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 속 여신들은 신임에도 남신들의 각종 비행에 시달리며 고통을 겪는다. 상상을 초월하는 바람둥이 남편에 어린 딸을 납치 강간하는 남자 형제까지 고대부터 이어진 여성들의 비극이 신화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남신의 행각은 눈감아주고 여신의 복수에만 주목하는 많은 서사를 어렵게 피해간다면 말이다.
책 <아름답고 살벌하고 웃기는 우리 곁의 그리스 여신들>(나탈리 헤인스 지음·홍한별 옮김·돌고래 펴냄·400쪽)은 그리스 신화 속 여신들의 이야기를 일리아스, 변신이야기 등 고전에서부터 이들을 재현한 예술 작품, 현대 대중문화 등과 엮어 흥미롭게 풀어낸다. 남성적, 혹은 주류적 관점에 매몰되지 않고 여성의 경험을 반영한 시각으로 여신들의 이야기를 재해석해 고대 및 현대 여성 삶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책의 강점이다.
저자는 복수와 질투의 화신으로 불리는 여신 헤라가 그리스 곳곳에서 거대 신전을 통해 숭배되고 있었던 데 주목한다. 신들의 왕 제우스의 아내이기에 그 또한 나눠 받은 권위를 누릴 수 있었겠지만, 헤라가 겪은 고통이 그 시대 기혼 여성들을 대변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해석이다.
헤라는 동물로 변신하고 기상이변을 일으키면서까지 신과 인간 여성을 가리지 않고 좋게 말해도 "신화적 규모"의 바람, 실상은 상대의 동의를 얻지 않았으니 "연쇄 성폭행범"인 제우스를 남편으로 두고 있다. 하지만 후대까지 재현된 기록에서 제우스의 비행은 '사랑'으로 포장되는 일이 잦고 이에 대한 헤라의 복수는 날것 그대로 조명되며 오히려 헤라가 의심 낳고 남편을 조종하려 하는 아내로 악명을 뒤집어 썼다. 저자는 이러한 설정이 현대 코미디에서까지 단골 소재로 쓰인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헤라의 복수가 "여성에게 별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사회"에서 이뤄졌다고 강조한다. 헤라는 강력한 악처처럼 보이지만 "제우스의 수상쩍은 행각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남편의 폭력과 부정 앞에서는 무력"하다. "남편의 마음이 바뀌면 여자는 이혼당할 수 있지만 반대로 아내 쪽에선 이혼을 청구할 수 없"고 "남편은 원하는 누구하고나 잘 수 있지만 아내는 집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독립적 지위를 얻지 못하는 기혼 여성의 불안을 헤라가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조용하지만 심지가 굳은 농업의 여신 데메테르의 강한 면에도 주목한다. "흔히 데메테르를 어머니상으로, 양육하고 보호하는 인자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데메테르의 분노가 신들조차 겁에 질리게 할 만큼 무시무시하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는 것이다. 딸 페르세포네를 자신의 형제(페르세포네의 삼촌) 하데스가 납치해 지하세계로 끌고 갔을 때 데메테르는 온 땅에 극심한 기근을 불러오는 시위를 벌인다. 이로 인해 신들도 제물을 받지 못하게 되고 제우스는 "자기 딸이 납치되어 강제 결혼을 하게 되는 일 따위 사소한 일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다가 "인간이 기근으로 절멸하여 특권과 선물을 잃는 끔찍한 일은 도저히 참지 못"해 하데스에 페르세포네를 돌려 보내라고 명한다. 저자는 이 사건이 "신화에서 누군가가 제우스에게, 그릭고 다른 모든 올림포스 신들에게 맞서서 자기 뜻을 관철하는 매우 드문 사례"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 이야기가 "한 여성이 강력한 남성의 학대를 (여성들이 으레 그래야 한다는 통념을 거스르며)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함으로써 인신매매 당한 딸을 불완전하게나마 구해내는 이야기"로 많은 여성 작가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거부당하더라도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리는 행위를,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제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징표로 여기"는, 하데스의 페르세포네 납치에서부터 내려오는 "무수히 많은 사랑 노래, 영화, 소설에서 반복되는 이상적인 로맨스" 서사에 의문을 제기한다. "제발 부탁인데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사랑했다고 말하지 말라"며. 그건 "소유욕"이라며.
저자는 12신 중 하나인 화로의 신 헤스티아가 거의 존재감이 없는 이유를 오늘날에도 저평가되는 '여성의 일', 가사 노동과 연관된 신이어서 일 수 있다고 분석한다. 화덕은 누구나 원하는 "조리된 음식과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하지만 그리스에서 "여자와 노예의 영역"이다.
하지만 저자는 동시에 보수적 사회에서, 그리고 사랑과 성욕 탓에 온갖 난동이 벌어지는 그리스 신화 속 세계에서 드물게 결혼하지 않을 것을 보장 받은 신이라는 데 주목한다. 그러면서도 주변으로 밀려남이 없는. 로마에서 헤스티아(로마명 베스타)를 섬기는 여사제들도 공공 화덕을 관리하는 공적 임무를 부여 받고 독신으로 살며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저자는 제단 역할도 했던 화덕을 관장하는 신이기에 헤스티아는 "모든 제물의 첫 번째 부분"을 받아 "아마 다른 어떤 신보다 더 많은 봉헌물을 받았을 것"이라고 짚는다. 전쟁 등 거대해 보이는 이야기 속엔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헤스티아는 "따뜻한 귀가, 갓 구운 빵, 어둠 속의 빛"으로 "늘 있는" 여신으로, 결코 경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사 및 돌봄 노동의 가치에 대한 시사점을 주는 대목이다.
저자가 가장 좋아하는 여신은 아테나라고 한다. 아테나는 다른 여신들과는 달리 남성 영역으로 치부되는 전쟁을 관할한다.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아테나는 그리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에우메니데스'에서 '어머니가 없다'고 밝히며 "여성 혐오적인 암시"를 주고 "남자와 성관계는 꺼리지만 남자를 편애하는 경향이 있고 여자는 잘 돕지 않는다." 그리고 경쟁을 좋아하고 "지는 것"을 싫어한다. 같은 전쟁을 관할하는 남신 아레스를 눌러버릴 만큼. 저자의 아테나에 대한 애정은 남성 영역에서 많은 남성들처럼 늘 올바르지 않고 흠결을 가진 채로, 하지만 일반화 돼 매도되지 않고 평범하게 경쟁하도록 허락된 듯한, 아직 도래하지 않은 여성의 삶을 그가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책은 잘 알려진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 달과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 복수의 여신 등 다른 여러 여신들의 서사도 독창적 관점으로 해석한다. 저자 헤인스는 작가 겸 방송인으로,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재치가 글에서도 드러나 책을 손에서 놓기 어렵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