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을 통해 얻은 깨달음

[김형찬의 동네 한의학] 때론 병이 약이 된다

"아! 오셨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몇 달 전 암 선고를 받아 수술을 앞두고 내원했던 환자께서 아침 일찍 찾아오셨습니다. 머리는 짧아졌고 몸에는 치료를 받은 흔적이 남아있지만 뭐랄까, 그분을 감싸고 있던 침울하고 어두운 기운은 거의 다 걷혀 있었지요.

"수술하고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까지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담당 의사께서는 다 잘되었다고, 앞으로 잘 관리하면서 지켜보자고 하셨고요."

치료 경과와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몸의 상태를 살폈습니다. 좀 지치긴 했지만, 지난번 왔을 때보다 모든 흐름이 편안해졌습니다. 암 수술 이후 주변에서 암 환자에게 좋다는 것을 많이 보내주고, 소개도 많이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먹고 움직이고 자는 기본적인 것을 잘 지켜 나가고, 무엇보다 피로를 피하고 가볍게 사시라 했습니다. 지금부터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암을 극복하는 건 물론, 앞으로 좋은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요. 그랬더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혹시나 암이 재발해서 죽는다 해도 상관없어요. 이번 일을 겪으면서 뭔가 꽉 붙잡고 있던 끈을 하나 놓은 것 같아요. 이제는 좀 다르게 살아야죠."

진료를 하다 보면 암과 같은 중병이나 난치성 질환으로 고통을 겪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치료가 잘 되어서 편안하게 이야기하는 분도 있지만 많은 환자께서 힘겹게 병에 맞서 버티고 있습니다. 때론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몸과 마음은 물론, 삶 전체가 무너진 분도 있습니다. 진단 이후 이어지는 치료 과정에서 겪는 피로와 긴장, 그리고 불안감이 만만치 않고, 이로 인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때론 지루해하기까지 했던)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드물게 투병의 고통 속에서 여태까지의 삶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의 문을 여는 분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병들게 했던 과거의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을 옭아매던 것들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지는(완벽한 자유를 얻는다면 부처님이나 예수님의 경지에 들겠지요) 것이지요. 그 약간의 자유가 열어 준 틈새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삶의 다른 측면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과거와는 다른 삶의 궤도에 진입합니다. 이런 분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병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전처럼 살면 몰랐을 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말씀을 듣기도 합니다.

얼마 전 여러 해 동안 암 환자를 돌봤던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암세포를 개체를 죽이려고 작정한 놈과 '너 이렇게 살면 안 돼!'라고 경고하는 놈으로 구분했습니다. 전자는 전이도 빠르고 영악해서 고치기가 어렵지만, 후자는 생활을 바꾸고 몸과 마음의 상태를 좋게 해주면 예후가 좋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암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중병이라고 부르는 병의 이면에는 '여태까지의 방식으로 살면 큰일 난다'라는 강한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이 더 견딜 수 없는 수준에 왔을 때, 그리고 더 지속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신호가 포착되었을 때 과도하게 쓰거나 약하게 타고난 부분을 통해 병이 드러납니다(그 뿌리는 훨씬 이전부터 만들어졌겠지요).

그런데 병의 치료 과정에서 반강제적으로 삶의 속도는 늦춰지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병이란 놈은 여태까지의 시간을 되돌아보고 심신을 돌보게 하려는 생명의 기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중한 병을 이렇게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병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제법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상담을 마치고 돌아가시는 그분의 발걸음이 참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 환자의 어깨선이 조금 변한 것도 같습니다. 병의 예후가 어떨지, 앞으로 인생에 어떤 일들이 생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처음 만났던 날과 같은 모습은 아닐 듯합니다. 병을 잘 다스리고 그 과정을 통해 삶까지 치유해나가는 환자의 모습을 보는 건 치유하는 사람에게 허락된 즐거움이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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