 상태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얼마를 이야기했을까. 한참을 이야기한 끝에 사무실을 나왔다. 시계를 보니 새벽 6시였다. 사무실에 저녁 때 갔으니 장장 10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눈 셈이었다. 술은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그 긴 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김 위원장은 새벽 6시에 사무실을 나온 뒤, 담배를 한 대 피우면서 지부장에게 "우리 검증 받은 거죠?" 이렇게 물었던 게 기억이 난다고 했다.

ⓒ프레시안

12시간 가까이 미래연대 대표가 질문하면 대답하고 질문하면 대답하고를 줄기차게 반복했다. 그가 던진 수십 가지 질문 중 수없이 반복된 내용은 하나였다.

'파업 이후 투쟁이 어려우면 조합원을 버릴 것인가, 구속이 될 수도 있는데 감당 할 수 있겠는가'

때로는 우회적으로 묻기도 하고, 직접적으로 묻기도 했다. 당시엔 몰랐는데 나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미래연대 대표는 자기의 사상을 검증하고자 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그들'이 보기에 김경욱 씨는 관리자 출신이었다. 투쟁하다 배신하기도 쉬울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10시간은 김경욱 씨가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검증하고, 그리고 다짐받는 시간이었던 셈이었다.

나중에 알았다. 활동가의 그런 행동이 얼마나 '싸가지' 없는 짓이었는지. 정파 활동가가 현장 노조 간부를 소환하는 것도 모자라 사상검증까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냥 다들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어쨌든 그러한 '사상검증'을 받은 뒤, 미래연대는 전폭적으로 중동지부 파업을 지원하겠다고 결정했다. 까르푸 노조 위원장을 설득해 파업에 들어가게 했다. 이후 일사천리였다. 2003년 6월 파업을 시작했다. 실질적인 파업 목적은 직원들을 해고하려는 중동지점장과 부장을 다른 지점으로 내보내고 고용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명목상으로 내놓은 것은 임금인상이었다. 파업 목적이 임금 인상 같은 근로 조건이 아니라, 문제 있는 관리자 전보 같은 인사 문제면 불법파업으로 몰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경욱 씨는 파업에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회사와 싸울 수 있고 또 이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돌이켜보면 파업 첫날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적은 내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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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2015년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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