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남북관계의 주도권 잡아라"

[주간 프레시안 뷰] 8.24합의 이후, 남북관계 개선을 원한다면…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 반환점인 8월 25일, 남북 고위당국자 합의로 한반도의 군사대결 위기는 일단 모면했습니다. 잘된 일입니다. 박 대통령의 후반기 국정 운영, 특히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기대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과연 이번 8.24합의는 지난 7년 여 간 후퇴해왔던 남북관계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획기적 개선의 계기가 될 수 있을까요?

북한 사과보다 중요한 것

이번 합의가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박 대통령이 원칙론을 접고 한반도의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즉 원칙론이 아니라 현실론이 통한 것입니다. 협상이 진행되던 24일 오전, 박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무엇보다도 현 사태를 야기한, 북한의 지뢰 도발을 비롯한 도발 행위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라면서 "그렇지 않으면 정부는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고 확성기 방송도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이 발언은 협상에 대한 최종 가이드라인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때문에 통일부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북한 전문가들도 협상 타결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이날 심야에 발표된 최종 합의는 '북 측은 최근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남 측 지역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로 남 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과로 보기엔 미흡한 것이었습니다. 재발 방지도 명시되지 않았죠. 물론 정부는 3항 '남 측은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 확성기 방송을 중단한다'가 재발 방지 조항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사과로도 미흡하고 재발 방지도 명시되지 않은 2항을 바탕으로 남북은 당국 회담 개최, 이산가족 상봉, 민간교류 활성화 등에 합의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취임 초 내세웠으나 지난 2년 반 동안 지지부진했던 한반도 신뢰 구축의 첫 발을 떼게 된 것입니다. 북한의 명확한 사과보다는 당면한 위기 상황을 해소하고 나아가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한 셈입니다. 여론조사 결과도 이를 보여줍니다. 리얼미터의 25일 조사에 따르면 북한의 유감 표명이 '충분했다'는 23.5%, '미흡했다'(48.6%) '사과가 아니다'(22.0%) 등 '불만족스럽다'는 응답은 70.6%였습니다. 반면 박근혜 정부가 '잘했다'는 60.9%, '못했다'는 16.9%였습니다. 명확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내는 데는 미흡했지만(70.6%) 전체적으로는 잘했다는(60.9%) 평가인 셈입니다.

당면한 위기 상황의 해소가 화급한 과제였고, 과거 무력 도발에 대한 북한의 명확한 사과가 없었다는 점 등에서 아쉽지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청와대도 이번 합의에 대해 '정부의 원칙론이 통했다'는 식으로 강변하기보다는 이러한 현실적 상황을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북한과의 실질적 관계 개선에 나서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야당도 '사과 미흡'을 이유로 정부를 비판하기보다는, 현실적 상황에 비추어 불가피한 선택임을 인정하고, 합의 결과를 평가해주는 편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에 의해 협상에 끌려들어간 한국

그런데 이번 협상 과정을 복기해보면 협상의 주도권이 한국보다는 북한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북한의 주도에 의해 한국이 협상에 끌려들어간 것이죠.

이번 협상은 4일의 목함지뢰 사건을 시작으로 남한의 확성기 방송 재개(8.10) → 북한 14.5mm 고사총 발사(8.20) → 북한 76.2 mm 직사포 발사(8.20) → 북한 김양건 대화 제기(8.20) → 북한 48시간 이내 확성기 중단 요구(8.20) → 남한 155mm 자주포 29발 발사(8.20) → 북한 준전시상태 선포(8.20) → 박근혜 대통령 3군단 방문(8.21) → 북한 김양건 회담 제의(8.21) → 남한 회담 역제의 및 수용(8.22) → 2+2 회담 시작 (8.22) → 합의(8.25)의 순서로 진행됐습니다.

이 흐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8월 20일 두 차례의 포격 이후 남한의 대응사격이 있기도 전에 이미 김양건 대남비서의 대화 제기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북한은 20일 두 차례의 포격으로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을 위한 남북회담을 노린 것입니다. 즉 저강도 군사도발을 통해 남한이 협상테이블에 나올 수밖에 없도록 압박한 것입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먼저 대응에 나선 것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었습니다. 예컨대 목함지뢰 사건에 대한 청와대의 성명은 11일에야 나왔지만 유엔사령부와 미 국무부의 성명은 하루 앞선 10일에 나왔습니다. 김종대 안보전문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취재해본 결과, 2010년 11월 23일에 남북 간 포사격 교전이 벌어졌는데, 우리 합참에서 유엔군 사령관이죠, 월터 샤프 대장한테 총 11번 전화했습니다. 그 때마다 되돌아온 답변은 '한국 정부가 알아서 해라. 한국 정부의 자위권 차원에서 할 일이지 우리한테 쏠까요 말까요, 물어보지 마라' 이거였습니다.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이번 지뢰 사건은 전쟁이 날 만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유엔사령부가 조사도 하죠, 대북 접촉 제안도 하죠. 또 미 국무부가 이를 뒷받침하는 성명을 발표하죠. 모든 우리 측 조치보다 유엔사 조치가 더 빠릅니다. 그러니까 위기관리를 떠맡은 거예요."
(☞관련 기사: 김종대 "전쟁 위기, 60~70일 정도 지속될 것")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원장은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미국은 현 긴장상태를 방치해서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0주년 때 북한이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하고, 유엔이 제재에 착수하고, 북한이 또 핵실험을 하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북한의 위협이 관리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서 임계점에 도달한다면 오바마 정부 임기 말에 북한과 골치 아픈 협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 반갑지 않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한반도 극적 반전, 국내정치용? )


북한이 저강도 군사도발을 통해 한국의 협상 참여를 성사시킨 점, 북한 도발의 위험성을 먼저 파악하고 대응에 나선 것은 미국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한국은 한 발 늦었고, 뒷북을 친 셈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원칙론에서 현실론으로 한 발 물러선 데는 한반도 위기 상황의 악화를 원치 않는 미국의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이번 협상 과정에서 한국의 주도권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북한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 남북협상은 가능하다

남북 대화와 관련해 한국 정부가 유의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박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을 비롯해 한국의 수많은 남북 대화 제의가 거부된 반면 어찌하여 이번에는 성사됐는가, 하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 남북 대화, 나아가 남북 관계의 실질적인 진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한국의 남북 대화 제의는 대체로 남 측이 원하는 것 위주였습니다. 이산가족 상봉, 비무장지대(DMZ) 내 평화공원 조성, 8.15경축행사 등이 그러합니다. 상대방 쪽에서 '내가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겠다'는 전망이 서야 만남이 성사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 정부는 자신의 요구사항만을 제시하든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제시할 경우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전제조건들을 내걸었습니다. 북한이 응할 리가 없습니다.

이번 경우 북한은 의도적으로 긴장 상태를 조성해 한국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들였습니다. 한반도의 긴장 상태는 한국은 물론 미국, 중국 등 관련 국가들이 원치 않는 것이고, 이를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한국은 대화에 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당장 일본이 이를 악용했습니다. 아베 총리는 24일 "(남북이) 대화를 하는 동시에 한국전쟁 이래 처음 수십 척의 (북한) 잠수함이 항구에서 이탈했다. (…)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보 환경이 좀처럼 예측하기 힘들다"면서 집단자위권 행사를 위한 안보법제의 필요성을 강변한 것입니다. 또한 이번과 같은 군사도발이 반복되다 보면 통제할 수 없는 위기로 확대될 위험성도 있습니다.

한국은 남북관계를 주도할 압도적 경제력과 외교력을 갖고 있습니다. 경제력은 북한의 40배나 되고 (북한의 적대국인) 미국, 일본과도 긴밀한 우방입니다. 그런데도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번번이 빼앗기고 있습니다. 북한이 원하는 것을 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체제의 생존입니다. 이번에 드러난 것처럼 대북 확성기 방송 등 자신의 체제에 대한 비판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대북 전단 살포도 같은 이유에서 싫어합니다. 쌀, 비료와 같은 경제 지원도 내심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북미관계 정상화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런 문제들에 한국 정부가 적극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선다면 북한은 남북대화에 나설 것입니다. 7.4공동성명에서 남북기본합의, 6.15와 10.4 공동선언에 모두 명기된 '상대방 체제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박근혜 정부가 이런 기조를 확고하게 갖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북한 붕괴에 대한 은근한 기대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 홍용표 통일부 장관과 북 측 김양건 당 비서(오른쪽)가 25일 오전 판문점에서 '무박4일' 마라톤 협상을 마치고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

한국만의 외교 비전과 전략이 없다

북한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미국, 일본,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우리 외교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9.3 전승절 열병식 참석 문제에서도 중국 정부가 먼저 발표한 후에야 청와대 발표가 나왔습니다. 왜 당당하게 '2차 대전에서 대일 승전은 한반도 식민지 지배를 종식시킨 중대한 계기다. 따라서 참석할 것'이라고 말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8.15 경축사에서도 우리 자신의 외교 비전과 전략을 내세우기보다는 상대방의 행동에 반응을 보이는 수동적인(reactive) 자세로 일관했습니다. 우리의 외교 비전을 밝힌 것이 아니라 아베의 8.14담화에 대한 (미흡하지만 받아들이자는) 반응이 전부였습니다.

우리만의 독자적인 외교 비전과 전략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미중 간 세력 교체기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확고한 외교 비전과 전략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동북아의 세력 교체기에 한반도는 항상 강대국 정치의 희생양이 됐다는 점입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중국의 패권에 도전하던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을 초래했고, 이는 조선의 식민지화라는 비극적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세계의 패권국가로 등장하고 중국에 공산 정권이 들어선(1949년) 직후에 일어난 남과 북의 6.25전쟁은 미중 군사대결로 확대돼 이후 동아시아 냉전을 고착화시켰습니다. 반면 일본은 6.25의 전쟁특수로 단숨에 전쟁 피해를 복구하는(일본은 6.25를 '하늘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죠) 어부지리를 누렸습니다. 강대국 간 세력 교체기에 한반도가 불안정해지면(지배 계층과 피지배계층의 대립이든, 또는 남과 북의 대결이든) 한반도는 강대국 간 군사대결의 현장이 된 것입니다.

2015년 현재 남과 북의 대립 상태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요? 현 상황에서 우리의 외교 전략은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가 돼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의 초석이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남과 북이 화해하고 교류, 협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한반도의 살 길이고 나아갈 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한반도 평화의 주도권은 바로 한국에 있다는 점입니다. 경제력과 외교력에서 압도적 우위에 있는 한국이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쥐고 남북관계를 진전시켜야 한반도 화해와 평화를 실현시킬 수 있습니다. 8.24합의로 한반도의 위기 상황은 일단 모면했습니다. 이번 합의의 모멘텀을 살려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것은 이제 박근혜 정부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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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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