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日이 박정희 쿠데타 초안에 퇴짜 놓은 이유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16> 유신 쿠데타, 아홉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현대사 이야기 연재 이전 주제 바로 가기]

[유신 쿠데타, 첫 번째 마당] 여당도 당황케 한 청와대의 '공화국 죽이기' 작전

[유신 쿠데타, 두 번째 마당] 궁정동의 은밀한 '사업'과 박정희, 그 특별한 관계

[유신 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와 김일성, 1인 독재 위해 뒷거래?

[유신 쿠데타, 네 번째 마당] '멸공' 박정희, 김일성과 대화하려 쿠데타?

[유신 쿠데타, 다섯 번째 마당] 온 국민이 춤춘 그때, 청와대는 딴마음 품었다

[유신 쿠데타, 여섯 번째 마당] 북한보다 야당이 더 못됐다? 박정희의 위험한 선동

[유신 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쿠바가 백악관 습격했다면"…분노한 박정희

[유신 쿠데타, 여덟 번째 마당] <타임>은 왜 박정희 주장을 '상상' 취급했나


프레시안 : 데탕트로 상징되는 국제 정세 변화에 박정희 정권이 어떤 식으로 대응했는지를 지난번에 살폈다. 데탕트로 인해 박정희 정권이 느꼈을 위기의식에 주목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러한 위기의식을 한국보다 훨씬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던 곳은 대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미국과 중국의 데탕트,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에서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본 건 대만일 수밖에 없었다. 대만이야말로 국가 존립의 절대 위기를 맞게 된다. 1972년을 전후한 데탕트 시대에 대만 정권이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살펴보는 건 우리의 경우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국가 존망의 위기 맞은 대만, 박정희와는 정반대 선택

프레시안 : 대만은 그 시기에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나.

서중석 : 1971년 압도적인 표차로 중국의 유엔 가입이 결정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으로도 중국이 들어가고 대만은 축출됐다. 1972년에는 닉슨이 중국을 방문해 모택동(마오쩌둥)과 상하이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런 사태를 연이어 맞이하면서 대만은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고 볼 수 있다. 이건 한국과 비교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제 대만은 독립 국가가 아니라 하나의 중국에 포함된 일부분이라는 인식이 세계에 퍼져나갔다.

그러면서 대만과 국교를 끊는 국가가 늘어났다. 일본과 서독은 1972년에 단교했다. 얼마 후에는 서독 수상도 모택동을 만났다. (1975년 10월, 서독 수상으로는 최초로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등을 만났다. 편집자) 1973년에는 스페인이 단교를 통보했다.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이 대만의 장개석(장제스) 정권과 마찬가지로 총통제를 한 걸 생각하면, 어떻게 보면 프랑코 정권도 참 고약한 정권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대만은 유엔 산하 기구와 다른 국제 기구에서도 축출될 위기에 놓였다. 아시아개발은행, 아시아태평양각료이사회는 물론 심지어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도 대만 축출이 논의됐다.

대만 국내에서는 1971년에 한국과 비슷하게 민주화 요구가 거세졌다. 1972년 장개석은 제5대 총통으로 선출됐지만, 워낙 고령이어서 건강이 좋지 않았다. 실권을 쥔 건 이해 입법원 표결로 행정원장이 된 그의 아들 장경국(장징궈)이었다. 장개석이 총통직에 복귀한 1950년 장경국은 국방부 총정치부 주임이 됐고, 중국청년반공구국단을 조직해 백색 테러에 나서 아버지와 함께 국민당 일당 전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1950년대에 장경국이 참 극우적인 활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비난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1972년 행정원장이 된 이후의 활동을 보면 그렇지 않다. 그리고 장경국은 국민당 정권이 중국 본토에 있었을 때도, 대만으로 쫓겨 왔을 때도 청렴을 상징하는 인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 : 대만과 달리 한국은 이 시기에 유엔에서 밀려나거나 미국, 일본, 서독 같은 자본주의권의 중심 국가들과 국교가 단절되는 일을 겪지 않았다. 대만 측이 느꼈을 위기의식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위기 상황에서 대만 집권 세력은 어떻게 대응했나.

서중석 : 1972년 국가 존망의 위기를 맞아 장경국은 유신 체제로 간 박정희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정치를 개혁해 중앙 민의 기구 대표 증원 선거를 통해 대만 출신과 화교 대표의 숫자를 늘리고, 대만 출신 정치 엘리트들이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폭을 넓혔다. 1972년 조각할 때에는 행정원 부원장, 내정부장, 교통부장, 대만성 주석, 타이베이 시장에 대만 출신을 임명했다. 내정부장, 대만성 주석, 타이베이 시장 같은 아주 중요한 자리에 중국 대륙에서 온 사람 대신 대만 출신을 임명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각 분야에 대륙 출신과 대만 출신을 그 이전보다 균형 있게 배치했다. 그 후 대만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증가하는데, 1970년대에 그렇게 임명된 사람들이 나중에 국민당은 물론 민주진보당(민진당)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맡게 된다. 대만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1988년에 총통이 되는 이등휘(리덩후이)도 1970년대에 장경국이 대만 출신을 폭넓게 기용할 때 등용된 사람이다.

장경국은 행정 혁신을 통해 공무원의 업무 효율을 높이고 관료주의를 제거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니까 국가적인 위기를 맞아 대대적인 개혁을 했고, 그런 개혁의 핵심은 모든 대만인이 정부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의 문을 넓게 연 것이었다. 즉 대만 출신들이 대거 요직에 앉을 수 있게 하는 대담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유신 체제가 경상도라는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삼으면서 더욱더 경직된 것과는 정반대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프레시안 : 이 시기에 유신 쿠데타라는 극단적인 길과는 거리가 먼 선택을 한 대만이 한국에 못지않은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는 점도 함께 기억해야 할 대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1970년대 초 대만 당국이 일부 유화 조치를 한 건 맞지만 계엄령은 안 풀지 않았나.

서중석 : 물론 계엄령은 한참 후에 푼다. 그 이전과 똑같은 식은 아니었지만, 유화 조치 이후에도 시기에 따라서 탄압도 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큰 변화를 한 건 사실이다. 그것이 나중에 양안, 즉 대만과 중국의 관계를 새롭게 여는 것으로 이어지고 그러면서 계엄을 해제하게 되는 것이다. (공산당에 밀려 대만으로 온 1949년 국민당 정권은 대만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1987년 국민당 정권은 38년 만에 계엄령을 해제했다. 편집자)

▲ 어린이들과 함께한 장징궈(가운데, 1940년대 초 모습). ⓒ위키미디어커먼스


쟁점의 핵심은 10.17쿠데타가 데탕트에 위기감 느껴 일으킨 정변인지 여부

프레시안 : 그간 데탕트와 박정희 정권의 대응을 몇 차례에 걸쳐 짚었다. 이 문제를 전반적으로 정리했으면 한다.

서중석 : 박정희가 5.16 군부 쿠데타 이후 한 행위를 보면 데탕트에 상당한 위기감을 가질 수도 있었다. 박정희는 5.16쿠데타를 일으키자마자 4월혁명 공간에서 통일 운동을 전개했던 혁신계, 학생 등 민족주의자들을 대거 감옥에 가뒀고 특수 반국가 행위라는 이상야릇한 죄명을 씌워 중형에 처한 사람 아닌가. 수구 냉전 논리, 진영 논리에 이승만 못지않게 충실했다. 그리고 한반도와 대륙을 침략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노골적인 친일 정책을 폈다. 박정희가 빈번히 사용했던 민족이라는 말이 얼마나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는지를 이런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박정희는 또 선건설이라는 정책 아래 1960년대에는 통일 문제를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북한과 교류할 것을 주장하면 국가보안법 등으로 처단했다. 그러니까 박정희가 데탕트, 화해 분위기를 보면서 위기감을 가질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박정희가 정말 위기감을 느꼈느냐.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1968년, 1969년 그 심각한 사태 속에서도 박정희는 자신감을 갖고 오히려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1971년 12월 국가 비상사태 선언을 할 때는 남침에 대한 위기감을 아주 강하게 표명했다. 그런 박정희가 데탕트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통일이라는 것도 일종의 정책적 수단이었다고 본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가 하는 걸 다시 한 번 볼 필요가 있다. 그 점에 대해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이 여러 쪽에 걸쳐 쓴 것이 있다.

프레시안 : 김정렴은 어떤 이야기를 했나.

서중석 : 김정렴은 1969년부터 1978년까지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다. 김정렴은 박정희가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의 과감한 동방정책과 동서독 협상을 보고, 북한과 관계 개선을 하거나 통일을 하는 데 참고가 될 것이라면서 예의 주시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많은 정보를 수집해 자신에게 올리라고 비서실에 지시했다는 것이다. 김정렴의 주장에 따르면 박정희는 결코 데탕트를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그걸 활용하려 했다는 점을 김정렴은 강조했다.

박정희는 1970년 8.15 경축사를 통해 평화 통일의 기반 조성을 위한 접근 방법을 밝히고, 북한과 대화 가능성과 선의의 경쟁 용의를 피력했다. 이건 1960년대의 선건설론과는 확실히 다른 주장이다. 1971년 8월부터 이뤄진 남북 적십자사 접촉과 예비 회담은 그해 연말이 다 가도록 진척이 없긴 했지만, 박정희가 순리대로 적절하게 데탕트에 맞춘 것 아니냐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적십자 회담이 이뤄지면서 언론인 송건호도 적십자사 자문 위원으로 1972년 평양에 가고 그랬다.

쟁점의 핵심은 1972년 10월 변란 또는 10.17쿠데타가 미국과 중국 간의 데탕트에 박정희가 위기감을 느끼고 대처한 정변이냐 아니냐, 이것이다. 그런데 박정희가 10.17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부터 유신 헌법을 공포할 때까지 과정을 살피면, 데탕트와 유신 체제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바뀌는 걸 볼 수 있다.

박정희는 10.17 특별 선언에서 자신이 긴장 완화에 긍정적인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주장했다고 이야기했다. 김정렴이 말한 것처럼 그랬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세력 균형 관계 변화가 우리의 안전 보장에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위험스러운 영향을 주게 될 것이며 이 지역에서 전쟁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이 현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 특별 선언에서 미국과 중국 간의 데탕트, 중일 관계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미국·일본이 유신 쿠데타 선언 초안에 강한 거부감 보인 이유

▲ 1972년 박정희는 한반도 평화, 남북 대화, 평화 통일을 강조하면서 유신 쿠데타를 일으킨 핵심 이유로 제시했다. 사진은 2011년 11월 14일 박 대통령 생가(경북 구미) 부근에 세워진 고인의 동상 제막식 모습. ⓒ연합뉴스
프레시안 :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그것에 대해서는 몇몇 기자들이 이미 취재한 게 있다. 미국과 중국 간의 데탕트나 중일 관계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김충식 기자의 책이나 홍석률 교수의 논문을 보면 10.17 특별 선언 초안 원문에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를 다룬 부분이 있다. 그것에 따르면 초안 원문에 미국과 중국 간의 관계 변화나 일본이 돌연히 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한 것을 언급하면서, 중국이 현재 유엔에서 한국에 도발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고 일본의 태도 변화로 대만, 베트남이 큰 영향을 받고 있다고 명시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변화의 진짜 양상을 파악해 대처해야 한다면서, 일본과 중국의 관계가 정상화되면 일부 아시아 국가들은 미국과 일본이 체결한 안보 합의가 변화될까봐 두려움에 휩싸이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내용도 있었다고 돼 있다.

유신 쿠데타 전날인 10월 16일 김종필 총리가 필립 하비브 주한 미국 대사에게 이러한 초안을 전달했다. 그런데 이 초안을 본 윌리엄 로저스 미국 국무부 장관은 주미 대사 김동조를 불러서, 미국 측은 계엄령 선포를 결정한 이유를 받아들일 수 없고 박 대통령 담화문이 양국에 심각한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한 박정희를 잘 아는 인물이었던 마샬 그린 미국 국무부 차관보는 "박정희 정부가 대외적 환경 변화를 국내 정치 변화의 이유로 드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10.17쿠데타라는 국내 정변의 이유로 데탕트를 제시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프레시안 : 한 가지 짚고 넘어가면, 마샬 그린 차관보는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주한 미국 대사관의 대리 대사이던 그 그린인가?

서중석 :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은 1980년대까지 미국 국무부에서 힘이 있었다. 어쨌건 그러면서 특별 선언을 발표하기 몇 시간 전까지 김용식 외무부 장관하고 하비브 대사가 협상을 했다고 한다. 하비브는 10.17 특별 선언 초안에서 미국과 일본을 직접 거론한 내용은 물론이고 "강대국"이라고 표현한 부분도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곧이어 일본 대사관으로부터 '일본과 중국의 수교와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중국 방문이 한국의 권위주의 체제 강화의 빌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 그것도 빼달라'는 요구가 들어왔다고 한다. 이처럼 한국적 민주주의가 빗장을 열기 전부터 외세에 시달렸다고 할까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난 미국이 이렇게 '국내 정변을 일으키는 이유로 데탕트를 제시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박정희 정부가 너무나 말이 안 되는 이유를 내걸고 자신들을 이용해 그런 정변을 하려는 것에 화가 났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거 다 빼라', 이렇게 강하게 나왔다고 본다. 그걸 빼는 데 박정희가 동의해준 것도, 아닌 게 아니라 미국과 중국 간의 데탕트가 한반도에 그렇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아니라고 자기도 봤기 때문에 뺀 것 아니겠나. 그렇지 않으면, 박정희 같은 성격을 지닌 사람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어떤 형태로든, 예컨대 1971년 12월 6일 국가 비상사태 선언에서 한 것처럼 그에 관한 문구를 넣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 모든 걸 떠나 그런 걸 할 필요를 못 느꼈다고 본다.

뭐냐 하면, 박정희는 10.17 특별 선언에서 데탕트 위기를 주장하는 것보다 월등 효과가 큰 게 뭔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북 교류, 한반도 평화, 평화 통일을 위한 민족 대단합을 하려면 남쪽이 우선 단결해야 한다. 그러려면 남쪽에서 먼저 생산적인 정치로 가야 한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처럼 국민들을 설득하는 데 좋은 것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데탕트 위기론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한반도 평화, 남북 대화, 평화 통일 같은 것을 각별히 강조하면서 유신 쿠데타를 일으킨 핵심 이유로 제시한 것이다. 민족의 대과업을 이룩하기 위해 이념과 체제가 다르더라도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대화를 계속하는 것이 소신이라고 10.17 특별 선언에서 그렇게 강력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면서 '데탕트 위기 때문에 큰일 났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박정희도 미국, 일본이 요구하는 것들에 대해 '그럴 수 있다'고 판단하고 바로 빼준 것 아니겠나. 난 그렇게 본다.

프레시안 : 미국과 일본에 굴복했다는 식으로 이해할 문제만은 아니라는 뜻인가?

서중석 : 난 그게 아니라고 본다. 박정희를 쭉 살펴보면 머리가 잘 돌아가는 부분이 있었다. 이 사람도 이승만처럼 권력과 관계되는 부분에 대해선 아주 예민하게 머리가 잘 돌아갔다. 그런 사람이니까 그렇게 장기 집권을 할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여튼 10.17쿠데타 이후, 그중에서도 주로 1972년 말에 나온 담화와 문건들을 보면 격변하는 정세에 대응하겠다는 데탕트 위기론이 빠진 것이 특색이다. 박정희는 그해 11월 21일 실시된 유신 헌법안에 대한 국민 투표 결과가 투표율 91.9퍼센트에 찬성률 91.5퍼센트라고 발표되자 그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는데, 여기서 평화 통일과 민족 번영만 말했지 데탕트 위기론은 언급하지 않았다.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으로서 개회사를 할 때도 평화 통일 문제만 거듭 언급했다. 맨 끝에 가서 '내외 정세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자'고 짤막하게 한마디 언급하긴 하지만, 이것도 딱 데탕트 위기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같은 날 박정희는 유신 대통령, 다시 말해 체육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성명을 발표하는데 여기서도 평화 통일을 앞당기겠다는 것만 말했을 뿐이지, 데탕트를 경계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12월 27일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유신 질서는 번영과 통일을 위한 새 질서라고 말했을 뿐 데탕트 위기론은 언급하지 않았다. 평화 통일을 강조하는 마당에 데탕트가 위기를 초래한다고 하는 건 너무나 모순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1년 12월 6일 국가 비상사태 선언 후 1972년에 들어와서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고 일본과 중국은 국교 정상화를 발표하지 않았나. 따라서 국가 비상사태 선언보다도 10.17 특별 선언 같은 것에 데탕트 위기론을 더 강도 높게 담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박정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보기에도 유신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데탕트 위기론을 들고나오는 건 남북 적십자 접촉 등 선행 정책과도 모순되고, 미국 등 해외는 물론이고 국민을 설득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봤기 때문에 박정희는 데탕트 위기론이 10.17쿠데타 같은 헌정 유린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별로 효용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10.17쿠데타를 일으킨 지 한 달쯤 됐을 때 그 부분을 걷어치운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프레시안 : 국가 비상사태 선언과 유신 쿠데타 사이에 있었던 일 중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도 데탕트 흐름에 부응한 것 아니었나.


서중석 : 박정희가 세계적인 데탕트 또는 미국과 중국의 화해로 나타난 아시아 지역의 데탕트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반응했는가 또는 호응했는가는 7.4남북공동성명에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잘 드러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점은 데탕트와 관련해 결론을 내릴 때 확인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예컨대 조국 통일 3대 원칙 중 첫 번째로 제시된 '통일 문제는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이것이 데탕트에 얼마나 호응하는 주장이냐, 이 말이다. 두 번째 원칙으로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 실현'을 이야기한 것도 마찬가지다. 민족적 대단결을 이야기한 세 번째 원칙도 미국과 중국 간의 데탕트를 이야기한 것보다 월등 데탕트에 철저하게 따르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남한과 북한은 서로 상대방을 중상, 비방하지 않고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신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다고 7.4남북공동성명에 들어 있다. 이건 문구 자체가 "긴장 상태를 완화", 이렇게 돼 있지 않나. 이렇게 명백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점은 7.4남북공동성명으로부터 거의 1년이 지나서 나오는 1973년 6.23선언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6.23선언이 데탕트 정신에 충실한 것임은 6.23선언의 다음 문구, "우리는 긴장 완화와 국제 협조에 도움이 된다면 북한이 우리와 같이 국제 기구에 참여하는 걸 반대하지 않는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이건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가 동독에 대해 한 이야기와 똑같다고 볼 수 있다.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또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을 이야기한 부분도 브란트가 동독에 대해 이야기한 것하고 같은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호혜 평등의 원칙 하에 모든 국가에 문호를 개방할 것이며 우리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도 우리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을 촉구한다", 이것도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마찬가지 아니냐, 이 말이다. 그러니까 이 시기에 박정희처럼 데탕트 정신에 충실한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가서 변하게 되는 것이지, 적어도 1973년 6월 23일까지는 그런 모습을 보였다. 여기서 하나 살펴볼 게 있다.

베트남 전황과 미국 경제 악화가 부른 한미 관계의 변화

ⓒ오월의봄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뭐냐 하면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미국의 세계 정책을 다시 깊이 있게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 미국은 한국과 관계 설정에서 아주 중대한 변화를 보였다. 왜 그랬느냐 하면, 1970년대에 들어와서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1960년대 후반에 한국이 그렇게 중요하게 대접을 받았던 건 무엇보다 베트남전쟁 때문 아니었나. 5만 명이나 파병하지 않았나. 세상에, 미국이 보기에 그런 좋은 나라가 그때 어디 있었나.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미국은 한국 군대가 좀 천천히 철수해주기만을 바랐다. 자기들 군대를 빨리 철수시키려면 다른 나라 군대가 베트남에 남아 있어야 했는데, 미국을 제외하고 군대를 제일 많이 보낸 나라가 한국 아니었나. 그러니 미국으로서는 한국군이 자기들 군대보다 늦게 철수하게 해야겠는데, 그 문제가 돈과 관계가 있다고 봤다. 즉 한국 쪽에서도 늦은 철수를 꼭 반대하는 건 아니라고 봤다. 한국으로서는 군대가 계속 주둔하고 있으면 수입이 그만큼 더 생기는 것 아니었나. 미국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여튼 미국으로서는 한국군의 철수 시기 문제를 잘 처리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1960년대와는 상황이 달라졌고, 이와 관련해 박정희 정권의 중요성이 약화된 것이다. 박정희-존슨 시절의 한미 밀월 관계는 이제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베트남전쟁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미국은 경제 문제로 이 시기에 국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있었다. 그래서 닉슨은 1969년 7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고, 1971년 3월에는 주한 미군 7사단을 23년 10개월 만에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경제에 문제가 있었다. 결국 1971년 12월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달러화를 공식 평가 절하한다는 발표를 하는데, 1973년 2월에 또 달러화를 10퍼센트 평가 절하하게 된다. 그러면서 전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약화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통화 체제의 근간은 1944년 브레턴우즈에서 44개 국가 대표가 모여 합의한 고정 환율제와 금·달러 본위제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달러를 일정한 비율의 금(1온스당 35달러)으로 언제든 바꿔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미국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서 1971년 8월 15일 닉슨 미국 대통령은 달러화의 금 태환을 중단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뒤이어 그해 12월과 1973년 2월에 거듭 달러화를 평가 절하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브레턴우즈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 편집자)

프레시안 :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과 같은 한미 밀월 관계가 계속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미국의 세계 전략에서 한반도는 여전히 중요한 지역이지 않았나.

서중석 : 물론 그렇다. 한미 밀월 관계가 바뀌지 않을 수 없었고 미국의 경제적 위상이 그 이전만 못하다고 하더라도, 또 미국과 중국 간 화해 정책이 취해졌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한반도의 중요성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한반도를 위해서 그런 것도, 박정희를 생각해서 그런 것도 절대로 아니었다. 미국이 보기에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중요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건 지금도 똑같지 않나. 미국은 소련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그리고 베트남전쟁을 끝내기 위해 중국과 화해하긴 했지만 반공, 반소, 반중 정책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과 남한의 중요성을 미국이 경시한 적이 없다, 이 말이다.

이 무렵 일본에서 그렇게 강력하다던 다나카 가쿠에이 정권이 1974년에 순식간에 날아가고,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는 1976년 록히드 사건에 연루·구속되는 일이 있었다. 보잘것없는 학력으로 총리까지 올라가 서민 재상으로도 불린 사람인데, 물론 검은돈을 많이 만진 건 분명하지만 이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됐느냐. 미국이 보기에 건방지게, 다나카 가쿠에이가 총리일 때 일본은 독자적으로 중국과 국교 정상화를 했다. 미국과 충분히 상의하지 않고, 아울러 미국 못지않게 잽싸게 그렇게 했다. 이때 다나카 가쿠에이는 친중파로서 중국의 시장을 노렸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일본은 항상 우리 수하에서 움직여야 한다. 미국의 안보를 위해 일본은 존재해야 하며, 일본이 독자적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이걸 지금까지도 아주 명확하게 하고 있지 않나. 그래서 다나카 가쿠에이 정권이 그렇게 날아간 것 아니겠나. 다나카 가쿠에이가 저렇게 된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그 당시 나온 건 아니지만, 이건 일본에서도 대개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록히드 사건을 그렇게 잘 알고 있던 게 어디였겠는가, 이 말이다. 그래서 그때 다들 '저렇게 무서운 나라가 미국'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랬다.

(록히드 사건은 미국의 항공기 제조사 록히드에서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본, 서독, 이탈리아 등에서 뇌물을 뿌린 사실이 드러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다. 일본에서도 전후 대표적인 정경유착 사건으로 꼽힌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전후 일본의 금권 정치, 토건 정치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다.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 등이 다나카 가쿠에이의 검은돈 문제를 파헤친 글이 <문예춘추(분게이슌주)> 1974년 11월호에 게재되면서 다나카 가쿠에이는 궁지에 몰렸다. 결국 그해 12월 총리직을 내놨고, 2년 후에는 록히드 사건 관련 뇌물 수수 혐의로 체포됐다. 이때 도쿄지검 특수부 검사들이 압력에 굴하지 않고 정계의 실력자이던 다나카 가쿠에이를 전격 구속한 것은 오랫동안 회자되는 일화다. 다나카 가쿠에이의 실각과 관련, 중일 국교 정상화 등 다나카 가쿠에이의 외교 정책에 미국이 불만을 품었고 그에 따라 CIA가 록히드 관련 정보를 흘려 다나카 가쿠에이를 무너뜨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록히드 사건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일본 정계의 흑막으로 불린 고다마 요시오다. 고다마 요시오는 기시 노부스케와 마찬가지로 A급 전범이자 만주 인맥의 핵심 인사 중 하나이며, 박정희 정권 때 한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편집자)

어쨌건 남한의 중요성을 미국이 경시한 적이 없다는 것, 이건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한국에서 아무리 인권 문제가 심하고 또 유신 체제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과 별개로 한국은 중요한 지역이라는 것을 미국이 조금도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예컨대 지난번에도 지적한 것처럼 닉슨은 중국에 가기 전에 박정희한테 '미국은 결코 한국을 떠나지 않겠다. 한국을 굳건히 지켜주겠다', 이렇게 약속했다. 그건 데탕트에 대한 한국 정부의 우려를 씻어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한국이 미국에 얼마만큼 중요한지를 표현한 것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열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