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면 간호사 "아버지는 8.15만 되면 화 내셨죠"

[구보타 쇼크 10년, 한일 석면 문제 대해부 ⑥]

어머니는 강보에 싼 요오코를 데리고 공장에 나갔다. 아기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애를 태우는 걸 안 공장 사장은 아기를 데리고 공장에 나오라고 해 주었다. 계속 일을 하도록 배려해준 사장이 고마웠다고 어머니 하루코 씨는 회고했다. 아기 요오코는 커서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 그렇게 6년 동안 엄마의 출퇴근을 함께 했다.

요오코는 커서 아픈 사람을 돌보는 간호사가 되었다. 간호사 생활을 한창 하고 있을 요오코는 1987년에 흉막비후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일본을 뒤흔든 석면 충격 구보타 쇼크가 터진 2005년에 석면폐 진단을 받았다. 그녀의 나이 49세였다. 그해 말 호흡 곤란이 심해져 산소 교환율이 53%나 떨어져 장애 3급 진단을 받았다. 결국 병원에 휴직계를 냈다. 다음해 그녀의 호흡 곤란 증세는 더 나빠져 장애 1급이 되었다. 산소 호흡기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석면폐는 진폐증의 일종으로 석면 섬유가 폐에 들어가 염증을 일으키고 시간이 지나면서 딱딱하게 굳는 섬유화가 되면서 호흡 곤란을 일으키는 전형적인 석면 질환이다. 석면 원료를 다루는 공장 노동자들에게 걸리는 직업병으로 알려져 있다.

▲ 2010년 10월 재일 한국인 2세로서 환경성 석면폐 환자인 오카다 요오코가 서울에서 열린 국제 석면심포지엄에서 발언하고 있다. ⓒ최예용

요오코는 어떻게 석면폐에 걸리게 된 것일까? 요오코 가족이 사는 곳은 일본 오사카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한 시간가량 떨어진 바닷가의 작은 도시 센난이다. 석면 마을이라 불리는 곳으로 중소 규모의 석면 방직 공장이 밀집한 곳이다. 어머니 하루코가 아기 요오코를 데리고 다닌 공장은 석면 방직 공장이었다.

요오코는 석면 공장 한 곳에 놓인 채 숨 쉴 때마다 석면 먼지를 들이 마셨다. 30여 년의 잠복기를 거쳐 31세에 석면 노출의 증거이자 석면 질환의 초기 증세라고 할 수 있는 흉막비후부터 시작하여 20여 년에 걸쳐 석면폐 1급에 장애 1급으로 악화되었다. 환자를 돌보던 간호사 요오코는 자신이 환자가 되어 가족들의 돌봄을 받는 신세가 됐다.

요오코의 아버지 오네야마 가즈오 씨는 군산 출신의 한국인이다. 한글 이름은 강재희. 18세의 강재희는 해방되기 2년 전인 1943년에 일본으로 건너와 규수 쪽에 있는 광산에서 일을 했다. 이후 오사카 현과 인접한 와카야마 현의 수해 복구 현장에서 일을 하다 일본 여인 오카다 하루미를 만났다.

하루미의 부모는 가진 것 없는 조선인 청년과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미는 부모의 반대를 물리치고 강재희와 결혼했고, 1954년 센난으로 이주해서 살았다. 강재희는 일본인과 결혼하면서 일본 국적을 취득했지만 한국 친척들에게는 전쟁 때 죽었다고 알려졌다.

아버지 강재희에 대한 요오코의 기억이다.

"아버지는 배로 일본에 왔다고 했어요. 나중에 TV에서 8.15 광복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화를 내시곤 했어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징용으로 일본에 온 게 아닌가 싶어요."

당시 센난과 인접 도시 한난에는 전후 일본에 남은 재일 한국인들이 모여들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더러운 직업'이라고 꺼리는 석면 공장에서 일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부부 모두 석면 공장에 다녔다. 강재희는 1955년부터 1965년까지 10년 동안 석면 일을 했는데 처음에는 하마노공업이라는 공장을, 나중에는 교와석면이라는 공장에 다녔다. 하루미는 1978년까지 23년 동안 일했는데 그녀가 다닌 공장은 쇼와석면, 미나미석면, 그리고 청석면을 다룬 긴기아스베스트였다.

센난에서 시의원을 지내다 '센난 석면 시민의 모임'을 만든 하야시 씨의 조사에 의하면, 센난과 한난의 석면 산업은 1909년 영실석면공장부터 시작되어 큰 규모의 석면 공장만 70개가 가동되었고 작은 규모의 가내 공업까지 세면 200개를 넘는다. 하야시 씨의 말이다.

"1928년경에 약 4000여 명의 한국인이 센난, 한난에 거주했고 1945년 전후로는 오사카 전역에 45만 명의 한국인이 살았어요. 만주사변 이후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인이 10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대부분 오사카에 정착했어요. 1937년에 중일 전쟁이 시작되어 내선일체라는 조치로 재일 한국인에 대한 강제 노역이 실시되어 오사카 지역에 사는 40만 명의 재일 한국인이 석면 방직 공장이나 군함을 만드는 중공업 시설에 투입되거나 간사이 공장을 만드는 노역에 동원되었어요."

요오코의 기억이다.

"어릴 적 석면 공장으로 엄마를 따라다녔을 때, 어떤 엄마들은 아기를 업고 일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황당한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다들 그렇게 살았던 거죠. 제가 조금 커서 걸어 다니고 말을 알아듣고 그러면서 엄마가 '이 물건을 저리 가져가라'라고 저에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요오코 네는 사택에 살았는데 공장 바로 옆에 있었다.

"엄마랑 공장에 있다가 강아지 밥을 주러 집에 다녀오고 그랬어요. 공장 주변은 눈이 내린 후의 풍경처럼 온통 하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다 석면 먼지로 뒤덮인 거였어요."

요오코에게 3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고 하여 건강 이상이 없느냐고 물었다.

"남동생이 자랄 때는 한난에서 살았어요. 아기 돌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몸이 안 좋아서 얘를 데리고 바닷가 다른 집에서 살아서 다행히 석면에 노출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건강 검진에서 아직까지 큰 이상은 없어요."

석면 일을 오래한 요오코의 부모는 건강에 문제가 없을까? 강재희 씨는 석면 일을 처음 시작한 지 40년 만인 1995년에 석면폐 진단을 받았고 곧이어 폐암으로 악화되었다. 산업 재해 신청을 했는데 승인이 나오기 전인 그 해에 70세로 사망했다. 오카다 하루미도 1987년에 석면폐를 진단받았다. 석면 일을 시작한 지 32년만이었다. 2005년에 산업 재해자로 인정받았고 2012년에 사망했다.

▲ 석면폐 환자 오카다 하루미 씨가 석면 질환으로 사망한 남편 강재희 씨의 영정 사진을 들고 있다(2007년 11월). ⓒ최예용
2008년 2월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방문단이 센난 시청에서 피해자들과 만났을 때 하루미 씨가 말했었다.

"당시에 우리는 석면으로는 결핵에 안 걸린다고 해서 일했어요. 석면은 결핵이나 폐병과 상관없다는 말을 듣고 안심해서 딸을 데리고 일하러 공장에 다녔어요."

옆자리에 앉은 산소 호흡기를 낀 딸 요오코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울먹이며 말했다.

올해 4월 센난에서 만난 요오코에게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안타깝다고 인사를 전했다.

"어머니는 TV에서 석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우시면서 저한테 미안하다고 그랬어요. 당신 때문에 자식이 몹쓸 병에 걸렸다고요."

2005년 구보타 쇼크를 계기로 센난 지역의 석면 피해가 밝혀졌고 센난 석면 시민의 모임이 주도하여 국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이 시작되었다. 센난 지역의 석면 산업은 군수 산업이었고 석면이 위험하다는 걸 알았지만 노동자의 건강 피해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국가에 법적 책임을 물었다.

소송 제기 9년 만인 2014년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는 국가에 책임을 묻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일부 원고는 패소했는데 요오코도 패소한 원고 명단에 들어 있었다. 석면폐 진단이 잘못되었다는 피고 즉 국가가 내세운 증인의 주장을 재판부가 받아들였고 환경성 석면 피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오코의 어머니 하루미는 승소했다. 하루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10년간의 석면 피해자 운동에 누구보다 앞장서온 요오코는 지난 6월 28일 구보타 쇼크 10년을 맞아 전국에서 모인 피해자들의 모임인 '일본 석면 피해자와 가족 모임' 총회 자리에서 신규 지부로 입회하는 센난 지부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부모 모두를 석면 질환으로 잃었고 자신도 석면 피해자인 그녀는 군수 산업인 석면 산업의 희생 지역인 센난의 석면 문제의 상징이다. 굴곡진 한국과 일본의 관계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 산소통을 끌고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갈 수 있는 곳을 모두 찾아다니며 석면의 위험성을 온몸으로 호소한다. 요오코와 변호인단은 구보타 쇼크로 만들어진 환경성 석면 피해 구제를 신청하여 석면 질환임을 인정받고 이후 국가 책임을 다시 묻는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최예용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은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으로도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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