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70년, 노조 탄압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48> 해방, 그리고 철도노조 파업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도둑처럼 왔다. 광복군과 함께 조선 진격작전을 준비하던 김구는 한숨을 쉬었다. 조선 청년들에게 천황폐하의 성전에 기꺼이 나서자고 주장했던 이광수를 비롯, 많은 친일파 인사들도 안타까워했다. 8월 15일 이후부터 미군이 인천에 들어온 9월 8일까지 24일간은 건국을 준비하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조선총독부가 이중권력을 행사했다. 건준 위원장 여운형은 총독부로부터 조선인들의 일본인에 대한 공격을 막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총독부는 "조선 민중에 경거망동하지 말고 절대 자중"할 것을 경고했다. 아직 군대와 경찰 등, 물리력을 갖고 있던 총독부는 해방 뒤에도 질서유지 명목으로 무력을 행사했다. <뉴욕타임스> 9월 12일 자 기사에 따르면 8월 15일 이후 일제 경찰에 의해 조선인 35명이 살해되었지만 단 한 명의 일본인도 한국인들에 의해 살해되지 않았다. 갑자기 닥친 해방으로 일제를 무장해제 시키고 새 권력을 세울 수 있는 조건이 미약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9월 8일 오후 2시, 미24군단 7사단 병력이 인천에 상륙했다. 이들은 서울로 가기 위해 항구에서 인천역까지 행진해야 했는데, 수만 명의 조선인들이 해방군을 맞이하겠다고 환영길에 나섰다. 이때 일본 경찰들이 질서를 잡겠다고 기관총을 난사하여 2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9명이 중상을 입었다. 수 십 명의 경상자도 발생했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재조선미육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질서 유지에 노력해 준 일본 경찰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하지의 입장에서는 일본이 점령했던 조선을 미군이 책임지는 것을 의미했다. 조선 민중에 의한 자주적 국가 건설은 애당초 관심 밖의 문제였다. 미국과 하지의 가장 큰 과제는 공산주의를 막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어떤 희생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의 희생은 당연히 조선의 미래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1945년 9월 9일 조선에 발표된 태평양방면 미육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명의의 포고령 제1호는 조선 사람들에게 꿈에서 깨어 현실을 보라는 다그침과 같았다.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조선 주민에 대하여 군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은 점령 조건을 발표한다.(…)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 권한은 나의 권한 하에서 실시한다. 모든 사람은 급속히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 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부대에 대한 모든 반항 행위 혹은 공공안녕을 문란케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미국 역사학자 부르스 커밍스에 따르면 한국의 분단에는 어떤 역사적 정당성도 없었다. 만약 동아시아의 한 나라를 분단했어야 한다면 침략자인 독일처럼 일본이어야 했다. 그러나 일제가 물러가자마자 점령군으로 진주한 미군이 38선 남쪽의 조선을 확보해 북쪽을 점령한 소련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식민통치로 조선을 괴롭혔던 일본은 쫓겨나면서까지 분단이라는 사슬을 던져 놓았다. 이 사슬은 체제 대결에 나선 두 거대 세력의 손아귀에 흘러들어가 조선의 발목을 채웠고 허리를 묶었다. 많은 사람들은 분단이 해방 이후 단순한 행정 조치상의 문제이고 곧 해결되리라고 믿었다. 며칠 후에 보자며 가족들에게 가벼운 인사만을 남긴 채 남으로 혹은 북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이들은, 분단문제가 70년을 넘길 것이라고 상상이라도 했을까? 세계사 속에서 냉전은 한국의 허리, 북위 38도선에서 처음 시작됐다. 이후 냉전은 전 지구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고,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모든 것들이 동원되었다. 스포츠, 영화, 우주개발도 체제의 우월함을 선전하는 도구로 쓰였다. 이런 허망한 경쟁의 막다른 골목에서 동구의 몰락으로 수십 년 유지되었던 냉전이 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한국에서만큼은 냉전은 골동품이 아니다. 21세기를 넘어서까지 생생하게 살아있다.

일본을 대신해 남한을 통치하고자 하는 미군정과 새롭게 해방 국가를 건설하길 염원하는 남한 민중은 서로 다른 궤도에서 생각을 했다. 미군정은 스스로를 점령자로 명시했듯, 점령군으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며, 통치 대상도 그에 맞는 태도를 갖춰줄 것을 바랐다. 반면 남한 민중에 있어서 미군정은 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 온 의로운 군대로, 조선의 자주적 건국을 물심양면 지원해 주어야 하는 도우미의 역할을 해야 했다. 이 상반된 입장은 당연히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늘이 무너졌다며 숨을 죽이고 있던 세력들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권력의 향방이 어디 있는지, 그 권력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간파한 친일파들이 갑자기 친미, 반공의 투사로 변신했다. 어차피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일제시대부터 일관되게 이어져 온 것이기에, 일본에 그랬듯이 미국에 몸과 마음을 바치면 되는 것이었다. 친일파에겐 아주 쉬운 일이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한국의 분단을 기정사실로 하고 남한의 통치자로 누구를 밀 것이냐는 고민에 빠졌다. 미당국은 좌우익에 편향되지 않고 대중적으로도 존경을 받고 있는 비공산계 정치지도자 여운형의 영향력과 능력을 높이 평가했으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마음대로 관리하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불안은 곧 해소됐다. 여운형이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백주대낮에, 경찰초소가 몇 발자국 거리도 안 되는 혜화동로터리에서였다. 경찰서에서 출발한 트럭이 여운형이 탄 승용차를 가로막았다. 이 틈에 괴한들이 서행하는 차의 범퍼를 밟고 뛰어올라 안에 타고 있던 여운형에게 권총을 난사했다. 바로 출동한 경찰은 범인을 잡지 않고 대신 권총을 들고 범인을 쫓아가던 여운형의 경호원을 검거해 수감했다. 범인들 중 한 명은 나중에 잡혔지만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담당수사관은 친일파의 거두 노덕술이었고 검사는 조재천이었는데 조재천은 이후 이승만 정권에서 법무부장관 자리를 꿰차게 된다.

북한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고, 과감한 개혁조치와 친일파 척결이 일어나자 미군정당국은 긴장했다. 군정이 종료되어도 미국이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 부국장을 지낸 프레스턴 굿펠로우(M. Preston Goodfellow)가 선택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굿펠로우는 이승만이 다른 한국 지도자들이 가질 수 없는 미국인보다 더한 "미국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그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고집과 가부장적 권위주의, 극단적 반공주의는 그의 인생 후반기에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게 된다. 해방 직후, 오랜 망명 끝에 서울로 입국한 이승만은 감격에 겨워했지만, 남한 민중들에게는 그의 귀국은 블록버스터급 비극의 막이 오르는 신호였다.

미군정 철도당국 "인도 사람은 굶는데 조선 사람은 강냉이 먹어 행복"

혼란 속에서도 해방된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자 한 조선 민중의 노력은 점점 커져갔다. 미군정에게 주어진 과제 중 하나는 38선 남쪽의 조선 땅에 자본주의를 이식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근대적 법률 제도를 조선에 도입해야 했다. 기본적인 헌법 가치, 인권, 노동권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에 따라 근대 자본주의적 계약 관계의 결과인 노동조합의 설립도 활발해진다. 노동조합의 설립은 조선 노동자가 봉건적 주종관계로부터 벗어나게 됨을 의미했다. 사농공상의 계급서열과 뼛속까지 스며든 노동에 대한 천시를 숙명처럼 여겨온 조선 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이라고 여겨온 자와 법적으로 대등한 계약 당사자로 마주 선다는 것은 조선 노동자들의 의식을 깨뜨리기에 충분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했지만 근본적으로 자본가와의 대립을 전제로 하기때문에, 각 세력의 입장에 따라 여러 시각으로 그 성격과 역할을 규정한다. 개별자본가들은 노동조합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총자본의 입장에서는 각각의 노동조합이 개별 기업 내에서만 움직이길 바란다. 반면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노조의 존재 유무는 양들에게 보호울타리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여기에 더 많은 양들이 모일수록 든든하다. 이 양들을 늑대로부터 지켜주는 목동과 사냥개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정치권력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이 단순한 문제, 즉 임금과 복지에만 주목하길 바란다. 사실 임금과 복지가 정치와 무관할 수 없지만 노동자의 경제적인 처지와 정치적인 문제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복잡한 함수들 속에서 그 사회의 문화와 풍습, 정치적 역량, 사회적 성숙도 등이 결국 노동조합이나 노동자의 처지를 결정짓게 된다.

이 같은 전제 속에서 본다면 1945년 해방정국에서 조선 남쪽 지역 노동자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최악이었다. 10월 10일 노동자들은 전국적인 조직을 만든다. 내셔널센터의 성격을 가지는 최초의 노조연합조직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좌파계열에서 만든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은 노동자들의 생활조건 확보라는 눈앞의 과제와 막 건설되는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만드는 대중조직으로서의 시대적 사명도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해방정국의 조선 남쪽에는 좌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군정이라는 실질 권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반공과 민족주의자의 탈을 쓴 친일파들이 있었다. 이들 친일반공 세력은 우익을 자처하며 좌파와 끊이지 않는 충돌을 벌였다. 또 양쪽을 저울질하며 대세를 보는 정치모리배들, 기업가들, 깡패들까지, 다양한 인종들이 해방 거리를 채웠다. 미군정의 지원 아래 우파들이 전평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대한노총이 46년 3월 10일 출범하게 된다. 한국 어용노조 연합조직체의 시작점이었다.

1946년 미군정 치하의 남한은 극심한 인플레로 치솟는 물가를 감당할 수 없었다. 실업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고용된 노동자들조차 삼시세끼 입에 풀칠하기도 힘겨웠다. 서울지역의 철도 노동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쌀을 확보하기 위해 산지 직접 구매를 시도했다. 중간 상인을 거쳐 서울에서 판매되는 쌀값을 감당하기에는 노동자들의 임금이 턱없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3월 7일, 철도국 경성공장 노동자 400명은 월급을 모아 성환에서 쌀을 사기 위해 대표직원을 파견했다. 그러나 지역 경찰의 검문 끝에 구매해오던 쌀 2000여 말을 모두 빼앗겼다. 더구나 구매단원으로 갔던 기관구 노동자가 달리는 열차에서 떨어지는 참사까지 일어났다.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경찰 조직이 해방 후에도 여전히 백성들을 괴롭히는 슈퍼 '갑'의 행태를 일삼은 결과였다. 3월 19일, 철도노동자들은 절박한 식량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 철도노조 서울지부의 11개 분회와 노동단체 연명으로 미군정 운수국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22일에는 군정청 운수국장 민휘식 고문관과의 면회도 있었다. 식량문제는 노조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경성공장 후생과장과 서무과장도 운수국장과의 면회에 참석했다. 이날의 면회는 파행으로 끝이 났다.

미군정청이 통치 편의를 위해 친일파들을 중용하고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반공으로 세탁하면서 미군정 곳곳에서 자리를 차지했다. 이러다 보니 민중 위에 군림하는 버릇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노동조합이나 집단행동에 대한 극단적인 반감을 보이고 있었다. 민휘식은 미군정청 소속의 관청기관에 무슨 노조냐며 노조분회를 때려 부수어야 한다고 호령했다. 공무원이 무슨 노조냐는 것이었다. 노조가 제출한 진정서도 접수할 수 없다며 반환시켰다. 미군정을 등에 업은 거만한 벼슬아치의 행태는 굶주린 노동자들의 분노를 더욱 가중시켰다. 철도노조 조합원들은 운수국장을 제치고 미 군정장관 러취에게 영문 진정서를 보냈다.

이런 가운데 철도국은 29일 열차식당 노동자 38명을 무단 해고 조치했다. 또한 38도선 이남의 철도 노동자 4만 명 가운데 1만5000명의 해고 계획을 밝혔다. 해방 전에는 철도 1킬로미터(Km)당 14~16명의 노동자가 필요했으나 이제는 8명이면 충분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철도노동자들은 강제해고반대투쟁을 결의했고 미군정청 철도 행정기구에 숨어 들어간 친일파 반동간부의 숙청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전국의 철도노동자들이 내건 첫 번째 요구는 '쌀을 달라'였다. 46년 6월 부산지역 철도 노동자들은 생활난에 대한 긴급 대책회의를 갖고 부산시 당국과 교섭을 벌이다가 성과가 없자 요구안을 갖고 서울로 향했다. 부산 지역 철도노동자들의 요구는, 종업원 가족 1인당 반미(飯米) 하루 3홉씩, 가족수당 1인당 200원 등이었다. 서울의 청량리 기관구에서도 1인당 3홉의 쌀을 달라며 군정청 운수국 운전과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했다.

7월 25일 오전, 철도노조 부위원장 오병모는 경성 철도공장을 방문해 공장장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공장장은 "딱하다, 노동자들에게 점심으로 우동을 한 그릇씩 만들어 주었는데 그들은 먹지 않고 국물까지 자기 집으로 싸 가지고 가서 어린것들이나 늙은이들에게 먹이는데 실로 눈물 나는 일이 아니냐. 그래서 어떻게 노력하여 우동이나마 한 그릇씩 더 줄려고 한다. 잡곡이라도 입수해 보려고 애쓰겠다"고 말했다. 당시 노동자들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증언이다.

철도노동자들이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식량을 배급하라는 요구에 대한 철도국의 답변은 9월 1일부터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운수부장 코넬슨은 한술 더 떴다. "인도 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 사람은 강냉이를 먹으니 행복하다."라고 발언하여 민족감정이란 기름 위에 불을 붙였다.

9월 14일 철도 노동자들은 일급제 반대, 하루 3홉 이상의 식량 배급 등의 요구를 담은 진정서를 코넬슨 운수부장에게 제출하고 21일까지 회답을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미군정청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9월 23일 철도노조는 '남조선철도종업원대우개선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24일부터 총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했다. 성질이 급한 부산지역 철도노동자들이 23일 전격적으로 파업에 돌입하면서 그 유명한 1946년 9월 전평파업의 막이 올랐다.

1946년의 '전평파업', 미군정은 "예고 없으니 불법"

철도노조가 파업을 벌이면 국토부나 철도당국, 보수 언론은 거짓말로 노조를 공격한다. 2013년 철도노조의 파업당시에도 "하루 승객 15명인 역에 역무원이 17명"이란 제목으로 비효율의 주범들이 제 밥그릇 챙기겠다고 파업에 나섰다는 식의 신문기사가 떴다. 기사 자료는 국토부가 제공했다. 기사가 뜨자 국토부가 관리하는 소설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서는 열심히 해당기사를 퍼 날랐다. 기사는 강원도 태백선 한 역의 운송수입이 년간 1400만 원에 불과한 데 직원들 임금은 11억3900만 원으로 역 수입의 81.3배나 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질타했다. 기사의 댓글들이 어땠을지는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으리라. 이 역은 쌍용역이다. 쌍용역은 화물취급을 주로 하는 역으로 여객의 이용률은 아주 적다. 인구밀도가 낮은 산골짜기 역에서 여객수입이 높을 리 없는 것은 당연하다. 국토부는 여객 운송수입만 인건비와 대비시키는 꼼수를 부렸다. 쌍용역의 화물 운송수입 95억 9600만 원은 누락시켰다. 17명의 근무자도 3교대로 이뤄지는 근무 특성을 감안 할 때 실제 투입 인원은 5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감춰졌다. 현재는 이마저도 줄어 14명 수준인데 한 명이라도 아프거나 급한 일이 있으면 근무시간 내내 3-4명이 모든 업무를 책임져야 한다. 파업을 절대악으로 보는 당국과 보수언론의 손발이 맞아 떨어져 벌어지는 이와 같은 해프닝의 원조는 1946년 전평의 철도 파업이었다.

▲지난 2013년 철도 파업 당시 ⓒ프레시안 자료사진

철도파업이 벌어지자 미 군정청은 긴급 담화를 발표하여 철도노조를 비난했다. "이번 운수부원들의 맹휴는 불법이다. 그 까닭은 맹휴 전에 예고가 있어야 할 터인데 그러한 정당한 길을 밟지 않고 돌연 맹휴했다. 또한 철도국에 종사하는 직원은 군정청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소방서원, 경찰관과 같은 군정직원이다. 그런데도 맹휴한 뒤에 요구조건을 제출하였다. 그 결과 지금 경부선에 입하 중이던 식량이 두절되었다. 미국에서 부산에 가져온 식량과 약품이 전 조선에 배치될 것이 맹휴로 인하여 전조선적으로 불필요한 곤란을 당하고 있다"라며 러취 군정장관은 목소리를 높였다. 철도 파업으로 부산항에 도착한 식량이 운송되지 못해 조선 인민이 굶주림을 당하고 있다는 군정청의 발표는 민심을 철도노조로부터 돌려놓기에 충분했다.

이에 철도노조는 군정청의 발표를 전면 반박하고 나서며 군정청과 진실게임에 돌입한다. 철도노조는 9월 13일부터 세 차례나 운수부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 교섭을 하였으며 파업 전에는 노조 대표가 직접 군정청에 출두하여 파업통보를 한 사실을 밝혔다. 이어서 "기차에는 인민에게 줄 쌀을 싣고 다니지 않는다. 화물이 산적한 중에도 소금과 쌀이 없으므로 철도 파업으로 식량 수송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폭로했다. 심지어는 전라도에서 사오는 2~3말의 소량의 쌀도 경찰이 압수하는 마당에 열차로 쌀이 운송된다는 것은 군정청의 거짓말이라고 철도노조는 밝혔다.

1946년 9월에서 10월까지, 전평 산하 철도노조를 중심으로 시작된 전국적 파업과 시민항쟁이 좌익분자의 선동에 의해서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남북대결과 냉전구도 속에서 해방공간에 대한 일방적인 규정이 지속된 결과다. 이런 분석은 미군정 최고 책임자 하지 중장의 1946년 당시의 인식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 중장은 9월 총파업이 "과격한 선동분자들에게 선량한 노동자들이 유인되어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거 일제가 3.1운동은 일부 과격세력이 순진한 조선인들을 선동하여 벌어진 사태라고 말했던 인식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1946년 9월의 전평 파업은 해방 후 1년의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희망이 절망으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나온 민중의 저항이었다. 일제가 물러난 뒤 식민지 백성의 삶을 청산하고 새 시대를 열 것만 같았던 희망은 신기루였다. 굶주림은 계속되었고 친일파는 보란 듯이 승승장구했다. 폭력이 난무했으며 테러가 공포를 조장했다.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자 이것이 해방이냐며 민중들이 일어났다. 좌익의 선동이 순진한 인민들을 꼬드겼다고 치부하기에 앞서, 그 인민들은 이미 고통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미군정의 노동탄압, 21세기와 똑같네

4만 명의 철도노동자들이 일손을 멈추자 파업의 불길은 전 산업으로 확산되었다. '쌀 배급', '임금인상', '해고반대', '노동운동 자유', '민주인사 석방' 등의 요구를 내걸었다. 금속, 화학업종을 비롯, 25만 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가세했다. 9월 27일에는 서울의 중학교와 전문학교 학생 1만5000명도 '학원의 자유',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등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미 군정청은 전평 파업을 시급히 진압하기로 했다.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은 9월 30일 새벽 장갑차와 소총으로 무장한 2000여 명의 진압경찰을 동원하여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가 있는 용산의 경성 철도공장을 포위했다.

진압조의 맨 앞은 1000여 명의 대한민주청년동맹, 독립촉성국민회 청년단과 대한노총 등 우익단체가 맡았다. 새벽 2시, 기관총과 권총을 든 괴한들이 경찰의 지원을 받으며 파업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전평 조합원 두 명이 사살당하고 수 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대한민청의 감찰부장 김두한은 철도노조원들에게 현장으로 복귀하지 않으면 가솔린으로 모두 불태워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용산 철도공장 진압소식을 듣고 응원차 달려온 많은 노동자들은 우익청년단의 공격에 밀려 한강 백사장 쪽으로 쫓겨났다. 전평의 9월 파업은 미군정과 우익단체의 폭력진압으로 한풀 꺾이는 듯했지만, 10월 전국적인 민중항쟁으로 이어졌다.
하지는 10월 14일에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남조선에는 세계에 손색이 없는 제일 좋은 노동법을 제정하여 노동자들에게 세계적으로 부여한 모든 권리를 주었음"에도 제3세력에 휘둘려 파업이 일어났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이런 판단은 전평의 파업에 대한 미군정 당국의 대처가 어떠할지를 쉽게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이후 미군정의 대한노총에 대한 적극적 지원과 전평에 대한 노골적 탄압이 일상화됐다.

전평 파업 후 1년이 지났다. 1947년 5월 1일 세계노동절(메이데이) 기념식은 두 군데에서 열렸다. 미군정이 지원하는 대한노총은 동대문에 있는 서울운동장에서, 전평은 남산공원에서 대회를 열었다. 이때 800여 명의 학생이 참가했다. 대한노총 주최 집회에 참가한 10여 명의 학생은 무사한 반면 전평이 주최한 노동자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은 모두 퇴학 처분을 받았다. 전평 주최 집회 참가를 사전에 모의했다는 이유로 철도, 체신 등의 분야에서 이미 많은 해고자가 나온 뒤였다.

시간을 거슬러 1946년 5월, 제60주년 노동절 기념식을 살펴보자.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기념대회가 열렸다. 20만 명이나 되는 참가자가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정오쯤 박헌영, 여운형, 허헌 등 노동계를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대표들이 등장했다. 개회사는 전평 위원장 허성택이 맡았다. 이어서 명예의장이 추대되었는데 스탈린·트루만·레온치오(세계노련 위원장)·박헌영·김일성·여운형·허헌이 이름을 올렸다. 소련의 최고 통치자 스탈린과 미국 대통령 트루만이 전평의 명예 의장으로 추대되고 김일성과 여운형 등이 나란히 거명되었다. 그만큼 해방정국은 다양한 희망과 가능성, 폭발력을 가진 시공간이었다.

(이 글은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영원한 철도노동자 이수갑 선생 유고집> 등을 참고해 썼다. 필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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