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뽕으로 '헬조선' 잊으라?

[기자의 눈] 국정 교과서 '고대사' 강화 노림수는…

때 아닌 '역사 전쟁'이 한창이다. 박근혜 정부는 역사 전문가와 다수 시민의 반발을 무시하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 안을 확정 고시했다. 반발은 더 거세질 전망이다.

이게 '큰 전쟁'이라면, 법정에서 벌어지는 '작은 전쟁'도 있다. 서울 서부지방법원 304호 법정이 전장이다. 김현구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가 지난달 30일 이 자리에 섰다.

법정 속 '역사 전쟁'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지난해 출간한 <우리 안의 식민사관>에서 김 교수가 "식민사학자"라며 실명 비판했다. 이에 대해 김 교수가 '출판물에 의한 명예 훼손'이라며 이 소장을 고소했다. 검찰이 이를 기소하면서 재판이 열리게 됐다.

김 교수는 한일 고대사를 연구한 원로 학자다. 이 소장은 역사 대중화에 힘쓴 유명 저술가다. 김 교수가 쓴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등이 문제가 됐다. 이 소장은 이들 저술이 제국주의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옹호했다고 본다.

자세한 이야기에 앞서 꼭 짚고 싶은 게 있다. 이 소장의 저술에 대해 김 교수가 꼭 소송으로 대응했어야 하나 싶은 아쉬움이다. 실명 비판에는 실명 비판으로 대응하는 게 자연스럽다. 굳이 소송을 하는 바람에, 역사 전문가가 아닌 법관들이 결정권을 쥐게 됐다. '정치의 사법화'에 이어 '역사의 사법화'까지 진행되나 싶다. 안타까운 일이다.

김 교수의 책 두 권은 출간 직후 기자도 꼼꼼히 읽었었다. 몹시 흥미로웠다.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는 제목만 보면, 제국주의 일본이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려 강변했던 '임나일본부설'을 옹호하는 내용인 듯싶다. 기자의 독후감은 다르다. 한국과 일본 고대사에 두루 정통한 원로 학자가 임나일본부설의 실체와 허구에 대해 잘 정리한 책이라고 봤다.

'나만 그렇게 봤나' 싶어서 온라인 서점의 독자 후기를 찾아봤다. 대부분 기자와 같은 생각이었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인 <일본서기>를, 거꾸로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는 근거로 삼은 책"이라는 평가다. '제목 보고 품었던 생각과 책 내용이 달라서 김이 샜다'라는 반응도 있다.

"독도가 어느 나라 땅이냐?"

이 소장의 독후감은 달랐던 모양이다.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를 실제로 지배했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라는 것.

역사 비전문가인 기자는 이들 역사학자가 논거로 삼는 사료 대부분을 읽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의 논쟁에 함부로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다만 글을 읽고 쓰고 다듬고 비판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입장에서 보자면, 김 교수의 책 내용은 분명히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반박이다. 다만 그 내용이 화끈하지는 않아서, 일본의 역사 왜곡에 분노한 독자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김 교수의 고소로 시작된 재판을 다룬 보도는 드물다. 그러나 역사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선 이미 뜨거운 화제다. 김 교수를 가리켜 '친일파'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지난달 30일 공판에선, 피고인 측 변호인이 김 교수에게 "독도가 어느 나라 땅이냐"라고 묻기도 했다. 민망한 장면이다. 김 교수는 이 소장을 초등학생에 빗대서 비난을 샀다. 역시 민망하다. 이 소장은 '(1940년대) 동북항일연군'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다. 따라서 김 교수가 보기에 이 소장은 고대사의 비전문가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오래 전 전공 분야로 지금의 지식 성취를 평가하는 건 잘못이다. 다음 재판에선 이런 모습을 보지 않기를 바란다.

고대사 강화, 정부-여당에겐 '꽃놀이패'

사인 간의 분쟁일 수도 있는 재판 이야기를 길게 한 건, 두 역사학자의 '작은 전쟁' 너머로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큰 전쟁'의 그림자가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국정 역사 교과서 대표 집필진이 4일 발표됐다. 신형식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와 최몽룡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다. 신 교수는 고대사, 최 교수는 그보다 이전 시기인 상고사 전문가다. 국정 역사 교과서 집필 과정에서 고대사를 대폭 강화한다는 게 정부 방침이라고 한다. 대표 집필진 선정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정치적으론 노련한 선택이다.

첫째, 중국, 일본 등 주변 강대국의 역사 왜곡에 맞선다는 명분을 얻는다.


둘째, 국수주의 시각으로 고대사를 서술하면, 현 정부에 따라 붙는 '친일' 이미지를 희석할 수 있다. 아울러 정부가 '반민족'적인 역사를 서술한다는 비난도 무마할 수 있다.


셋째, 국수주의 색깔을 빼고 철저히 실증적으로 고대사를 서술해도 마찬가지다. 고대사가 늘어나기만 하면 된다. 현 정부-여당 수뇌부의 부모 세대가 기득권층, 친일파로 살았던 시기가 현대사다. 어떻게 서술하건 부담이다. 교과서 분량은 정해져 있는데, 고대사가 늘어나면 다른 부분이 줄어든다. 현대사가 축소될 게다. 이 점만으로도 정부-여당에겐 좋은 일이다.

군사 정부와 국수주의 고대사

고대사는 근거 사료와 유물이 적다. 그나마 있는 유물, 유적 가운데 상당수가 북한 및 중국에 있다. 그래서 다양한 주장이 나올 수 있고, 이를 명료하게 검증하는 건 어렵다. 그러니까 국수주의적인 주장도 교과서 안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이 부분을 강화하면, 앞서 언급한 둘째 효과를 얻는다. 실제로 국수주의적인 역사 서술은 1980년대 군사 정부 시절에도 대대적으로 유행했었다. 지금도 이어지는 <환단고기> 유행이 대표적이다. 사관학교 교관이 생도들에게 극단적으로 국수주의적인 역사 강의를 해서 문제가 된 일도 있다.

이른바 뉴라이트 학자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다수 역사학자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국수주의적인 고대사 서술 역시 거부하는 역사학자가 다수다.

둘 사이에는 차이도 있다. 뉴라이트 역사관은 대중적 호응이 적다. 반면, 국수주의적인 고대사 서술은 인기가 높다. <환단고기> 같은 경우는 아니어도, 시중에서 잘 팔리는 역사 개설서 가운데 많은 수가 그렇다. 지금 송사에 휘말려 있는 이덕일 소장 역시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라는 책을 냈었다.

고조선이 과연 "대륙의 지배자"였는지에 대해 따질 능력은 없다. 하지만 그게 과연 중요한 쟁점인지에 대해선 따져 묻고 싶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정부도 같은 이유를 댄다. 국정 역사 교과서에서 고대사 서술을 늘리겠다는 주요 이유가 주변 국가의 역사 왜곡이다.

그렇다면, 더욱 냉정한 대응이 필요하다. 상대가 욕한다고 함께 욕하면, 주먹 약한 사람만 손해다. 강자의 감정적인 주장에 약자가 맞서는 무기는 차가운 논리와 정확한 사실이다. 그래야 국제 사회에 호소할 명분이 있다.

'강자 숭배' 역사 교과서가 '자학 사관'

뉴라이트와 친일 논란, 고대사의 영광을 강조하는 역사 서술. 얼핏 동떨어져 보이는 두 가지를 가로지르는 키워드는 '강자 숭배'다. 친일 지식인 윤치호는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고 했다. 힘이 없으면 비판할 자격 없다는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 내정자 문창극은 윤치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윤치호), 영어로 일기를 쓰는 사람이에요. 1891∼1892년 그때. 그러니 (영어 못하는) 우리는 다 가서 죽어야죠. 우리는 사실 다 죽어야지."

영어라는, 강자의 언어에 서툰 이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논리다. '고대사의 영광' 역시 마찬가지다. 고구려, 발해가 자랑스러운 이유는 오직 하나다. 넓은 영토. 하지만 역사에는 땅이 넓었던 시기, 좁았던 시기가 다 있다. 문화 수준이 높고 두루 잘 살았던 때도 있고, 양극화가 심했던 때도 있다. 영토는 좁아도 꽤 살 만한 공동체를 만들었던 시기의 조상들은, 그렇다면 부끄러워해야 하나. 단지 후손에게 물려줄 땅을 넓히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역사를 그렇게 배운 이들은 현실도 같은 눈으로 본다. 힘이 없는 자는 비판하고 저항할 권리도 없다고 여긴다. 강자를 숭배하고, 약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학교를 마친 뒤, 비정규직, 영세 자영업자, 중소기업 직원, 실업자가 될 것이다. '강자 숭배'를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야말로, 그런 점에서 '자학 사관'이다. 약자로 살아갈 대부분을 자학하게 만든다.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그는 "역사학자 90%가 좌파"라고 말했다.ⓒ연합뉴스

좌파로 몰았던 역사학자를 다시 식민사학자로 몬다?

새로운 국정 역사 교과서, 어떻게 만들지 두고 보겠다. 고대사 서술 강화 방침이 무리한 국수주의로 흐르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역사학자들이 뉴라이트 사관에 반발하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역사학자 90%가 좌파"라고 했다. 고대사 서술이 지나친 국수주의로 흐를 경우, 이를 지적하는 전문가들에 대해 "역사학자 90%가 식민사학자"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두렵다.

그래도 한번 믿어본다. 자신들이 '좌파'로 몰았던 이들을 설마 '식민사학자'로 몰지는 않겠지. 좌파와 친일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아울러 한 가지 더. 현실이 '헬조선'인데, 고대사에서 긍지를 찾겠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인가 싶다. 현실을 바꾸는 게 먼저 아닌가. 그러자면, 그 현실을 직접 잉태한 현대사부터 알아야 한다.

현실은 시궁창이어도 족보만 좋으면 만족한다는 '몰락 양반' 흉내인가. 글쎄다.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몰락 양반'이야말로, 윤치호 등 친일 지식인이 경멸하던 부류다. 여전히 윤치호 흉내 내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제대로 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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