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도시의 산책자

[작은것이 아름답다] 4대강 모래로 만든 도시, 부비트랩?

티베트의 고원에는 버려진 집들이 많았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량한 고원을 가다 보면 만나는 무너진 집들. 나는 그 옆에서 오래 앉아 있었다. 집은 진흙을 다져서 만든 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벽돌과 벽돌도 진흙을 사용해 쌓았다. 저 집은 얼마나 오래 거기에 있었을까? 고원의 강한 바람이 모래를 날렸고, 모래는 집을 때렸다. 사람은 집을 떠났고, 낡은 집을 고원의 모래바람이 해체하는 참이었다. 벽에는 모래가 때린 상처로 수많은 흠집들이 미세하게 나 있었다. 지붕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고, 벽은 무너져서 반도 남아 있지 않은 모습이 흡사 흰개미 집 같았다. 오랜 시간 동안, 미세한 것들이 큰 것을 해체하는 모습과, 미세한 재료로 큰 것을 구축하는 모습이 너무나 닮았다. 결국 건축은 저 자연스러움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폐허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폐허의 건축. 그때 티베트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돌아온 서울에서는 이제 막 주택 200만 호를 짓기 위한 건설공사가 한창이었다. 신도시가 만들어지고, 흉흉한 소문도 돌아다녔다. 유례없는 건축공사를 위해 강모래로 부족해 바닷모래를 써 부실 공사를 했다느니, 북의 침공에 대비한 부비트랩(Booby Trap) 도시라느니, 하는 얘기들이었다. 방금 떠나온 고원에서는 모래가 집을 해체하는 중이었고, 이제 돌아온 도시에서는 모래가 집을 구축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도시 가운데 하나를 택해 살 집을 구했다. 그 당시 신도시는 황량했고, 어쩐지 내가 떠나온 사막 같았다. 그 살풍경은 해가 질 때는 더했다. 사막보다 더 쓸쓸했다.

ⓒ함성호

건축공사용 모래는 강모래를 사용한다. 바닷모래에는 염분이 있어 철근을 부식시키기 때문에 건물의 강도에 치명적이다. 철근콘크리트, 벽돌, 모르타르, 미장, 타일을 붙이는 작업…. 모래는 그야말로 쓰이지 않는 데가 없다. 모래 자체에는 접착력이 없어 쉬 흩어지고 무너지지만, 모래가 시멘트 같은 재료와 섞일 때는 가장 단단한 재료로 변신한다. 우리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는 말로 모래의 허약함을 얘기하지만, 그 모래가 없이는 아무것도 세울 수가 없다. 아무 형상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모래가 없이는 어떤 형상도 만들어질 수 없다. 벽에 바르는 시멘트 모르타르도 모래가 없으면 금방 벽에서 흘러내릴 것이다. 벽돌을 쌓을 수도 없다. 아무것도 붙잡고 있지 않은 모래가 접착력이 강한 것들과 섞이면 가장 강하게 붙잡고 놓지 않는다.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한 것이 된다. 도시는 이 역설 위에 서 있다.

그 역설로 도시는 화려하게 빛난다. 빛을 받으며 반짝이는 유리건물도 거리에서 사람들을 유혹하는 진열장도, 투명한 모래의 결정이다. 끝없이 소비를 부추기는 욕망의 진열장이 한 줌 움켜쥘 수도 없는 허무함의 상징인 모래로 만들어진다. 유리는 나를 보아 달라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동시에 욕망의 눈이 바라보는 모든 것이 허상임을 증명한다. 우리는 모래의 진열장을 거닐며, 모래의 탑 사이를 지나는 산책자이다. 현대인들은 모두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 없는 베두인처럼 고독하다. 19세기의 파리에서는 한때 거북이를 데리고 산책하는 것이 유행인 때가 있었다. 그때의 사람들은 거북이의 느린 걸음에 자신의 산책 속도를 기꺼이 맞추었다. 그 느림이 근대의 풍경을 거니는 부르주아의 여유와 풍요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여유와 느림은 거의 죄악이다. 모래로 이루어진 도시에서는 속도가 모든 것을 상징한다. 바쁘지 않은 자는 게으르거나 가난한 자고, 사회로부터 도태되었음을 말해준다. 바삐 걷지 않거나 달리는 버스를 향해 뛰지 않는 자, 혹은 자동차 안에서 기계의 속도로 거리를 달리지 않는 자는 오직 거지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모래를 세울 자본주의의 세례가 내리지 않은 것이다.

결국 현대사회에서 모래는 자본주의라는 시멘트와 섞인다. 우리 4대강을 모두 파내겠다고 공언한 대통령은 하천의 모래를 파 그걸 팔아서 공사비를 충당한다고 한다. 그 모래가 쓰일 곳은 공사현장밖에 없다. 강을 파내서 생기는 어마어마한 모래를 소비할 또 다른 거대한 공사판이 있어야 가능한 얘기다. 전국토가 공사판으로 변할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도시에 가장 많은 콘크리트 건물에는 시멘트와 모래와 자갈이 1:2:4의 비율로 섞여 있다. 유리 제조에 쓰이는 규사원료는 천연규사와 인조규사로 나누는데 천연규사가 바로 강이나 해변의 모래다. 사막의 모래는 바람에 날려 새로운 모래언덕을 만들지만 도시의 모래는 구축되고, 얇은 판으로 만들어져 임대가치를 만들고, 권력을 과시하고, 신의 거처가 되기도 한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성경의 말처럼 도시는 모래로 만들어졌다. 사람이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듯이, 도시는 모래로 만들어졌으니 모래로 돌아갈 일이다.

이 거대한 도시가 모래로 돌아갈 날을 생각해 본다. 뉴욕이, 파리가, 쿠알라룸푸르가, 서울이, 저 모헨조다로의 유적처럼 모래로 돌아가 깊은 지층 밑에서 잠들어 있을 날이 정말 있을까? 지금 우리의 도시는 그런 상상을 망상으로 만든다. 이렇게 빛나고, 이렇게 굳건하지 않느냐고 도시는 반문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티베트에서는 색색의 모래로 만다라를 그리는 전통이 있다. 몇 날 며칠에 걸쳐 모래로 꼼꼼히 그린 만다라를 다 완성하고 나면 승려들은 가차 없이 그 자리에서 공들여 만든 만다라를 흩뜨려 버린다. 그렇게 공들여 제작한 모든 행위도 단지 무상할 뿐이라는 의미다.

우리가 도시에서 사는 이유는 도시가 우리에게 활력을 주기 때문이다. 온갖 상품들, 볼거리, 음식과 사건과 사고까지, 도시는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한다. 숲과 바다가 우리를 자극하는 시간은 길고도 지루하지만 도시는 시시각각으로 새로운 자극을 선사한다. 이 활력을 의식해서 거부할 사람은 많지 않다. 왜 이것을 거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당연하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에게 다른 견해를 준다. 보라. 모든 것이 생성하고 소멸해 갔다. 그 순환 속에 도시의 삶도 존재한다. 단지 우리는 그 순환 속의 어느 시간대를 살 뿐이다. 그래서 허무할 뿐이라는 게 아니라, 그 시간대를 알고, 우리가 아닌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 눈치채야 한다. 작은 풀, 나무들, 기어 다니는 벌레들, 강과 숲, 이 모든 것들이 같은 시간대에서 우리와 함께하는 존재들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살아 있음의 기쁨을 찾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강건한 도시의 건물과 그 건물을 이루는 모래를 찾는 것, 이런 것이 동시에 작용할 때 우리는 우리 삶의 진정한 활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도시는 아름답다. 이 거대한 도시가 아름다운 것은 거기에 생명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무엇을 지나가고 있든, 거북이처럼 느리게 모든 사물을 지켜보고 있든, 도시는 자연과 같이 거대한 유기체의 일부이다. 하나의 모래알이 시멘트와 섞여 더 굳건한 구조를 만들듯이 미워하든 사랑하고 있든 우리는 그렇게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강해진다. 모래가 어느 날 이 도시를 해체하고 있더라도 그랬기 때문에 삶은 더 빛난다. 나는 철과 유리와 콘크리트로 빛나는 이 도시의 거리를 걸으며 수많은 모래와 모래만큼이나 많은 각각의 욕망들과 만난다. 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은 기쁜가? 슬픈가?

사막에서 모래바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약 한 시간가량을 허허벌판에서 모래바람을 맞아야 했다. 그 뒤로 한 달 내내 내 몸 어딘가에서 끝없이 모래 알갱이들이 나왔다. 씻어도 씻어도 소용없었다.

월간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1996년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 생태 환경 문화 월간지입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위한 이야기와 정보를 전합니다. 생태 감성을 깨우는 녹색 생활 문화 운동과 지구의 원시림을 지키는 재생 종이 운동을 일굽니다. 달마다 '작아의 날'을 정해 즐거운 변화를 만드는 환경 운동을 펼칩니다. 자연의 흐름을 담은 우리말 달이름과 우리말을 살려 쓰려 노력합니다. (☞바로 가기 : <작은 것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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