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퀴즈를 하나 내겠다. 이 내용 가운데 ○○○, △△△, □□□, ◇◇◇에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나 기관, 질병의 이름은? 문형표, 메르스, 박근혜, 질병관리본부가 정답이 아닐까? 정답이 맞다면 다음과 같이 될 터이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과 같은 신종 전염병을 포함한 각종 전염병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질병관리본부를 올해 안으로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처럼 확대 개편해줄 것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문형표 장관은 이날 열린 국무회의에서 지금의 질병관리본부 체제로는 각종 해외 유입 전염병과 국내에서 다시 만연하고 있는 전염병의 확산을 막아내기 힘들다면서 인원 500여 명, 연간 예산 1000억 원 규모의 질병관리청 설립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매우 그럴 듯해 보인다. 하지만 이는 정답이 아니다. 첫 단락에 나온 것은 2003년 5월 7일자 어느 일간지에 보도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필자가 당시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로 있으면서 보도한 기사이다.
사스 때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 질병관리청 개편 필요 보고
빈 칸 안에 들어갈 내용을 넣어 실제 원본을 되살리면 다음과 같다.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은 6일 사스(SARS·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와 같은 신종 전염병을 포함한 각종 전염병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국립보건원을 올해 안으로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처럼 확대 개편해줄 것을 노무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김 장관은 이날 열린 국무회의에서 지금의 국립보건원 체제로는 각종 해외 유입 전염병과 국내에서 다시 만연하고 있는 전염병의 확산을 막아내기 힘들다면서 인원 500여 명, 연간 예산 1000억 원 규모의 질병관리청 설립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12년 전의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는 것은 메르스 방역 실패를 계기로 국가 위신이 추락하면서 박근혜 정부가 질병관리본부 개편 문제를 본격 검토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거론되고 있어서다. 대한의사협회나 대한병원협회 등 의사를 중심으로 이참에 보건부로 독립을 하자고 외치는 쪽도 있다. 보건부 독립까지는 아니지만 예산과 인사를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차관급의 질병관리청(처)으로 질병관리본부를 승격하고 인원과 예산, 조직을 획기적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동참하는 이들이 최근 크게 늘고 있는 추세다.
이런 목소리가 그동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12년 전 사스 지구 대유행의 위력, 특히 중국을 큰 혼란과 위기로까지 몰고 간 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계기로 방역 체계를 근본적으로 수술하자는 지적이 강하게 일었다.
필자도 <한겨레> 2003년 4월 22일자 '뛰는 전염병, 기는 방역 체계'란 제목의 심층 특집 기사로 사스 등 세계 곳곳에 새로운 전염병들이 활개를 치고 있으나 우리나라 방역 체계는 10~20년 전 수준에 머물고 있어 정비가 시급하며 지금의 방역 인력과 예산으로는 사스와 같은 신종 전염병이 국내에 들어와 중국, 홍콩에서처럼 확산될 경우 속수무책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당시 지적은 2015년에도 유효했고 메르스 신종 감염병 유행으로 그것이 입증된 셈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4월 28일 고건 국무총리 주재로 사스 대책 관계 장관 회의를 열어 사스 관리 종합 대책을 내놓으면서 필자가 요구한 바와 같은 획기적 방역 체계 개편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스의 전 세계적 유행을 계기로 우리도 각종 신종 전염병과 말라리아와 같은 재만연 전염병의 유입과 확산을 막을 수 있는 새로운 방역 조직이 필요한 데도 정부의 의지나 전략을 읽을 수 있는 대책은 미흡했다는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노무현 대통령, 질병관리청 신설 연구 검토 지시했으나 무산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그 다음날 열린 국무회의에서 앞으로 사스 같은 문제가 계속 생길 수 있으므로 질병과 돌림병 관리 대책을 연구해야 하고 비상사태에 대비한 합리적인 인력 동원 체제를 점검하라고 지시하며 고건 총리에게 질병관리청 신설에 대한 연구 검토를 지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스 국내 유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노무현 정부에서도 국립보건원을 질병관리본부와 국립보건연구원 체제로 방역 실무와 연구 기능을 분리하는 선에서 어정쩡하게 조직 체계를 개편하는데 그쳤다. 질병관리청 신설을 통한 인사, 예산권 독립과 획기적인 인력 확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이와 관련한 정확한 논의 과정과 그 사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고건 총리가 간호사 출신의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과 뜻을 약간 달리하는 복지부 내 행정 관료와 예산 책임 부처, 공무원 조직 담당 부처 등의 의견을 토대로 그렇게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2003년 사스 유행 때의 노무현 대통령이나 고건 총리가 보였던 적극적인 대응 자세는 박근혜 대통령과 황교안 총리 등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보기 어렵지만 메르스 사태가 진정세로 돌아선 지금 곧 어떤 식으로든지 방역 체계 개편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매우 커 보인다.
질병관리본부와 보건복지부 행정 관료 간 불신과 알력 심각
하지만 보건부 독립은커녕(필자는 보건부 독립은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며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질병관리청 독립도 쉽지 않아 보인다. 만약 청이 된다면 책임자가 1급에서 차관급으로 한 단계 뛰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실질적인 인사와 예산 독립, 그리고 인력 확대와 방역의 질적 향상이 함께 이루어져야만 한다.
여러 경로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의사 출신 등 질병관리본부의 방역 실무진을 포함한 간부진과 보건복지부의 행정 관료 간 인사와 예산 등과 관련한 불신과 알력은 상당하다고 한다. 이번 메르스 사태가 한창 진행 중일 때에도 그동안 쌓여 있던 이런 불만이 자주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사불란한 메르스 대응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그래서 지금 질병관리본부 구성원들 사이에는 그 어느 때보다 방역 조직 독립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보건복지부로부터의 독립"을 외치는 질병관리본부의 바람은 과연 이번에는 이루어질 수 있을까. 8월 중에 하게 될 것으로 보이는 메르스 종식 선언을 계기로 그동안 메르스 확산과 잇단 환자 사망 때도 굳게 닫아두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에 의료계와 질병관리본부 직원뿐만 아니라 국민의 눈이 쏠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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