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박근혜 대통령을 '환빠'로 만들었나"

[기자의 눈] 역사 해석 차이도 못 견디는데, 남북 차이는 어찌 견디나

지난 2년 사이, 정치 발언 때문에 오싹했던 적이 딱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박근혜 대통령이 이른바 '통일 대박론'을 이야기 했을 때다. 이제까지의 통일론은 대부분 '민족 공동체 회복', '평화' 등 추상적인 언술에 바탕 했다. 그게 당연하다. 두 세대 이상 갈라져 왔던 남과 북이 하나로 합치는 일이 어찌 간단하겠나. 예상되는 온갖 갈등을 아우르려면, 크고 아름다운 가치를 내걸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대박'이라는 경제적 수사를 동원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 예컨대 정치, 사회, 문화적 차이가 빚어내는 갈등은 어떤 가치 지향 속에서 풀어내겠다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냥 힘으로 찍어 누르겠다는 건가. 북한을 그저 '내부 식민지' 쯤으로 삼겠다는 건가. '금광 채굴 대박'을 쫓던 19세기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21세기 북한에서 열겠다는 건가. 취업난에 허덕이는 한국 젊은이들을 위해? 그렇다면, 북한 주민들은 미국 인디언의 운명을 겪게 되는 걸까. 그게 옳은지는 둘째치고서라도, 일단 가능한 일인지조차 모르겠다.

역사 해석 차이도 못 견디는 대통령, 남과 북의 차이는 어떻게 견디나

두 번째로 오싹했던 게 바로 오늘, 11월 5일이다. 박 대통령은 이날 "통일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강한 자긍심과 역사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이라며 "이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통일이 되기도 어렵고, 통일이 되어도 우리의 정신은 큰 혼란을 겪게 되고 중심을 잡지 못하는, 그래서 결국 사상적으로 지배를 받게 되는 그런 기막힌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언론이 이 발언을 '역사 교과서 국정화'와 관련지어 해석했다. 기자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요컨대 박 대통령의 생각은, 역사 해석을 하나로 '통일'하는 게, 그래서 국민의 가치관 역시 하나로 '통일'하는 게, 남과 북을 '통일'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게다. 박 대통령이 생각하는 통일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뚜렷해졌다.

남과 북의 차이, 전쟁 경험 등에서 비롯된 갈등을 풀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통일이 아니다. 지극히 미미한 역사 해석의 차이도 못 견디는 대통령이다. 그가 남과 북의 거대한 차이를 참아낼 수 있을까.


박 대통령이 꿈꾸는 통일은, 남과 북을 하나의 색깔로 칠하는 것이다. 그걸 위해 남쪽을 먼저 하나의 색깔로 통일하겠다는 의도다.

평화 공존 통일인가, 한 가지 색깔로 도배하는 통일인가

대한민국 사람들은 대부분 통일을 희망하며 자랐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학교에서 불렀다. 박 대통령에 비판적인 이들, 즉 민주화 운동 세대 역시 '자주, 민주, 통일'을 염원하며 청년 시절을 보냈다. 군대 정훈 교관 역시 '통일은 우리의 과업'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이 나라에선 통일에 대해 나쁜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 자칫하면, 진보와 보수 양쪽으로부터 공격 받는다. 하지만 이제는 따져 물을 때가 됐다. 대체 어떤 통일인가. 통일도 통일 나름이다. 남과 북의 차이를 최대한 존중하며, 평화 공존하는 통일이 있다. 약자, 소수자를 힘으로 찍어 누르고 한 가지 색깔로 도배하는 통일도 있다.

그러고 보니, 박 대통령은 '통일'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자신의 '통일론'을 제출한 적이 없다. 김일성, 노태우, 김대중 등은 각각 나름의 통일론을 제시했다. 연방제, 한민족공동체, 삼단계 통일 방안 등이다. 예컨대 김일성은 연방제와 함께 남과 북의 파격적인 군비 축소를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정치 공세였다. 그래도 무시하긴 힘들었다. 현재 모습만 기억하는 이들은 믿기 힘들겠지만, 극우 논객 지만원 박사도 1990년대에 김일성과 비슷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남한이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군비를 줄여야 한다는 게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북방외교를 했다. 북한의 전통적인 우방과 수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신라 방식 통일 꿈꾸나?

그런데 박 대통령의 통일론은 무엇인가.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차이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과정 없이 이뤄진 통일 사례가 한국 고대사에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다. 신라는 당(중국)과 손잡고 폭력으로 통일 했다. 당과 신라의 매소성 전투가 사실상 통일전쟁의 마지막이었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옛 백제와 고구려 일부 영역을 신라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기까지는 그 뒤로도 많은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신라 방식의 통일은, 갈등 해소 비용이 천문학적이다.

정말 이런 통일을 꿈꾸는 건가. 그래서 고대사에 관심이 많은 건가. 도무지 알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 ⓒ연합뉴스


'사상의 노예' 만드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통일이 되어도 우리의 정신은 큰 혼란을 겪게 되고 중심을 잡지 못하는, 그래서 결국 사상적으로 지배를 받게 되는 그런 기막힌 상황"이라는, 박 대통령의 말 역시 궤변이다.

사상적으로 지배 받는 일, 즉 '사상의 노예'가 되는 걸 피하는 길은, 사상의 자유 시장에 몸을 내던지는 것뿐이다. 획일적인 테두리에 갇힌 정신이 자유롭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사상은 오로지 비판 속에서만 자유롭다. 획일적인 반공 교육을 받았던 세대가, 가장 격정적인 운동권이 됐던 역사가 입증한다. 청소년 시절, 상대적으로 다양한 사상을 접했던 이들이 대학에 진학한 뒤, 학생운동은 오히려 퇴조했다. 자유를 찾는 건 사람의 본성이다. 억눌린 사상은 거센 반동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국가가 나서서 "정신의 중심"을 잡아주겠다는 게 '역사 교과서 국정화'의 의도라면, "사상적으로 지배를 받게 되는 그런 기막힌 상황"을 대통령이 원한다는 뜻이다.

누가 대통령 축사에 <환단고기> 넣었나

통일을 이야기할 땐, '대박'이라는 경제 용어를 썼던 대통령이 뜬금없이 '사상'이라는 추상어를 꺼냈다. 그것도 이상하다. 여기서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첫 해인 지난 2013년 8월15일 광복절 축사에서 "고려 말의 대학자 이암 선생은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환단고기>의 한 대목이다. 우리 민족이 인류 문명사의 새벽을 열었으며, 유라시아를 사실상 지배했었다는 내용을 담은 상고사 서적이 <환단고기>다. 책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는 역사학자는 거의 없다. 20세기에 쓰여진 '위서(僞書)'라는 게 정설이다. '남녀평권(男女平權)' 등 근대적인 용어가 책 안에 있다는 점이 주요 근거다.

<환단고기>는 전두환 군사정부 시절인 1980년대 대표적인 베스트셀러였다. '민족 자긍심'을 고취시키니 좋은 일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민족 자긍심'으로 포장된 지나친 국수주의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현실에 대한 합리적인 토론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이는 1990년대 노동현장에서 노조 무력화를 위한 이념적 장치로도 이용됐다. 당시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등 대기업 공장에서 국수주의 역사관에 바탕 한 모임이 속속 생겨났었다. 기업 및 보수 진영이 이를 후원했다.


누가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에 <환단고기> 속 문장을 집어넣었을까. 텔레비전에 가끔 '일베' 화면이 등장하는 방송 사고처럼, 그저 실수였을까. 아닌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취임 첫 해부터 상고사, 고대사 연구에 대한 지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정연태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는 지난해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오히려 (국수주의 성향의) 재야사학자의 의견이 옳고 전문학자는 식민사학의 후예로 몰아가는 구도가 아닌가 걱정 된다"고 지적했다.

<환단고기>만큼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어도, 국수주의 역사관은 뿌리가 깊다. 무술 혹은 정신 수련 단체 가운데 일부가 이런 역사관을 퍼뜨리기도 했다. 일부 민족 종교, 신흥 종교 역시 부분적으로 관계가 있다.

정말 궁금하다. 누가 박 대통령에게 '상고사'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줬을까. 누가 박 대통령의 '사상'을 지배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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