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된 전쟁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 자체가 역사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참모의 손에 목숨을 잃은 독재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면, 역사가 현재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경제를 살렸다고는 하지만 쿠데타를 일으키고 헌법을 파괴하며 정치를 죽였던 사람의 후광으로 당선된 대통령이 자신에게 불리한 판단 기준을 그대로 둘 리는 없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로 단순화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이미 역사에 반하는 사회에, 단지 참고 자료여야 할 교과서가 무조건 외워야 할 교육의 내용이자 전부가 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진에게 역사는 중립성이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자료가 아니다. 진은 강연에서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세계가 이미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굶주리고, 전쟁이 일어나는 방향으로요. 그런 상황에서는 중립을 지킨다거나, 중립을 취하려고 시도하거나, 한 걸음 물러서 있는다거나, 아무 입장도 취하지 않는다거나, 참여하지 않는 것이 모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협력하고 그것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역사로 제시된 것들은 이미 선별된 것이고, 역사는 연구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행동하기 위해 필요하다. 역사는 "일간신문 머리기사나 백악관의 일상적인 선언을 검토할 방법"이자 "진위를 판단할 방법"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야당도 없고 제대로 된 정보를 받을 언론도 없고
진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미국을 민주적인 국가로 보지 않는데, 제대로 된 야당도 없고 제대로 된 정보를 받을 언론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처지와 비슷한 셈이다. 그래서 진은 역사를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 자신밖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건 좋은 일입니다. 의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의지할 수 없다는 걸 아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렇게 홀로 선다는 것은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역사 없이는 길을 잃어버릴 테니까요. 역사를 모르면 권력을 쥔 사람이 마이크 앞에 서서 '우리는 자유와 민주주의와 위협 등 이런저런 이유로 저 나라에 쳐들어가야 한다'고 말할 겁니다. 아무나 마이크 앞에 서서 당신에게 아무 말이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모르면 그들의 말을 검토할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국정화를 거부하는 교수들이 아니라 역사를 스스로 공부하는 모임이다.
진은 2010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의 관점만이 아니라 폭격수로 일했던 삶에 대한 솔직한 고백과 반성, 그로 인해 반전과 평화, 인권운동에 바친 반평생의 삶을 존경한다. 역사는 승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마오쩌둥의 지지자가 우파의 두목으로 몰리다
가장 가까이에서 기록한 장보쥔의 삶도 흥미롭지만 장보쥔이 맡은 <광밍일보>의 편집장으로 살다 '사라진' 추안핑의 삶이 돋보인다. 추안핑은 공산당의 독재를 비판하는 '당천하'라는 말을 뱉어서 반우파투쟁을 일으킨 인물이기 때문이다. 중국민주동맹은 공산주의 혁명 이후 마오쩌둥이 장기공존, 상호감독,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주장하도록 만든 조직이었고, 추안핑의<광밍일보>는 중국민주동맹의 기관지로서 공산당을 감독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마오쩌둥의 '정풍운동'을 지지했던 추안핑이 우파로 몰려 숙청되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리고 자신의 미술선생이기도 했던 장보쥐의 삶을 기록하면서 장이허는 "중국의 수많은 정치운동이" "참으로 많은 사람을 파괴하고 무너뜨렸다"고 평가한다.
"정치운동의 칼날은 각각의 공격 대상이 얼마나 꼿꼿하고 완강한가에 따라 공격을 강도를 달리했는데, 그중 지식인이 가장 취급하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문인으로서 장보쥐는 "한결같은 자세로 인간으로서의 근본을 지키고자 노력했고, 늘 그런 자세를 살아왔"으며 "정치가 사람과 사람의 영혼에 가하는 침식에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장보쥐도 시대의 풍랑 속에 1982년 숨을 거둔다.
사람이 꺾이지 않으면 기억은 되살아난다
중국의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은 이런 깐깐한 지식인들을 모두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치워 버렸다. 그렇지만 꿋꿋이 살아남은 깐깐한 지식인들은 다시 이런 기록을 남기며 역사를 투쟁의 무대로 만든다. 장이허의 이 책이 나오자 중국 정부 당국은 곧바로 판매를 금지했고, 책은 홍콩에서 재출간되며 투쟁을 예고한다. 어차피 역사는 그런 투쟁 아닌가.
장이허의 말처럼 "지난 세월은 연기처럼 사라지지만, 또한 결코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수 없는 것"이다. 누가 권력을 잡든 이런 삶들을 온전히 담을 수는 없다. 교과서는 그런 그릇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가 국정교과서를 만들고 역사를 아무리 재단하더라도 강건하게 길을 걷는 지식인들이 있다면, 지난 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을 거쳤어도, 사람이 꺾이지 않으면 기억은 되살아나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 길이 잘 보이지 않는 건 정부가 국정교과서를 추진해서가 아니라 깐깐한 지식인들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깐깐한 척하는 지식인 말고 깐깐하게 살아가는 지식인 말이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우리나라 대표 생협 한살림과 함께 '생명 존중, 인간 중심'의 정신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살림은 1986년 서울 제기동에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열면서 싹을 틔워, 1988년 협동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1989년 '한살림모임'을 결성하고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생명의 세계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살림은 계간지 <모심과 살림>과 월간지 <살림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인간의 소중함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기 : <살림이야기>)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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