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김영삼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대단히 야박하고 매몰차다. 대부분 이유는 3당 야합과 외환 위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생각보다 넓고 깊다. 그는 한국인에게 친숙(?)했던 군사 독재를 종식시켰고, 국가의 법통을 바로 세웠으며, 국민에게 사회 정의를 새롭게 각인시킨 대통령이었다. 지금 우리가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며 되돌려야 한다는 민주주의나 역사적 진실은 모두 그가 대통령 할 때 터를 닦고 바로세운 것들이다.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확실할 듯하다.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개혁 대통령은 김영삼이다. 김대중은 자신의 '빨간색 이미지' 때문에 보수 집단에 유화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고, 과감한 개혁은 하기 어려웠다. 노무현은 이와는 반대로 강공으로 부딪쳐 개혁을 시도했지만 사실상 모두 실패했다. 김영삼은 임기 초반 속전속결로 개혁을 진행해 대부분 성공했다.
군사 독재 세력인 집권 여당 민정당과 유신 독재의 상징인 김종필의 공화당과의 3당 합당, 즉 3당 야합을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으로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만약 4당 체제로 계속 갔다면 1992년 대선에서 어떻게 됐겠는가. 김영삼이 양보했겠나, 김대중이 양보했겠나? '어게인 1987' 아니겠는가. 서로 김종필과 손잡으려 했겠지만 김종필은 권력을 거머쥘 민정당 후보와 손잡았을 것이다.
또 3당 야합이라며 김영삼을 배신자 취급하는 우리의 기억력은 대단히 선택적이고 편의적이다. 김대중은 1997년 선거에서 쿠데타의 원조이자 유신 잔당인 김종필과 손잡은 덕분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과연 '김대중 정신'에 걸맞은 결정이었나. 야합 아닌가. 노무현은 '월드컵 4강' 덕에 졸지에 대권 주자로 부상한, 그러나 평소 노무현이 그토록 위한다던 서민과는 상극인 재벌 보수 정몽준과 단일화하고 러브샷을 했다. 이것은 '노무현 정신'다운 행동이었는가. 이 셋 중 어느 경우가 더 야합에 가까운가.
김영삼은 김대중, 노무현처럼 선거 막판에 앞뒤 안 가리고 합종연횡하지 않았다. 수적으로 소수파가 될 것을 각오하고 대선이 3년 가까이 남은 상태에서 적진에 뛰어들어 특유의 돌파력과 무시무시한 깡다구로 판을 뒤엎으며 대선 후보를 쟁취했다. 우리나라 과연 어느 정치인이 그와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을까.
국민을 통쾌하게 해준 대통령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 나는 외국에서 대학원을 다녔기 때문에 나에겐 '대통령 김영삼'에 대한 생생한 기억은 없지만 당시 한국 소식은 신문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대학 도서관에 가면 일 주일씩 묶어 놓은 한국 신문 몇 가지를 볼 수 있었는데, 공부를 하다가 지루하면 그 신문들을 한 묶음씩 읽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주 분량을 한꺼번에 읽으면 손바닥과 팔뚝 아래가 새까매지기도 했다.
그런데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서 유학생 간 신문 보기 열풍이 일었다. 신문을 보기 위해서는 '찜' 해놓고 기다려야 했다. 공직자 재산 공개, 하나회 제거, 금융 실명제 등 큼직한 개혁 정책이 연달아 터지는데 신문 보는 게 마치 서부 활극 보는 듯했다. 유학생이 그랬으니 본국에서는 어땠겠는가. 당시 서울에 있던 한 친구가 정확하게 표현했다.
"요즘 신문, 무협지보다 더 재밌어."
운동 경기가 아닌 정치인이 국민을 이처럼 통쾌하게 해줬던 적이 또 있었을까. 전반기 그의 인기는 국정 지지도 90%가 증명하듯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임기 말 그는 아들 문제와 한보 사태, 결정적으로는 외환 위기 때문에 지지도 8.4%의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임기를 마친다. 그는 퇴임사에서 "영광의 시간은 짧았고 고뇌와 고통의 시간은 길었다"고 토로했다. 민주주의의 투사였지만 그의 말년은 초라했다. 민주주의를 향한 그의 불꽃 튀는 투쟁을 대비해 보면 그의 대통령 시절은 불행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역사상 재임 중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 지지도 90%는 전쟁 중에나 가능한 수치이다.
개혁을 위한 끝없는 투쟁
개혁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오죽하면 개혁이 혁명보다 더 어렵다고 했을까. 이런 개혁을 수도 없이 이뤄낸 대통령은 김영삼이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를 시행하며 자기 재산부터 공개했다.
그의 '문민 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직접 선언하며 광주를 민주화의 성지로 만드는 작업에 지원을 아까지 않았다. 당시까지 '광주 사태'라고 기록된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 항쟁', '광주 민중 항쟁'으로 공식화해 교과서에 실리게 했고 피해자 보상에도 아끼지 않았다. 동시에 5.18특별법을 통해 전두환과 노태우도 구속시켰다.
역사 바로 세우기도 전 방위적이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임시정부로부터 이어받았음을 명확하게 했고 총독부 건물이었던 중앙청도 해체하고 일제의 잔재인 '국민학교' 명칭도 초등학교로 바꿨다. 김종필의 반발을 무릅쓰고 5.16을 쿠데타로 정의하고 이를 군사 혁명으로 기술한 교과서는 쿠데타로 고치게 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아무래도 금융 실명제 실시와 하나회 척결이었을 것이다. 특히 하나회 제거는 이후 한국 정치에서 쿠데타의 싹을 완전히 제거해버린 '정치 쿠데타'였다.
그의 개혁은 제도적 개혁에 머물지 않았다. 작가와 예술가들의 사회 비판은 물론 반정부적 작품도 허용했다. 군사 정권에 의해 감옥에 있던 김남주 시인도 김영삼 임기 때 석방됐고, 음란죄로 기소됐던 마광수 교수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의 개혁은 정치적 영역에 머문 것이 아니라 사상과 표현의 자유로까지 확장했던 것이다.
김영삼의 유산은 어디에?
김영삼 서거 후 수많은 정치인들이 빈소에서 김영삼의 후예를 자처했다. 김무성 대표는 자기가 '정치적 아들'이라고, 서청원 최고위원은 김영삼이 자신의 '정치적 대부'라고 했고 심지어 하태경 의원도 빈소를 지키겠다며 주변의 눈도 아랑곳 하지 않고 몇 시간을 버텼다고 한다. 그러나 김영삼의 유지를 이어받아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대한민국을 개혁하려는 세력은 이제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1990년 그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비난을 무릅쓰고 감행한 3당 합당의 후과는 컸다. 자신의 임기 중 대통령 후보가 된 이회창과의 갈등 때문에 탈당을 요구 받고 자신이 만든 당에서 쫓겨나듯 떠나야 했다. 이회창 후보 선거 유세에서는 자신의 화형식이 벌어지는 치욕을 삼켜야 했다.
그와 함께 민주화 투쟁을 하던 이들 대부분은 은퇴했고, 현역 정치인으로 남은 자들은 김영삼이 목숨을 걸고 맞서 싸우던 박정희의 딸 박근혜의 졸개가 되었다. 올해 60주년을 맞은 새정치민주연합도 사실은 그가 독재에 맞서 목숨 걸고 싸워 지켰던 당이다. 당명은 계속 바뀌었지만 그가 30년 넘게 몸 담았고 특히 박정희에서 전두환 때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그가 이끌던 당이었다. 김대중이 감옥과 미국에 있을 때 홀로 지켰던 당이다. 그러나 지금 김영삼의 흔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영삼의 유지를 이어갈 정치인이 있다면 이제는 새누리당의 영토가 되어버린 부산에서 외롭게 홀로 고군분투하는 김영춘 한 명 아닐까.
그의 영결식은 초라했다. 참석자 수도 김대중, 노무현 때와 너무 달랐다. 현직 대통령도 오지 않았다. 차라리 안 오는 게 김영삼의 마음이 편했을까. 조사는 공안 검사 출신 황교안 총리가 읽었다. 김영삼에겐 치욕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김대중을 이야기 하고 '김대중 정신'을 말한다. 솔직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민주주의를 향한 집념을 뜻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김영삼 정신'은 불가능한가. 독재에 맞서 싸운 불꽃같은 투쟁, 민주주의를 향한 불퇴전의 기상이 과연 누구에게 뒤지겠는가. 생각이 깊은 김대중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나 김영삼은 목숨은 나중에 생각하고 싸웠다.
민주 정부 10년의 출발은 김영삼
"YS 아니면 DJ가 대통령 됐겠어요?"
김영춘 전 의원의 말이다. 첫째, 당연히 김영삼이 하나회를 제거했기 때문이다. 김영삼 자신도 생전에 하나회 제거가 없었다면 김대중 정부도, 노무현 정부도 없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취임 11일만에 국방장관을 불러 하나회 핵심이던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해임시켜 버리고 장관에게 말 꺼낸 지 3시간 5분 만에 후임자 임명까지 끝내버렸다.
이후 두 달 동안 하나회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특전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 1, 2, 3군 사령관 및 수도권 주요 사단장들을 비하나회 출신으로 싹 갈아버린다. 당시 쿠데타의 가능성 때문에 군부의 동향을 주목하며 보름 간 관계 기관이 밤샘 경계를 했다. 군부가 지배하던 그때는 수도방위사령관 혼자서도 쿠데타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2년 후엔 전두환과 노태우까지 감옥에 보내 버려 군부 쿠데타 가능성의 싹을 완전히 제거해 버렸다.
당시 웬만한 국민들도 군의 '김대중 비토설'을 알고 있었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군이 나선다는 것이다. 사실 직전 대통령 세 명이 모두 쿠데타에 의해 대통령이 되거나 물러났기 때문에 쿠데타는 별로 어색할 것도 없는, 익숙한 것이었다. 육사 출신들이 나라를 지배할 때였다. 전두환 때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자리에서 장성들이 여당 국회의원을 폭행했고 노태우 때는 군사 문화를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고 정보사령부 군인들이 <중앙일보> 기자를 폭행하고 회칼로 찌르기도 했다.
때로는 대통령도 우습게 봤다. 하나회 핵심이면서 전두환과 가까웠던 민병돈 육군사관학교 교장은 노태우 대통령이 참석한 졸업식장에서 치사를 읽으며 노태우의 정책을 면전에서 비판한 후 경례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은 일까지 있었다. 그런 시절, 군부 핵심을 숙청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살 떨리는 일이었지만 김영삼은 단숨에 해치웠다.
하나회 제거가 결국 나중에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는 데 최대 걸림돌을 사전에 제거한 것이라면 1997년 대선 막판 김영삼은 다음 대통령으로 김대중을 선택한 것이나 다름없는 결정을 하게 된다. 이회창 후보 측은 김대중을 후보가 670억 원대의 비자금을 관리했다며 그를 뇌물 수수, 조세 포탈, 무고로 검찰에 고발한다. 그러나 김영삼은 "대선을 앞두고 비자금을 수사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며 검찰총장에게 이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해 비자금 수사를 대선 후로 유보하게 된다.
혹자는 퇴임 후 신변 보장을 조건으로 내건 거래였다고도 하지만 사실 비자금 수사에 들어갔으면 김대중은 어차피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결정적인 순간 김영삼은 자신이 정치에 입문시킨 이회창보다는 민주화 동지를 선택한 것이다. 이에 반발한 이회창은 김영삼에게 탈당을 요구해 김영삼이 결국 자신이 만든 신한국당에서 쫓겨난다.
왜 우리는 그를 미워했나?
대통령은 박정희만 하는 것인 줄 알았던 시절, 기어이 유신을 끝장낸 사람이 김영삼이다. 전두환의 철권 통치에 김대중마저 숨을 죽여야 했을 때 단식 투쟁으로 민주화의 불씨를 다시 살려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것도 김영삼이고 적진에 뛰어들어 노태우가 결국 두 손 들게 만들어 이 땅에서 군정을 종식시킨 것도 김영삼이다. 그는 불사신이었다.
대통령이 되어 광주의 명예를 회복시킨 사람도 김영삼이고 우리가 지금 누리는 자유를, 그리고 지금 우리가 다시 바로 세워야 한다는 역사를 애초 바로 세운 사람이 김영삼이다. 그럼에도 정말 왜 우리는 그를 싫어했을까.
우리가 그에게 야박한 이유는 국가적으로는 외환 위기 때문이고, 진보의 입장에서 보면 3당 합당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은 외환 위기가 자기 때문이라는 비난에 억울해했다. 사실 경제 관료를 잘못 쓴 죄는 그가 온전히 받아들여야겠지만, 외환 위기를 촉발하게 된 한국 경제의 왜곡과 모순은 놔두고 두고두고 김영삼만을 비난하는 것은 과한 듯하다.
그 뒷 배경엔 첫째, 그의 앞뒤 안 가리는 이미지, 희화화된 캐릭터, 무식하다는 그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 등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둘째, 이를 빌미로 혹시 우리 모두의 책임임에도 그를 희생양 삼아 그에게 분풀이 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한국의 경제 구조가 과연 김영삼 때문일까.
3당 합당을 가지고 그를 배신자라 하고 그 때문에 진보에게 불리한 지역 구도가 고착화 됐다는 주장은 참으로 비겁하고 못난 자들이 하는 짓이다. 조상 탓 하며 불평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선 이런 지역 구도를 만든 주범은 김영삼이 맞서 싸운 박정희였고 이를 승계한 집단이 지금의 새누리당이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게도 그 지역 구도를 진보 역시 이제까지 신나게 빨아먹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자기 몫이 작다며 때만 되면 김영삼을 탓하고 있다.
1990년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할 때 20년 뒤에도 지금의 지역 분할이 계속될지 꿈에나 생각했겠는가. 그 정도는 후배들 몫 아닌가. 김영삼이 군부 독재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민주 진영에 갖다 줬으면 나머지는 민주 진영의 몫 아닌가. 3당 합당이 한편 아쉽기는 하지만 그 지역 구도를 이제껏 깨지 못하는 것은 진보의 무능이다. 진보가 제일 잘 하는 것이 욕 할 사람 찾아다니는 것 아닐까 싶은데, 김영삼에게도 그런 것 아닌가?
대통령 임기가 4년이었다면
이승에서 그는 불꽃이었다. 다 불태웠다. 그랬기에 세상에 남긴 것도 없다. 그의 불굴의 투지 덕에 나라가 이만큼 바로 섰다. 그러나 지금 그의 정신을 계승할 당도 없고 추종자도 찾기 힘들다. 참으로 그는 불운했다. 만약 대통령 임기가 4년이었다면 그는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진보는 김영삼 욕 하지 마라.
"너희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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