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희 기고] 혁신계의 풍운아 고정훈 씨

[고난 속 꿋꿋이 산 사람들·⑧] 중령 출신으로 영어·러시아어 유창

나는 동시대인 가운데 풍운아라 할 수 있는 사람을 꼽는다면 우선 누구나 짐작하는 대로 JP로 통하는 김종필 씨를 꼽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이 잘 모르거나 망각하고 있는 고정훈(高貞勳) 씨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 풍운아로 각인된 사람은 이 두 사람이다. '커널(colonel) 고'로 통하던 고 씨는 천재적이라 할 만한 어학능력을 발휘하였다. 어학 능력뿐만 아니라 재기(才氣)도 사교술도 뛰어났다.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선 그의 약력을 미리 소개해두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의 저서에 나온 자기소개다.

"1920년 진남포에서 출생.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영문과 및 만주 하얼빈 북만학원 로문과(露文科) 수학. 1946년 소련 보도국 통역원, 1947년 미 제24군단 정보처 및 미·소 공동위원회 미측 대표단 근무. 1948년 육사 7기 특별 필. 임관. 유엔한위 연락장교. 육군참모총장·국방장관·미 군사고문단장 연락장교 특별 보좌관 및 육본 정보국 차장 역임. 1950년 유엔군 총사령부 근무 중 미 육군성 파견대 근무와 더불어 중령으로 예편. <코리언 리퍼블릭>지 편집국장. <조선일보> 논설위원."

여기서 특별히 말할 것은 일본의 아오야마학원은 대단히 유명한 영어 학원이란 점이다. 거기다가 북만학원에서 러시아어 공부까지 하였다.

해방 후 고향에 돌아온 고 씨는 조만식 선생 계통의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 소련 공보원에 통역원으로 취직했다.

"1947년 4월, 나는 조씨계 인사들의 응낙을 받고 원래의 목적지인 서울로 월남해 왔다. 장단에서 38선을 넘어서서 미군 초소에 연락했더니, 지프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던 중이었다고 하며, 나를 서울 반도호텔로 안내하였다."

그 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신분이 바뀌고 진급도 되고 하니 그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그날부터 나는 미 제24군단 정보처 북한과 직원으로 근무케 되었다. 5월 하순부터는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측 대표단 직원을 겸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수립될 무렵, 미군 사령부의 추천을 받아 우리나라 육군사관학교 제7기 특별간부 후보생으로 입교했다.

임관과 동시에 여수 반란군토벌사령부에 배치되어 정보장교로 근무했다. 수개월 후에 대위로 진급하는 한편, 육군참모총장 보좌관, 국방장관 특별보좌관, 미 군사고문단장 보좌관을 겸직하게 되었다. 소령이 된 나는, 정보국 차장 겸 유엔한위 연락장교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6·25 공산 침략이 일요일 새벽의 깊은 잠을 깨웠다. 즉각 나는 미 극동군사령부 특별파견대에 배치되었다. 그 후, 미 육군성 파견대 직원으로 채용됨과 함께, 대한민국 육군에서 예편되었다. 당시, 나는 중령이었다."

그가 38선을 넘어와 미국 측과 합류하였을 때 그는 미군 측에 많은 정보를 제공한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는 매우 중요하다.

"소련 점령군 당국은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회의를 통해서 좌우합작·남북통일 정부를 수립한 후, 미·소 양군을 한반도로부터 철수케 하고, 곧이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공산 쿠데타와 같은 쿠데타를 한반도에서 일으켜, 우리나라를 공산 위성국가로 만들려고 획책했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공산 측의 세밀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후 <코리언 리퍼블릭> 편집국장을 거쳐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된 그는 주로 국제관계 해설을 많이 썼었는데 'K생'이라고 서명된 그의 해설은 지식인 사회, 특히 학생층에게 대단한 인기였다. 아마 지금의 노년층에서도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인도의 네루 수상이 이른바 제3노선이라 하여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때이고, 이집트의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 국유화, 아스완 댐 건설 등 강한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울 때이다. 따라서 서구 열강에 치이고 열등감을 느끼던 제3 세계의 사람들이 감동과 함께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고 씨는 그 분위기에 맞는 논설 또는 해설을 쓴 것이다.

▲ 혁신계의 풍운아 고정훈 씨. 사진은 1984년 1월 27일 당시 신정사회당 고정훈 총재의 기자회견 모습. ⓒ연합뉴스
내가 다니던 서울대의 동아리에서도 고 씨를 초청하여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아마 아시아의 민족주의 문제가 주제였을 것이다. 고 씨 말고도 장건상, 전진한, 김철 씨 등을 초청했었다.

그때는 자세히 몰랐었는데 고정훈 씨는 그 무렵 진보당 선전간사, 민주혁신당 선전부장을 잠깐 한 것으로 이력에 나온다. 신문사 논설위원을 하면서 정당생활도 한 것인지 어쩐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가 정치의 전면에 부상한 것은 4·19의 학생 데모가 격렬했던 때이다. 마침 조선일보가 옛 국회의사당 바로 옆에 있어 학생 데모대의 집결지이기도 했다. 고 씨는 조선일보의 발코니에서 학생들을 격려·선동하는 연설도 하고, 직접 데모대에 뛰어들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그는 학생 데모대와 일체가 된 것이다.

그는 즉각 구국청년당(救國靑年黨)을 결성한다. 그는 4·19라는 혁명적 사태를 혁명적으로 맞으려 했다. 우선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였으니 4대 국회도 즉각 해산하고 새로운 국회의 선거를 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내각책임제 개헌도 반대하였다.

당시의 여야당 주도적 정치세력의 방침은 그렇지 않았다. 허정(許政) 과도정부 수반은 "혁명적 과업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수습한다"는 방침을 천명한 바도 있지만 비록 4·19가 혁명적 사태라 하더라도 그 사태를 평화적·비혁명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고정훈 씨는 조선일보가 바로 국회의사당 옆에 있어 편리하기도 하였겠지만 국회로 곽상훈 의장을 찾아가 즉각 국회의 해산과 총선거 실시를 요구했다. 그는 정중히 명함을 내고 방문 절차를 밟아 의장을 만나서 국회 해산을 진정한 것이라 해명하지만 어쨌든 그 결과는 그가 국회의장 공무집행방해죄 등 죄목으로 구속된 것이다.

고정훈 씨는 <정치와 감옥과 나-부르지 못한 노래>란 저술을 남겼다. 거기에 보면 검찰 조사에서 4대 '오욕(汚辱)' 국회를 해산하지 않고 내각책임제로 개헌하는 등의 방향으로 나아가면 수년 안으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예언한 말이 나온다. 군 정보 계통에서 일한 그의 대단한 예언력이다. 검사의 심문에 대답한 말이다.

"대통령책임제를 내각책임제로 헌법을 뜯어고치고, 사법부 관리들이 검사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일을 처리해 나간다면, 수년 안으로 이 나라는 군부 쿠데타를 겪게 되든지, 아니면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을 또다시 보게 될 것이 틀림없다고 나는 확신하기 때문에 개헌을 반대하는 것이며, 또 4대 오욕 국회의 해산을 주장했던 것이오."

(섣부른 나의 의견을 첨가하자면, 만약에 4·19가 혁명적 사태였다면 혁명 운동의 논리로서 고정훈 씨의 판단이 정확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사후의 생각이다. 그때는 허정 과정 수반의 '비혁명적 방법으로의 수습'이 옳다고 보았다.)

정치범으로 형무소 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대개가 아서 케슬러의(헝가리 출신) 정치소설 <대낮 속의 어둠>을 말한다. 고정훈 씨도 예외가 아니다. [Darkness at Noon]이라고 영역된 이 책은 공산체제의 가혹한 감옥 생활과 그들의 고문·설득 기술을 묘사한 명저에 속한다. 고 씨는 거기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인용한다.

"사람을 돼지우리에 가두어 며칠을 물도 안 주고 굶기다가 거기에 보다 더 지능적이고 악랄하면서도 동정과 친절을 위장한 무리가 새로 나타나서, 갇히어 굶주린 자에게 과학적으로 세밀하게 계산된 시기에 물과 먹이를 주며 부드러움을 가장하고 회유할 때, 인간은 새로 나타난 전보다 더 무서운 악마를 천사로 알고 따르게 된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그는 굴하지 않고 계속 혁신정당 운동에 일로매진했다. 서상일(徐相日) 씨가 사실상 이끄는 통일사회당(통사당)의 선전국장이 되어 다시 화려한 정치 활동을 했다. 내가 민국일보 출입기자로서 그를 자주 만나게 된 것이 이때이다.

그때의 통사당은 중요 혁신인사를 거의 망라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혁신 정당 가운데 그래도 5석쯤이나마 의석을 갖고 있는 유일한 정당이었다. 기자들이 자주 만났고 언론에 크게 부각되었던 인물은 고정훈 선전국장과 김철(金哲) 국제국장이었다.

당시 혁신 정당들 사이에 뚜렷한 차이를 보인 것은 통일정책을 놓고서이다. 처음에는 거의 모든 혁신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로 모였으나 점차 통일정책을 놓고 의견이 갈려 분열하게 된다.

주류는 남북협상파였다. 우선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이 만나서 협의를 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간단한 듯한 논리다. 당시 대학사회에서도 판문점에서의 남북 대학생 회담이 추진되고 있었다. 특히 서울대 문리대의 민족통일학생연맹은 활발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란 구호도 요란했다.

이러한 민자통의 남북협상 분위기에 점차 이견을 제출하기 시작한 것이 통사당 측이다. 당시는 북이 남보다 경제 발전이 앞섰다고 추산되고 이야기되던 때이다. 그런 사정도 있고 하여 남북 협상이 열린다면 남쪽이 북쪽에 말려들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남북협상 주장에 대한 이견을 강화하기 시작한 통사당 측은 드디어 민자통의 주류 세력과 대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논쟁에 있어서 통사당 측의 대표가 고정훈 선전국장이었다.

당시 민자통 사무실은 을지로 2가 쪽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빌딩의 한 층을 칸막이로 여러 방으로 나누어 쓰고 있었다. 나는 담당 기자로서 그들의 논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 논쟁을 얼마간 엿들을 수 있었다. 회의실에서의 논쟁이 칸막이를 지나 옆방에까지 들렸던 것이다.

고정훈 씨의 큰소리 외침이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당신네들, 남북협상을 한다는데, 그래, 서울에 김일성 입경(入京) 준비위원회를 만들 작정이오?"

그날 이후 통사당 측은 민자통을 탈퇴한다. 그리고 중립화 통일로 당론을 모으고 중립화통일 연맹을 결성한다. 위원장은 진보당 때부터 통일문제를 담당해 온 김기철(金基喆)이 맡았다. 그런데 우선 한마디 해둘 것은 중립화운동은 전혀 다이나미즘(생동력)이 없다시피 했다는 점이다. 남북협상파는 여하간 무언가 크게 내세우고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중통연(中統聯)은 끝내 조용하기만 했다.

여기서 남북협상파와 중립화파에 관한 정책 판단을 할 생각은 없다. 오늘날에 와서 되돌려 생각하면 양쪽 모두 공허했던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때 (오늘날도 그렇지만) 통일이 그렇게 쉽사리 될 일이었던가. 국내정치적 요인보다 더 중요한 국제정치적 요인들이 있었던 게 아닌가.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얼마 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혁신세력은 모두 '일망타진'되어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쿠데타 세력은 그때 남북협상파를 중립화파보다 더 엄하게 다스렸다는 것 같은 인상이다. 물론 혁신세력 모두가 지독하게 당했지만.


▲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고 씨는 4·19 공간에서 혁신진영이 취한 정책이나 활동에 대한 반성 또는 해명하는 글을 남겼는데 혁신진영 인사로서는 드문 일이다.

"내가 선전국장으로 있던 통일사회당은, 민주당 치하에서 <악법 반대 투쟁>이라는 이름의 강제 결혼을 당했었다. 통사당이 시종일관 여타 혁신 세력과의 공동 전선을 거부해 왔었건만 2대 악법 반대 투쟁에 있어서만은 비극적인 강제 결혼을 회피할 도리가 없었다."

"내가 관계했던 통사당이 혁명재판에서 문제시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민주당 치하에서 이른바 악법 반대 투쟁이라는 합헌·합법적 정치운동에서 여타 혁신계열과 공동 투쟁을 벌였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통사당이 중립화 통일 운동을 제창했다는 것이었다. …… 소위 중립화 통일론에 관해서 한마디 해야겠다. 통사당의 공표된 정강·정책은 물론, 당내 사적 토론에서도 만장일치 결의된 내용은 압록강·두만강 일대에 유엔 감시군을 배치한다는 전체 조건 아래서 현 한국의 중립화 통일은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그의 저서 <부르지 못한 노래>는 그의 옥중기이기도 하고, 자서전이기도 하며, 또한 그의 정치철학 설명서이기도 하다. 당시의 한국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번 읽어볼 만하다. 그 책을 읽고 특히 관심을 가진 것은 그가 반드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항상 승공(勝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승공·혁신" "승공·민주사회주의"라는 표현이다. 혹시 그가 해방 후 북에서 있다가 넘어왔기에 다른 혁신계 인사들과는 색다르게 '승공'을 그렇게 강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는 우익 진영의 공격에 미리 대비하여 방어막을 갖추는 지혜에서 그럴 수도 있었겠고. 관계되는 어록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정치에서는 자유민주주의, 경제에서는 혼합체제, 사회·문화에서는 승공·민주사회주의의 정강·정책을 선명." (구국청년당)

"통일사회당 선전국장으로 빌리 브란트 노선을 표방한 우파 혁신 운동을 전개하였다."

"통사당은 어디까지나 반공적 혁신 노선과 승공·민주사회주의를 내세웠으나 이러한 특이성은 대하의 탁수같이 흐르던 소위 혁신 세력의 과열이란 거센 물결을 단시일 내에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승공 혁신의 노선이 잡귀들한테 먹혀 버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혁신계에 위험 분자가 있다고 보고 그들을 '잡귀'라고 표현했었다.)

"제가 지향하던 승공·민주사회주의에 대하여 중간노선이니 용공이니 하는 따위의 어리석은 오해를 갖는 모양입니다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종북몰이 비슷한 행태가 있었다. 그래서 그 종북몰이의 함정에서 벗어나려고 '승공'이란 표현을 굳이 필요 없는 경우에도 남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당시에 있었던 매카시즘의 한 예를 소개하면 이렇다. 통사당 소속 박권희(朴權熙) 의원은 밀양이 지역구이고 민의원에서 국방위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제1 야당인 신민당의 군 장성 출신 의원이 통사당 의원은 군사기밀을 누설할 우려가 있으니 비밀 안건을 다룰 때는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논란이 일어났다. 박 의원은 본회의 발언을 통해 "내가 흰 토끼인데 포수가 붉은 토끼라고 총을 들고 쫓아오니 내가 흰 토끼임을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참으로 답답하다"는 요지의 하소연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서독의 빌리 브란트는 한국에서도 인기였다. 사회민주당을 하던 브란트는 반공(反共) 노선을 매우 분명히 했다. 물론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대부분이 공산당과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있고 공산당과 투쟁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브란트가 '승공'을 연발하지는 않은 것 같다. 정책이나 행동으로 보인 것이다. 고정훈 씨가 '승공'을 연발한 것은 한국적 사정이기도 하고 그가 현명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그마저도 5·16 후 6년 반 동안 형무소살이를 하였으니 정치 코미디라고 할지….

형무소에서 그는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로 된 책을 엄청 많이 읽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어학의 수재인 그가 더욱 실력을 기른 것이다. 일기도 영문으로 써놓기도 했다고.

그가 읽은 책 몇 권만 참고삼아 소개하면….

프랑스어 <성경>
앙드레 말로 <인간의 조건>
버트런드 러셀 <회의주의자 논설집>
카뮈 <이방인> <시지프스의 신화>
어니스트 바커 <정치제도에 대한 고찰>
처칠 <영어 사용인들의 세계역사>

그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소하던 날, 조선일보 정치부 차장이던 나는 서대문에 갔다. 그리고 그가 태워다 달라고 하기에 조선일보 차를 태워 동대문 밖의 자택까지 모셔다드렸다. 보문동이다. 그때 부인을 처음 만났는데 나는 주책없이 고 선생에게 '부인이 미인이십니다'라고 했다. 서울음대 출신임을 나중에 알았다. 회사에 돌아와 출소 인터뷰 기사를 약간 흥분한 상태에서 쓴 것 같다.

그의 책을 읽고 느끼는 것은 그는 문장력뿐만 아니라 문학적 소질도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옥중에서 있었던 위문공연의 다음과 같은 묘사는 하나의 작품으로도 훌륭하다고 하겠다.

"<첫째 토막>

끝으로 토막극이었다. …
널판때기가 들려 들어와 무대 저편 끄트머리에 세워졌다. 백노지가 붙어있고, 거기엔 천만뜻밖에도 《공중변소》란 네 글자가 간판처럼 쓰여 있었다.

나는 정말 놀랐다. 저들 여대생을 가르치는 서양 부인 교수들의 습성은 저런 테마를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양 부인들은, 섹스나 용변을 남성들 앞에서 말하지 않는다. 행동할 뿐이지,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에티켓이다. 따라서 남성들은 여성들 앞에서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엄두도 못 낸다. 그런 얘기는 여성은 여성끼리, 남성은 남성끼리만 하도록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 마치 남녀용의 변소가 엄격히 구분되어 있듯이….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고는 약간 다르다. 말하는 것까지는 용서될 수 있어도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녀평등주의는 남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여성들도 할 수 있다는 풍조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남성들이 여성들 앞에서 섹스를 말하고 용변을 말하는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되는지도 모른다.

한편, 내 옆에 앉은 S교수는 또 다른 각도에서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는 내 옆구리를 찌르면서 대담무쌍한 말을 해준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O대생을 공중변소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악당도 있는데…."

그러나 사전 준비 없이 마음껏 웃기는 즉흥 토막극을 생각해낸 그 성의만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배우로 등장한 여남평등주의자들이 줄지어 등장해서 공중변소 앞으로 다가선다. 시골 아주머니, 할머니, 양갈보, 깡패, 장사치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공중변소 앞에 줄지어 선다.

중년 신사와 남학생과 깡패는 사타구니에 손을 대고 방금 터져 나오려는 소변을 참는 시늉을 한다. 양갈보도 핸드백으로 앞을 두르며 깡충깡충 뛰는 시늉을 한다. 여학생은 두 손을 모아쥐고 앉았다 섰다 하면서 안절부절을 못한다. 만삭이 된 아낙네는 태릉만한 배를 쓰다듬으며 발을 굴렀다. 시골 아주머니도, 할머니도, 장사치들도 흘러나오는 용변을 참는 제스처를 멋지게 해냈다.

서로 밀치락 덮치락 하며 커다란 소동을 벌인다. 그러나 공중변소 문은 꼭 닫힌 채 미동도 않는다.

소동이 고함질로 변하고, 기어이 교통순경이 출동했다. 공중변소 앞에서의 난장판은 절대적인 생리 작용의 발로이기 때문에 <교통정리복무요령>으로는 수습이 안 된다. 변소 앞에서 줄지어 선 군상들의 본질부터가 각양각색의 <속도위반> 전과자들이므로 어지간한 교통순경 따위로는 어림도 없다.

<수컷>만의 청의(靑衣)의 관중들이 허리를 끊고 배꼽을 빼고 너무 웃어서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이젠 더 웃을 수 없을 만큼 지쳐서 장내의 폭풍우가 좀 가라앉았을 때, 공중변소 문이 열리고 징그럽도록 피둥피둥 살찌고 레슬링 선수같이 유들유들한 남성이 사타구니의 단추를 채우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태연하고 아예 무관심 표정으로 나와 섰다. 그러자 또 한 번 요란한 폭소가 터져 나오고 천정이 떠달아날 듯한 박수갈채와 함께 토막극은 그 끝을 맺었다.

<둘째 토막>

…… 예정된 프로가 끝나자 으레 있는 일로 청의(靑衣)의 청중은 사회자도 한 마디 노래를 부르라고 빗발치듯 간청했다. 이우인(李雨人) 양은 본시 성악을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고 피아노와 작곡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그녀는 서슴지 않고 청을 받아들였다. 놓으려고 했던 마이크를 도로 잡은 우인 양은, 우선 다음과 같은 서곡을 외쳤다.

"여러분들 속에 저의 아버님이……그 딱딱한 자리에……시방…앉아 계십니다. ……저는 거기 앉아계신 아버님을…내리뜬 눈시울로 바라면서…혼자 노래 부를 순 없어요.……"

폭발한 듯, 성난 듯한 고래고래 고함 소리가 만장에서 터져 올랐다.

"같이 하시오!" "아버님 모시고 같이 해요!"

원시적인 인정일수록 억세게 일직선으로 흥분시킨다. 늠실거리도록 흥분한 인정은 회색 규칙을 질식시켜 버렸다. 입회한 관리들은 이 교수의 등단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옆에 나란히 앉아있던 이 교수는,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한 번 붙잡아 보고는, 스프링처럼 일어나서 허둥지둥 등단했다. 마이크 앞에 부녀가 껴안고 섰다. 우인 양의 맑고 들뜬 말소리가 다시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아버님이 어린 저를 잠재워주실 때 부르시던 <자장가>를 합창하…겠…습니다."

눈물 먹은 박수 소리가 성난 소나기처럼 터져 나왔다. 고요한 <자장가>는 이내 서글픈 울음으로 굴러 떨어졌다. 부녀는 힘껏 껴안았다. 스피커에서는 소프라노와 베이스가 칵테일 된 울음소리가 파도처럼 물결쳐 나올 뿐….

장내는 한없이 깊은 상처받은 침묵 속으로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것은 영원한 침묵의 밑바닥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애끓는 뜨거운 눈물만이 흥건히 괴어가고 있었다."

그는 책에서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의 말이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박정희가 아니었더라면 여순반란사건은 그 귀추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신생 대한민국을 살려 놓은, 숨은 공로자의 한 사람은 박정희다."

또한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군에서 존경해 온 장군이 꼭 다섯 분입니다. 채병덕 김백일 이용문 박정희 정일권, 이 다섯 분이죠. 세 분은 벌써 저승으로 가시고, 두 분만이 살아 있습니다."

여기서 인물에 관한 평가를 새삼 할 필요는 없을 줄 안다. 다만 고 씨가 박정희 정일권 두 사람을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말해두려는 것이다.

그 후 고정훈 씨는 사업에 손을 대 크게 재미를 본다는 소문이 났다. 당시 인도는 소련의 원조로 대규모 제철소를 지어 철강재를 수출도 하였다. 그 철강재 수입 사업에 손을 댄 모양이다. 그리고 당시 총리였던 정일권 씨가 뒤를 보아준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근거를 댈 수 없지만 고 씨의 여러 가지 글로 미루어 볼 때 있을 수 있는 추측이다.

출입기자로 알았고 형무소에서 나올 때 출영했던 나는 그 후 몇 번 그의 술대접을 받았다.

한 번은 청진동의 요정이라 할 수 있는 비싼 집에서다. 초청된 손님도 다채롭다. 하버드대학의 한국학 교수인 와그너 박사, 나중에 박신자 선수와 결혼하게 되는, 그리고 미 8군 사령관 정치 고문이 되는 스티브 브래드너 씨, 조선일보 논설위원 선우휘 씨·양호민 씨, 그리고 나다. 정말 분위기 좋게 마셨다. 다만 내가 얼마간 촌스러운 실수를 한 것 말고는.

그리고 일본 외교관과의 단출한 술자리에 초대받기도 하였다. 마침 그 일본 외교관도 러시아어를 썩 잘하여 술이 어지간히 들어가자 둘이 러시아어 노래를 합창하기까지 하였다. '카츄샤의 노래'도 한 기억이다. 러시아어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본어로 들은 '카츄샤의 노래'를 연상하며 그 뜻을 짐작하였다.

그 후 고 씨는 사업에 실패했다는 소식이다. 호협처럼 통 크게 놀기 좋아하고, 사람 대접하기 좋아하는 그 낭비벽 때문도 있을 것이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시골의 어느 농장에서 은거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

그가 다시 정계에 등장한 것은 신군부 쿠데타(1980년) 이후이다. 앞서 김철 씨에 관한 회상을 쓰면서 그때의 나의 관찰이나 추측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자세히 썼다.

여하간 1980년대 초의 혁신 정당을 누가 주도할 것인가로 김철 씨와 고정훈 씨가 경합했다고 할 수 있다. 신군부는 마침내 입법회의까지 참가한 김철 씨 카드를 택하지 않고 고정훈 씨를 택한 것이다. 5·16 전의 통일사회당에서 고정훈 씨는 선전국장이고 김철 씨는 국제국장인, 여하튼 평생이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관계이다.

고정훈 씨는 민주사회당(민사당)을 창당하여 11대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강남구에서 출마, 1구2인 선출 때라 민정당 후보와 함께 당선됐다. 그때 제1야당인 민한당 후보는 어찌 되었느냐는 의문이 남게 된다. 여러 가지 풍문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모르는 이야기이니 풍문에 맡겨두자.

민사당은 서울에서 국회의원을 한 명 더 내어 의석이 2석이었다. 고 씨는 의원 임기 내내 주로 국제무대 활동을 했다. 국제의원연맹 등등의 모임에서 한국에도 민주사회주의 정당이 있음을 선전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날에 김철 씨의 사회민주당이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Socialist International)에 이미 가입한 일이 있기에 끝내 SI에의 가입 노력은 실패했다.

민사당은 신정당과 합당하여 당명이 신정사회당으로 바뀌기도 하며, 고 씨가 당수에서 물러난 후에도 존속하였다. 진보당 여명회의 회장을 하고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 권대복 씨가 당수를 이어받기도 하고 고려대학 교수로 있던 권두영(權斗榮) 씨가 이어받기도 하는 등 존속했었다. 권대복, 권두영 양 씨가 모두 권 씨이기에 가끔 혼동이 있었음은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정당 활동 일선에서 물러난 고 씨는 '민주사회주의 연구회의'라는 연구 단체를 만들어 그래도 어지간한 연구활동을 했다. 통사당 때의 정치위원장 두산 이동화 씨와 당무위원장 경심 송남헌 씨를 각각 연구회의 의장과 부의장으로 추대하고, 본인은 운영이사로 실무를 맡았다. 평생 지난날의 선배를 대접하여 그 서열을 존중하고 대우한 일은 혁신 정치인들 사이에서 미담으로 남아있다. 고 씨는 의외로 '의리의 사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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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언론인 출신으로 김영삼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역임했다. '비판적 보수주의자'로 불리며 이념을 떠나 보수와 진보 양쪽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원로 지식인이다. 프레시안에 연재한 기고를 바탕으로 <언론·정치 풍속사>를 냈고 이후 대담, 연재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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