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을 감싸면, 전여옥은 어떤가?

[정희준의 어퍼컷] 표절이 문학의 시작이라니…

아무리 봐도 한국은 표절 공화국이 맞는 것 같다. 외국이라고 표절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은 외국과의 비교가 필요 없을 정도로 심하다. 한마디로 범사회적 현상이다. 과거 텔레비전 방송의 오락, 가요, 퀴즈 프로는 일본 것을 그대로 베꼈다. 서울의 방송사 피디(PD)들이 일본 방송 전파가 잡히는 부산 해운대에 호텔방을 잡아놓고 그대로 베꼈다.

'문화 대통령'이라 불리던 서태지의 데뷔곡 '난 알아요'는 사실은 외국 곡을 베낀 것이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똑같다"는 이야기가 돌아도 언론은 모른 척 해줬다. 수많은 고위 공직자들의 표절 행태는 낯이 뜨거울 정도다. 학위 논문을 펼치기만 하면 대부분 표절이다.

교수나 고위 공직자뿐 아니라 유명인의 표절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거의 매년 반복되는 매우 익숙한 뉴스거리가 됐다. 그런데 외국과는 다르게, 표절이 문제가 된 당사자의 반응은 참 다양하다. 외국은 논란이 되면 시인하고 반성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대충 세 부류로 나뉜다. 깨끗하게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다음 두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나는 표절이 아니라고 버티다가 부인할 수 없는 다수의 증거가 나오면 "그때의 관행"이라고 핑계를 대면서 "결과적으로 죄송하게 됐다"고 마지못해 인정하는 것이다. 고위 공직자들이 청문회에서 보이는 행태가 이것이다. 셋째는 절대로 표절이 아니라고 끝까지 버티는 거다. 오히려 문제 제기자들을 공격한다. 전여옥이 그랬고 문대성이 그랬다.

표절 문제에 있어서 한국은 그 정도가 매우 문제가 심각할 뿐 아니라 천박하기까지 하다. 심지어 패거리주의가 난입해 '패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신경숙의 표절 논란을 지켜보며 든 생각이다. 이번 논란은 매우 특이하다. 어떻게 6월에 촉발된 논란이 한해가 저물어가는 지금껏 마무리 되지 않고 싸움을 계속하고 있을까. 백낙청을 위시한 우리 사회 최고의 학식을 가진 학자들, 문학인, 평론가 등 최고의 지성인이 논의에 참여하는데도 불구하고 결론은커녕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보이지 않을까. 왜 갈등은 오히려 더 커져만 갈까. 신경숙 표절 논란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은 지식인의 기본적 수준이 사실은 형편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명백하고도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언어 기술자의 아전인수

문학에는 일가견도 없고 신경숙의 작품을 읽어본 적도 없어 신경숙의 소설인 '전설'의 표절 논란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문제를 놓고 비판하는 쪽과 옹호하는 쪽이 벌이는 모습은 말 그대로 이전투구요 목불인견이다. 특히 그들이 본질을 가리기 위해 들이미는 현학적 단어의 조합은 그들이 문학인이나 평론가라기보다는 '언어 기술자'에 가깝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우선 신경숙의 발언이 그렇다.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문제가 된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의 문장과 '전설'의 문장을 여러 차례 대조해 본 결과, 표절이란 문제 제기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우국'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며 "모두 제 탓입니다. '전설'을 읽고 또 읽으면서 쇠스랑이 있으면 내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이었어요"라고 말한다. 혹자는 이를 두고 신경숙의 사과라고 하는데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일종의 유감 표명인데, 정치인 뺨치는 담대한 언어적 기교일 뿐이다.

신경숙은 표절 논란이 빚어진 것에 대해 사과는 했지만 자신의 표절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특히 "표절이란 문제 제기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에서 "맞다"도 아니고 "맞겠다"는 표현은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의 화법이다. 표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한 게 아니라 "그들이 그럴 만했다," "그들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겠다"라는 의견 표명일 뿐이다.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 남 이야기를, 소 닭 보는 자세로 한 것이다. '유체 이탈 화법'의 새로운 경지이다.

이후 창비 쪽 인사들의 발언은 일관된다. 강일우 대표이사, 백낙청 편집인, 편집주간인 백영서 연세대학교 교수 등은 표절 혐의를 받을 만한 문자적 유사성이 발견됐지만 의도적 베껴 쓰기도 아니고 파렴치한 범죄 행위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표절이냐 아니냐'에 대한 대답은 외면한다.

결국 이들은 '의도적 베껴 쓰기,' '파렴치한 범죄 행위'는 아니기 때문에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자꾸 "논의를 이어가자," "토론이 필요하다"는 말만 덧붙인다. 요즘 같은 바쁜 세상에 뻔한 이야기 가지고 논의를 이어갈 필요도 없고 토론을 계속할 필요도 없다. 표절은 표절이다.

"훔쳤느냐" 묻는데 "살인하지 않았다"?

이들의 주장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의도적 베껴 쓰기'가 아니기 때문에 표절이 아니라는 것인데 이는 말장난이다. 베껴 쓰기는 표절이고, 표절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표절이다. 이들은 계속 의도적이냐 아니냐가 표절 여부 판단에 매우 중요한 기준인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오길영 교수는 문학 작품의 평가에서 의도성은 중요하지 않다고, 또 김진석 교수는 문제의 핵심은 심리적 의도성이 아니라 텍스트의 동일성이라고 이미 잘 지적하기도 했지만) 나는 국내외 학계에서 표절 여부 판단에 의도성이 중요한 잣대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둘 중 하나다. 그들이 뻔뻔스럽든지, 아니면 무식하든지. 의도성이 감안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표절에 대한 사회적 비난의 수위나 징계의 경중을 따질 때 정도가 될 것이다.

그들이 신경숙의 결백함(?)을 주장하는 또 다른 논거는 신경숙이 '파렴치한 범죄 행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소설이든 논문이든 표절 여부를 판단할 때 '의도성'에 더해 베끼기의 '파렴치성'까지 측정해서 표절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인가. 어처구니없는 주장일 뿐 아니라 실소를 금치 못할 억지다.

말 복잡하게 할 필요 없다. 본질은 간단하다. 표절이냐 아니냐이다. <동아일보>도 사설에서 "신 씨의 표절 부분은 백번 양보해 본인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쓸 당시에 '의도적인 베껴 쓰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표현"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창비 측 인사들은 신경숙이 '파렴치한 범죄 행위'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끈질기게 견지하고 있다. 사람들이 "당신은 그것을 훔쳤느냐?"고 물었는데 이에 "나는 살인한 적이 없다"며 억지 부리는 것과 똑같다.

저급한 궤변

신경숙의 표절 파문이 격화된 이유는 창비 편집위원까지 줄줄이 공방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의 논리 역시 이전의 것과 다르지 않은데 특히 이들의 전략은 문제의 본질에서 빠져나와 논쟁을 벌이는 것이다. 전형적인 물타기다.

김종엽은 '자비의 원칙'을 내세우며 신경숙의 작품 전체를 놓고 생각하자고 한다. 신경숙의 작품들 중 표절 혐의가 여러 개 나오면서 '상습적 표절'이라는 비판이 나오자 "그의 작품 전체를 쓰레기라는 듯이 발언하기보다는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분석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경숙을 옹호하는 창비 측은 신경숙의 '상습 표절' 주장이 나오자 "이거다!" 하고 쾌재를 불렀을지 모르겠다. 신경숙 자신의 침묵과 창비 측의 옹호가 이어지자 수많은 비판이 제기되면서 등장한 것이긴 하지만 이것이 본질은 아니다. 본질은 '전설'의 '우국' 표절 여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언급하건데 표절 여부를 따질 때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분석해봐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표절 판정에는 정신분석이나 독심술이 필요하지 않다.

본질을 호도하며 표절 사실을 이렇게 강력하게 부인하는 이들을 보며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전여옥 전 의원이다. 그는 자신의 책 <일본은 없다>가 일본에서 활동하는 유재순 작가의 자료와 아이디어를 무단으로 도용했다는 논란이 일자 문제를 제기한 유 작가와 기자 등을 상대로 명예 훼손으로 인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했으나 1, 2, 3심 모두 패소했다. 이때 전여옥은 '정권 교체를 위해 싸우다 생긴 상처,' '좌파 매체들의 전여옥 흠집 내기'라며 물타기를 시도했다.

특히 "도대체 표절이라면 하다못해 베낀 문장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며 표절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그럼에도 1, 2심 모두 '들은 내용'을 무단으로 사용한 것이 인정된다며 전여옥의 표절을 인정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낀 문장'이 없더라도, '들은 내용'을 옮긴 것만으로도 표절이라는 점이다. 전여옥은 최종 판결 이후에도 표절을 인정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창비 측도 인정한 신경숙의 베껴 쓰기는 표절이겠는가 아니겠는가.

전여옥과는 다른가? 그렇다면 문대성과는?

또 다른 편집위원인 황정아도 나섰다. 그는 다시 한 번 "의도적 표절"에 초점을 맞춰 비판 진영을 잠재우려 한다. "결과로서의 표절"이라면 모르겠지만 "의도적 표절"이 아니므로 문제될 것이 없고 오히려 이제까지 신경숙에게 "의도적 절도"와 "상습범"의 누명을 씌우려 했던 비판자들의 반성마저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 역시 표절 여부는 논하지 않고 물 타기를 시도한다. 특히 "의도적 베껴 쓰기" "결과적 표절" "문자적 유사성" "무의식적 차용이나 도용" "넓은 의미의 표절" "결과로서의 표절" "결과로서 발생한 문자적 유사성" 등 온갖 단어의 조합을 만들어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데 "무의식적인 차용이나 도용을 포함하는 결과로서의 표절"에 이르면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표절에 무슨 형용사를 이렇게 많이 붙이는가. 그는 표절이 마치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를 현혹하고 동시에 표절에도 마치 '나쁜 표절'과 '착한 표절'이 있는 것처럼 우리를 착각하게 한다. 사실상 '개념의 조작'이다.

그러한 언어 조작의 사례가 그가 활용한 "의도적 절도"라는 표현이다. 이쯤 되면 궤변이다. 절도에 의도적 절도, 비의도적 절도를 구분할 이유가 있나? 그의 논리와 결론은 신경숙의 베끼기는 의도적이 아니고 결과로서의 표절이기에 표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의도적 표절이 아닌 결과로서의 표절을 주야장천 외치고 있는데 나는 여기에 정확하게 해당하는 인물, 신경숙보다 더 억울한 인물을 알고 있다. 바로 문대성 의원이다. 2012년 그의 논문 표절 논란이 거세졌을 당시 그는 표절을 부인했다. 명백한 표절이었고 분량 면에서 신경숙의 경우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러나 그는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의 발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그의 행동은 확신에 차있었다.

나는 그를 이해한다. 문대성 의원이야말로 의도성이 없는, 결과적 표절을 한 사람이다. 그는 당연히 자신의 논문이 표절이 아니라고 믿었을 것이다. 왜? 그는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오탈자까지 베껴버린 사실이 드러났지만 그래도 그는 완강했다. 학위 논문의 문헌 고찰 부분은 그렇게 하는 거라고 배웠고 자신이 아는 사람들도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문 의원이야말로 의도적 표절이 아닌 결과적 표절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신경숙도 문대성과 같은 경우인가. 만약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표절이 문학의 시작? 아전인수를 지나 자아도취!

신경숙을 옹호하는 자들의 글 중에는 아예 신경숙의 표절을 부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표절을 옹호하는 것까지 등장했다. 윤지관은 "문학에서는 학술 논문과 달리 '차용'을 통해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했다. 이는 필사와 습작을 하는 소설 지망생에게는 당연히 해당되겠지만 글을 출판하는 기성 문학인들에게 적용될 수는 없다.

백번 양보해 차용을 용인한다 하더라도 저자는 그 출처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자신의 책을 돈 받고 팔면서 '차용'의 출처도 밝히지 않는다면 당연히 표절일 뿐 아니라 이는 표절의 의도성을 증명하는 꼴이 된다. 무엇보다 윤지관이 알아야 할 게 있다. 신경숙은 이번 논란이 있기 전에는 '우국'을 읽어본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본인이 읽어본 적도 없다는데 무슨 차용인가.

급기야 신경숙의 남편인 남진우까지 등장했다. 표절을 합리화하기 위해 '다시 쓰기'라는 새로운 조합어를 창조한 그는 <현대시학> 권두시론에서 표절은 "텍스트의 전환, 차용, 변용 등의 문제와 결부되어 숙고해야 할 점이 적지 않"음에도 신경숙의 표절 논란이 "선악 이원론적 판결"과 "무분별한 여론 재판"으로 흘렀음을 암시한다. 그러고는 서양 문학의 명망가들을 불러들인다. 그들도 남의 글을 빌려왔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급기야 "표절은 문학의 종말이 아니라 시작, 그것도 시작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선언한다. 이는 아전인수를 지나 자아도취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시작의 시작이다.

미국의 비평가 로렌스 그로스버그는 아무리 황당한 주장을 할지라도 이를 보강할 증거는 사방에 널려있다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몇 개의 파편화된 사례를 동원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지금 옹호론자들의 행태가 바로 이것이다. 궤변을 합리화할 사례 찾기 말이다.

윤지관이 셰익스피어도 남의 글을 활용한 바 있다고 주장하며 신경숙을 옹호한 것처럼 남진우 역시 <돈키호테> 같은 17세기의 작품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나 샤를 보들레르까지 불러들여 신경숙의 표절에 죄사함을 주려한다. 그러나 당시엔 표절의 개념조차 희미했을 터인데 지금의 논란을 300~400년 전의 작품과 작가까지 끌어들여 물 타기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법이 그러하듯 표절도 세상과 함께 진화하는 것이다. 비겁하다. 지금의 기준으로 논하라.


오만보다는 겸손, 공격보다는 반성

물론 모든 표절이 의도적이고 악의적이지는 않다. 수많은 글과 논문을 쓰다보면 출처의 제공이 실수로 누락되는 경우도 있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과거 썼던 문장들이 다른 글에 섞여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이것이 밝혀졌을 경우이다. 의도적이든, 결과적이든 동일한 표현이나 문장으로 판명되면 이를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설사 표절을 인정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 논문이나 소설 자체가 파기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유감 표명이나 원저자에 대한 사과로 마무리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은 이를 부인하거나 특히 모르쇠로 일관하는 경우이다. 나아가 이를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문제를 제기한 자들을 공격하는 뻔뻔스러움에는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표절의 개념과 기준은 사회가 발달하고 복잡해지면서 계속 진화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사안에 따라 논의와 숙고가 필요한 경우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표절 판정은 간단하다. (연구 부정 행위는 상당히 복잡하지만 표절은 그 하위 행위 중 하나로 상대적으로 간단하다.) 표절을 피하는 방법도 간단하다. 나의 글이 아니면 언제나 출처를 제공하고 나의 독창적 표현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실수로 표절을 하게 되면 이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다. 복잡할 게 하나도 없는 게 바로 표절이다.

신경숙 표절 논란은 당연히 학계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한국 사회 지성계의 쟁점이 됐다. 어찌 보면 간단하고 명명백백한 문제가 반년 간 지속되면서 해를 넘기게 됐다.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표절에 침묵하고, 표절을 옹호하고, 심지어는 표절을 칭송하는 지성인들의 모습에 참담함을 느끼게 된다.

신경숙 표절 문제가 결국 어떻게 마무리될지 지켜봐야 한다. 그로부터 앞날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상식적'인 결론이 나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반복될 것이다. 이는 표절의 반복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표절 논란이 또다시 뻔뻔스러운 궤변과 패거리 싸움을 불러낼 것이다. 욕망에 눈 먼 자들의 모습을 또 보게 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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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준

스포츠와 대중문화 뿐 아니라 세상사에 관심이 많아 정치 주제의 글도 써왔다. 인간의 욕망과 권력이 관찰의 대상이다. 연세대학교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미네소타대에서 스포츠문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미래는 미디어가 지배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아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동아대 체육학과 교수, 부산관광공사 사장을 지냈다. <미국 신보수주의와 대중문화 읽기: 람보에서 마이클 조든까지>, <스포츠코리아판타지>, <어퍼컷>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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