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 여당에 '공무원-국민연금' 분리 처리 '하명'

새누리 투톱, "원점 재검토"로 고개 숙이나

박근혜 대통령이 5월 임시국회 개회를 하루 앞두고 여당 지도부에 사실상 '하명'을 했다. 공무원연금 개편과 국민연금 강화를 연계 처리한다는 지난 2일의 여야 합의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공무원연금은 5월 국회에서 먼저 처리하되 명목소득대체율을 50%로 인상하는 등의 국민연금 강화 방안은 나중에 처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재차 낸 것이다.

청와대는 이 과정에서 "1702조 세금폭탄", "1인당 255만 원 보험료 추가 납부" 등 선정적인 숫자 공세를 총동원했다. 야당은 물론, 여당의 '비박' 지도부와도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강한 의지다. 그러나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한 내용을 '엎으라'고 지시하는 것은 삼권분립 원칙에 위배된다는 지적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세금폭탄 1702조', '1인당 255만원' 등 청와대가 발표한 숫자에 대해서도 사실관계 공방이 불가피해 보인다.

일요일 오전, 靑 홍보수석의 이례적인 '강경 브리핑'

김성우 청와대 홍보수석은 일요일인 10일 오전, 예정에 없던 브리핑을 가졌다. 내용은 강경 일변도였다. 김 수석은 "5월 임시국회는 국민 눈높이에 맞춘 공무원연금 처리가 우선"이라며 "공무원연금 개혁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머리를 뗐다. 김 수석은 "정치권에서 제기한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과 보험률 인상 문제로 인해서 공무원연금 개혁이 무산된다면, 이는 공무원연금 개혁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난 것으로 국민들에게 큰 혼란만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는 연금개편 국민대타협기구의 후속 실무기구에서 지난 2일 합의하고, 여야 대표가 같은날 합의에서 '존중한다'고 했던 국민연금 명목소득대체율 인상 문제를 '정치권에서 제기한 문제' 정도로 격하한 것이다. 김 수석은 이날 브리핑이나 지난 7일 브리핑에서도 '정치권'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했다. 마치 청와대는 '정치권'에서 벗어나 있는 초월적 존재라는 듯한 말이지만, 청와대 인사들 역시 '정치권' 인사다.

김 수석은 이어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 보험률 인상 문제는 정치적인 당리당략에 의해서 결정 될 사항은 아니"라며 "이것을 공무원연금과 연계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야 합의를 거듭 비판했다. 그는 나아가 "국민적인 동의를 구하지 않고 정치권 일부에서 일방적으로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리려 한다면, 공무원연금 개혁을 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는 지적마저 있다"고 야당을 압박했다. '야당이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에 집중하는 것은 사실 공무원연금 개혁을 하기 싫어서다'라는 프레임 공세에 다름아니다.

이어 김 수석은 "소득대체율을 50%로 인상할 경우 세금폭탄은 무려 1702조 원이나 된다"고 논쟁적인 공세를 폈다. "소득대체율을 50%로 높인다면 향후 65년간 미래 세대가 추가로 져야 할 세금 부담만 무려 1702조 원, 연간평균 26조 원"이라는 것이 청와대의 설명이다. 김 수석은 또 "국민들께 세금 부담을 지우지 않고 보험료율을 상향 조정해 소득대체율 50%를 달성하려면 내년 2016년 한해에만 34조5000억 원, 국민연금 가입자 1인당 255만 원의 보험료를 더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정부·여당 측에서 앞서 내놓은 설명과도 배치되는 것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주무부서장인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나 여당 내의 연금 전문가 이혜훈 전 최고위원 등은 모두 소득대체율을 50%로 인상함으로써 상승할 보험료율을 3~4%포인트 정도라고 말한 바 있다. 월금 200만 원을 받는 근로소득자의 경우, 현행 9%를 적용하면 18만 원(개인 9만 원, 회사 9만 원)을 매달 적립하는 셈이다. 여기서 3~4%포인트가 오르면 개인은 매달 3~4만 원 정도를 더 내게 된다.

또 소득대체율 상승에 따라 당장 내년부터 보험료율을 올려야 하는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올려도 되는지는 연금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사안이다. 이를 단칼에 무 자르듯 '내년부터 1인당 255만 원씩 34.5조 원을 더 내야 한다'고 브리핑한 것이다.

김 수석은 "일부 정치권의 주장처럼 지금 보험료를 1%(포인트)만 올리더라도 미래 세대는 재앙에 가까운 부담을 지게 된다"며 "기금을 다 소진하게 되는 2060년부터는 보험료율을 25.3%까지 올려야 하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아들, 딸들은 세금을 제외하고도 국민연금 보험료로만 소득의 4분의 1을 내야만 한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연금 기금 고갈은 소득대체율 인상과는 무관하다. 현행 40%를 유지해도 어차피 2060년이면 기금이 고갈된다는 것은 김 수석 자신이 이날 브리핑에서도 밝힌 내용이다. 그럼에도 마치 연기금 고갈이 소득대체율 인상 때문인 것처럼 유권자의 오해를 조장하는 것은 정책 홍보 기능의 본령에서 일탈한 것이라는 지적이 예상된다.

김무성·유승민, 청와대 '하명' 받아들일까?

휴일 오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이례적인 브리핑은 곧 박 대통령의 뜻으로 해석된다. 이제 시선은 여당 지도부가 대통령의 하명을 곧이곧대로 따라, 본인들이 직접 협상한 결과를 부정하는 굴욕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쏠린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야당과의 협상 당사자였고, 김무성 대표는 유 원내대표가 지휘한 협상 내용에 대해 추인하는 내용의 '여야 대표 합의문'에 지난 2일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함께 서명했다. 여당의 '비박 투톱'으로 불리는 이들은 청와대에 할 말이 있으면 하겠다며 당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말을 해 왔다.

청와대가 공무원연금과 국민연금 문제를 분리하라는 것은 '5.2 여야 합의'를 파기하라는 말이 된다. 5.2 합의를 파기하고 백지 상태에서 전면 재협상을 하느냐, 5.2 합의를 인정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추가 협상을 하느냐 하는 것이 지난 주부터 청와대에 의해 여당 지도부에 강요된 선택이었다.

그러나 최근 이들 '투톱'으로부터 기류 변화가 감지되는 것이 '5.2 합의'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여당 지도부는 합의의 당사자였던 만큼, 5.2 합의의 '성과'를 유지하면서 이 연장선상에서 협상을 계속해 나간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었다. 김 대표도 6일 밤 "특위를 통과한 안은 살아있기 때문에 내일부터 계속 야당과 협상하겠다"고 했었다.

유 원내대표 역시 8일 오전 언론 인터뷰까지만 해도 "(당 내에)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연계에 대해 아예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합의 자체를 파기하라는 것"이라며 "그런 사람들은 대안이 뭔지 꺼내놓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비판했었다. 김 대표도 같은날 아침 기자들과 만나 "저는 5.2 합의가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토요일인 9일을 기점으로 조금씩 다른 말이 나오고 있다. 이날자 조간신문에 보도된 인터뷰에서 유 원내대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입장을 다시 정리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합의안을 그대로 통과시키겠다는 것도 (현 상황에선) 현실성이 없다"며 "기존 협상안은 지난 6일 본회의 처리를 전제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깨진 만큼 당의 원칙이나 협상 방향을 다시 의논해야 한다"고 했다.

9일 오후 민현주 새누리당 원내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새누리당은 '5월 2일 합의안'을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다시 추진하겠다"고 했다. 대변인을 통해 밝히는 당의 공식 입장에 변화가 감지된 것이다. 유 원내대표가 6일 발표한 대국민 사과 성명에는 "여야가 합의해 온 개혁안을 바탕으로 공무원연금 개혁이 꼭 이루어지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돼 있었다. '합의를 바탕으로'라는 표현이 '합의를 포함한 모든 가능성'으로 바뀐 것이다.

이제 눈길은 월요일인 11일 오전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로 쏠린다. 이 회의에서 향후 여당의 방향이 결정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김 대표도 "이번 주말까지 일절 말을 하지 않고 다음 주 월요일에 입장을 밝히려고 했다"고 했었고, 유 원내대표도 "월요일 최고위에서 최고위원들과 앞으로 원칙과 방향에 대해 정하자고 할 것"이라고 했었다. 새누리당의 '투톱'이 청와대에 맞서 자신들이 만들어낸 여야 합의와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 것인지가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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