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을 계기로 왕조 정치가 종식되고 공화정이 시작되었으며, 봉건적 경제 형태와 사회적 계층 질서는 자본주의적 경제 사회 질서로 변화했다. 봉건 지주와 소작농, 귀족과 평민의 신분 질서도 자본가와 노동자, 소상공인, 농민 등의 자본주의적 계층 질서로 재편되었다. 사회의 전반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1949년 마오쩌둥을 위시한 중국공산당이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국민당을 패퇴시키고 중국 대륙을 차지했다. 이로써 중국 대륙에서는 사회주의로의 혁명적 사회 개조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강도 높은 토지 개혁과 계급투쟁을 통해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질서로 재편했다. 개인의 소유권은 허용되지 못했으니 당연히 자본가는 생존할 수 없었고, 노동자와 농민만이 허용되는 세상이 되었다.
개혁 개방, 배고픈 사회주의에 대한 거절
그러나 사회주의 실험은 배고픈 중국을 만들어냈고 인민들은 새로운 세상을 희구했다. 1978년 실용주의자 덩샤오핑은 보다 잘사는 사회주의 중국을 만들자는 기치 아래 개혁 개방을 선택했다. 중국의 인민은 배고픈 사회주의가 아니라 배부른 사회주의를 필요로 했다.
비록 사회주의 원칙에는 어긋나더라도 국민들의 배를 채워줄 수만 있다면 그것이 해답이라는 것이 실용주의자 덩샤오핑의 생각이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말, 이른 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의 거국적 실천이 시작되었다. 개혁 개방은 이렇게 탄생했다. 중국 현대사에서 세 번째 혁명적 변화가 중국 대륙을 뒤흔든 것이다.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三中全會)에서 대내적 개혁과 대외적 개방의 정책 추진을 결정했다. 그리고 대외 개방의 첫 걸음으로 모두 5개의 경제 특구를 설치했다. 죽(竹)의 장막으로 불리던 중국이 세계를 향해 처음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광둥 성의 선전(深圳), 주하이(珠海), 산터우(汕頭), 푸젠 성의 샤먼(厦門), 그리고 하이난다오(海南島)는 중앙 정부에 의해 경제 특구로 지정되었고, 해외 자본을 유치하고 선진 기술을 도입해서 중국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개혁 개방의 실험 무대가 되었다.
개혁 개방 실험 무대, 왜 모두 남부 연해 지역인가?
그런데 특이하게도 개혁 개방의 실험 무대는 모두 중국의 남부 연해 지역에 집중되었다. 왜 하필이면 실험 무대로 남부 연해 지역 즉, 푸젠 성과 광둥 성을 선택했을까? 여기에는 분명 정치경제적 역학관계와 사회문화적 고려 등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우선, 베이징에서 먼 거리에 있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만약 중앙 정부의 지근거리에서 개혁 개방을 시도했다가 실패한다면 자칫 정치적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장 경제의 활성화는 중앙 정부의 눈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판단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음으로, 화교의 자본을 우선적으로 유치하고자 했을 것이다. 광둥 성과 푸젠 성은 화교들의 고향이다. 동남아 화교의 대부분은 이곳 두 지역 출신들이다. 고향에 대한 투자는 기업의 이익 추구를 최대 목표로 하는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투자 형태가 아니다. 이익 추구보다는 오히려 고향의 발전에 공헌하겠다는 온정적 투자의 성격이 강하다.
이제 갓 세상에 얼굴은 내놓은 풋내기 중국으로서는 이러한 온정적 투자의 유치가 급선무였다. 시장 경제를 처음으로 도입하는 중국으로서는 외국 자본에 의한 종속의 문제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화교 자본은 민족 자본의 성격을 가졌으니 최소한 종속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이 외국 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시장 경제를 성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데에는 화교(華商) 자본의 투자가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이다.
그 다음으로, 해외 경제와의 연계성을 고려했을 것이다. 남부 연해 지역은 화교들의 자본을 유치하는데 뿐만 아니라 해외 경제와 연계하는데 있어서도 유리한 지정학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선전과 주하이는 각각 홍콩과 마카오에 인접해 있고, 푸젠 성의 샤먼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타이완과 마주하고 있다. 산터우 역시 역사적으로 남방의 무역 항구였다. 따라서 홍콩, 마카오, 타이완 그리고 동남아 화교들을 통해서, 중국을 세계로 연결시키려고 한다면, 광둥과 푸젠을 비롯한 남부 연해 지역보다 더 적당한 지역은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지역의 역사 문화적 특징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은 경제 특구를 통해서 '시장경제'라는 자동차를 시험적으로 운전해 보고자 했다. 당연히 운전사는 시장 경제에 익숙한 사람이어야 했다. 광둥과 푸젠의 사람들은 옛날부터 경제와 실용을 중시하던 사람들이다.
정치적 화제는 베이징에서, 의리를 중시하고 관료를 추구하는 것은 장강 이북의 사람들이, 경제는 화남(華南) 사람들이 한다는 말이 있다. 화남 사람들의 일상은 정치보다는 경제적 이야기로 채워진다. 크게 학력을 중시하지도 않는다. 중학교 정도만 졸업하면 벌써 아버지의 가게에서 장부를 들고 수금하러 다닌다. 장사를 하는 것이 일상에 배어 있다. 이러한 운전사가 시장경제의 자동차를 보다 잘 운전할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개혁 개방의 기관차 역할, 광둥(廣東)과 푸젠(福建)
중국은 우선 경제 특구를 발전시키고, 성과가 있으면 연해 지역으로 그 개방의 폭을 넓히고, 다시 내륙으로 개방과 발전 지역을 넓혀가고자 하는 점진적 개방 정책을 사용했다. 점(點)에서 선(線)으로, 다시 면(面)으로 확장시키는 점진적인 개방 정책의 첫 시험대가 바로 이 경제 특구였고,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다시 말해서 경제 특구는 개혁 개방의 기관차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 것이다. 선전을 비롯한 경제 특구들은 시골의 작은 항구, 황량한 농촌에 불과했지만 경제 특구로 지정되고 20여 년 동안 연평균 30%를 웃도는 빠른 성장을 경험했다. 이제는 명실공히 홍콩을 능가하는 현대화된 도시로 변모했다.
중국 정부는 경제 특구에서의 빠른 발전을 토대로 곧이어 연해 지역에 14개 개방 도시를 지정했고 경제 개발을 본격적으로 가동했다. 또 연해 개방 도시에서도 성공하자, 이제는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는 전 방위적 경제 건설을 가속화 시키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달성된다면, 그 공은 당연히 광둥 성, 푸젠 성 등 남부 연해 지역에 돌려야 한다. 이 지역이 개혁 개방과 경제 건설의 기관차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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